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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국(蹴鞠)
가죽 주머니로 공을 만들어 겨(糠)나 털(毛髮), 또는 공기를 넣어 발로 차던 놀이이다.
蹴 : 찰 축(足/12)
鞠 : 공 국(革/8)
(유의어)
답국(蹋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세계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스포츠는 축구(蹴球)가 아닐까 싶다. 4년마다 개최되는 월드컵 축구대회의 광적(狂的)인 열기를 감안하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현대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세상 만사에서 중국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어떤 일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은 2004년 7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3회 중국 국제축구박람회 개막식 석상에서 축구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공식 선포했다.
중국 산둥(山東)성 쯔보(淄博)를 도읍으로 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에서 처음 축국(蹴鞠)이라는 이름으로 축구가 등장한 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전해지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은 2005년 9월 쯔보축구박물관을 열었다.
축(蹴)은 발로 찬다는 뜻이며 국(鞠)은 가죽 공을 의미한다. 병정을 훈련시키는 놀이로 시작됐다.
축국은 구장(球場)이 없는 것과 있는 것, 또 양쪽에 골문을 설치한 경기 등이 있었다. 구장이 없이 아무데서 하는 축국은 오늘날 제기차기와 비슷하다.
구장 양쪽에 구멍을 판 축국은 한(漢)나라 때 성행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아버지를 위해 따로 경기장을 만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당(唐)나라 때엔 2개의 골문을 설치한 구장에서 축국을 했는데 오늘날의 축구와 비슷했다.
당대의 시인 왕유(王維)가 쓴 시 '한식 날 성 동쪽의 풍경(寒食城東卽事)'엔 축구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돼 있다.
가죽 공을 차서 번번이 나는 새 위로 지나가고(蹴鞠屢過飛鳥上)
그네를 뛰며 앞다퉈 수양버들 속에서 나온다(?韆競出垂楊裏).
당 시기에 축국이 발전한 까닭은 보병의 경우 군사훈련의 핵심이 진법(陣法) 훈련인데 축국은 공수(攻守)의 일정한 진법을 유지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명(元明) 때는 기병의 역할이 강조되며 축국은 점차 쇠퇴했고 청(淸)대 들어서는 민간에서 유행했다.
재미있는 건 축구의 고대 기원국인 중국은 이번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고, 현대 축구의 기원국인 영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16강에도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통의 계승과 발전은 후손의 몫임을 일깨워 준다.
축국(蹴鞠)
⭕ 일본의 축국
축국은 농주(弄珠) 또는 기구(氣毬)라고도 한다. 겨(糠), 털(毛髮), 공기 따위를 넣은 가죽 공을 여럿이 둘러서서 발로 차고 받는 놀이로, 일정한 높이까지 많이 차는 쪽이 이긴다.
우리네 축국 역사는 오래다. 구당서의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인능축국, 人能蹴鞠)는 내용이 그것이다(동이전). 신라도 마찬가지이다. 김유신은 정월에 집 앞에서 춘추공(春秋公)과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옷 끈을 밟아 떨어뜨렸다(삼국유사 권제1 기이1 태종 춘추공). 이것은 고려시대에도 성행되었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이규보의 시(공을 두고)이다. "바람 들어간 공 불룩하지만/ 발로 차면 쭈그러드네.// 바람 빠지면 사람들 흩어지고/ 공은 어느듯 빈주머니꼴이 되고마네."
12세기 초에, 겨나 털 대신 공기를 불어넣은 공이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말의 무예도보통지에서도 당의 초학기(初學記)를 들어 “국은 국(鞠, 球)으로 지금의 축국은 공놀이(球戱)이다. 옛적에는 털을 묶어 만들었으나, 지금은 가죽 태(소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찬다”면서,
다시 상소잡기(緗素雜記)를 인용하여 “축국은 두 가지이다. 기구(氣毬)는 발로 차는 것이고, 격구(擊毬)는 말을 타고 채로 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선 선조 때 중국 과도관의 방문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덕형이 우리 군사의 훈련 부족을 들며 “중국 군인들은 권투(拳鬪)로 어깨와 무릎을 쉬지 않고 움직였습니다.”하자, 충겸이 “이 제독(李提督)은 수시로 형제들과 축국을 하였답니다.” 덧붙였다.
임금은 “중국 장관들이 각기 여러 기예를 지녔음에도 우리는 성격이 느슨하여 팔짱을 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역시 습속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한탄하였다(선조실록 27년 4월 24일).
축국은 19세기에도 이어 내렸다. 동국세시기에 “젊은이들은 축국을 한다. 공은 큰 탄환만 하며 위에 장목을 꽂았다. 둘이 마주 서서 차되,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으뜸”이라고 적혔다. 이 책의 축국 시이다. "공을 번갈아/ 받아 차/ 몇 길씩 까마득히/ 잘도 오르내리네.//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재주라네.// 병졸들의 이 놀이는/ 예부터 전해 오네."
중국에서는 축국(蹴鞠), 답국(蹋鞠), 축국(蹙鞠), 답국(踏鞠)으로 불렀다. 오늘날은 축구를 족구(足球), 축국은 고대족구(足球) 또는 축국(蹴鞠)이라 이른다. 답(蹋), 답(踏), 축(蹙)은 ‘찬다’는 뜻이다.
은상(殷商)때 복사(卜辭)에 축국 관계 기사가 있어 역사가 오랜 것을 알려 준다. 한서 예문지(藝文志)에 “국(鞠)은 가죽(韋)으로 만들고, 안에 털을 넣으며, 이를 차는 것이 축답(蹴蹋)이다. 국은 힘을 써서 상대(지역)를 빼앗는 놀이인 데에서 병법에 맞는다. (중략) 근래 국을 구毬라고도 적는다(축국이십오편 안주, 蹴鞠二十五篇 顔注)”는 내용이 있다. 이 때 군사 훈련 종목으로 삼은 것이다.
사기(史記)에도 “제(齊)나라 임치(臨菑) 사람들이 축국을 즐겼다.” 하였고(소진 열전), 같은 책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에 “병졸들이 변경에서 굶주리고 있음에도, 표기장군이 땅에 금을 긋고 축국을 즐겼다”고 적혔다.
형초세시기에는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을 들어 “한식에 노는 축국은 황제(黃帝)가 군사 훈련을 위해 만들었다. 전국시대에 나왔다는 설도 있다. 국(鞠)과 구(毬)는 같은 것으로, 옛 사람들은 답축(蹋蹴)을 놀이 삼았다.”고 하였다.
한대에는 황제를 비롯하여, 장사꾼과 심부름꾼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겼다. 서진(西晉)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이다.
황제 유방(劉邦)이 시골 아버지를 궁궐로 모셨지만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본디 주정뱅이에 도살꾼인 그가 좋아한 닭싸움과 축국을 못한 까닭이다. 황제는 궁 안에 고향 마을을 만들고, 함께 살던 사람들을 불러들여 즐기게 하였다.
같은 책에 축국을 좋아한 성제(成帝)에게 신하들이 “몸이 피곤해진다”며 말리자, “이와 닮은 운동이 있으면 말하라 일러, 탄기로 대신하였다”는 기사도 있다(권2 탄기대축국, 彈棊代蹴踘).
상병화(尙秉和)는 “한 고조의 척 부인이 여후의 수족을 자르고 귀와 눈을 도려내어 국역(鞠域)에 버렸다는 국역은, 답국장(蹋鞠場)을 닮은 굴실”이라 하였다.
당시 축국장을 굴실(窟室)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굴실의 형태는 곽거병이 공이 다른 곳으로 굴러가는 막으려고 땅을 파서 답국장을 마련하였다는 기사로 미루어 땅을 우묵하게 판 것으로 보인다. 전용 구장은 수, 당 이후에 나왔다.
⭕ 한대 궁정의 축국
이에 대해 사사지마 쓰네호(笹島恒輔)가 “국역은 국성(鞠城)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국성이란, 축국장 주위를 벽으로 둘러 쌓은 것으로 (중략) 국역은 장방형으로 생각된다. 국역은 국실(鞠室)이라고도 하였다. 국성에는 동서 양쪽 벽 아래에 각기 6개의 국역이 있다. 그러나 군대 구장에는 벽을 두르지 않았으며, 축국 용 국역은 땅을 파서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 한대 군대의 축국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에서 나온 후한시대 조각품에 음악, 무용, 곡예 등과 함께 축국 장면이 새겨져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도 “한 말에 세 나라가 다투면서 사람들이활쏘기와 말 타기를 열심히 익히고, 집집마다 축국을 배웠다.”고 적혔다.
맹원로(孟元老)는 우군(右軍)이 황제 앞에서 축국을 벌였다고 하여(동경몽화록, 東京夢華錄 권9), 축국 열풍이 송대에도 이어진 것을 알려준다.
사사지마 쓰네호는 노는 방법에 따라 다음 네 시기로 나누었다.
1) 전한(서기전 202~서기후 8) 초기 무렵부터 일정한 국역(鞠域)을 정하였으며, 당(618~907) 초까지 이어졌다.
2) 후한(25~221) 중반기에 구역을 폐지, 20세기 초까지 내려왔다.
3) 당 초기에 두 개의 문을 세웠다가, 북송(960~1127) 때 없앴다.
4) 북송 말기에 문을 하나만 세웠으며, 청대(1616~1911) 중반쯤 자취를 감추었다.
경기 방법은 문의 유뮤와 수에 따라 1) 문을 두 개 세운 것, 2) 문이 하나인 것, 3) 문이 없는 것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3)은 혼자 또는 여럿이 둘러서서 차는 방법이다. 혼자인 경우 머리· 어깨· 등· 엉덩이· 가슴· 배· 무릎의 온 몸을 두 다리와 함께 쓴다. 공을 차서 넘기는 것을 혼신해방(渾身解放), 높이 차 올렸다가 받는 것을 비롱(飛弄), 상하좌우로 차되, 떨어뜨리지 않는 재주를 곤롱(滾弄)이라 한다.
다음은 12세기 초 왕운정(汪雲程)의 축국도보(蹴鞠圖譜) 내용이다. 한 사람(一人場)부터 9사람(九人場)까지 논다.
일인장을 시롱(厮弄)이라 한다. 혼자 차고 머리로 받기도 하며, 무릎에 얹고 돌려서 다시 두 발로 주고 받다가 차올리는 연속적 재간(井輪)이다. 제기처럼 공을 이어 차야 하며, 땅에 떨어뜨리면 진다.
둘이 마주 서서 차는 이인장은 백타(白打) 또는 타이(打二)라 한다. 셋이 돌려가며 차는 삼인장은 소관장(小官場)이다. 하화(下火)인 사인장은 넷이 둥글게 서서 공을 주고 받는다. 송대의 구리 거울(銅鏡)에도 넷이 둘러선 가운데 하나가 공을 차는 모습이 있다.
5명이 차는 것은 소출첨(小出尖) 이다. 6명이 차는 대출첨(大出尖)은 12보 떨어진 자리에 넷이 서서 차되, 장소를 바꾸지 못한다,
7명이 차는 낙화유수(落花流水)는 최고수가 공을 다음 하수자에게 차고, 그 다음은 다시 다음으로 차 나가며, 최 하수자가 다시 최고수에게 돌린다.
8명이 차는 것은 팔선과해(八仙過海) 또는 양산아(凉傘兒)이다. 한 변이 1.8미터의 네모 경기장에서 1과 5, 8과 4, 2와 6, 7과 3이 같은 각도로 선다. 공은 1에서 4, 4에서 7, 7에서 5, 5에서 2, 2에서 3, 3에서 8, 8에서 6, 6에서 1로 이어 찬다.
9명이 차는 답화심(蹋花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8명이 둥글게 둘러서고 하나가 가운데로 들어가서 공을 주고받는다. 예컨대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3에서 1로, 1에서 4로, 4에서 5로, 5에서 1로, 1에서 6으로, 6에서 7로, 7에서 1로, 1에서 8로, 8에서 9로, 9에서 1로 이어 나가며 2 · 4 · 6 · 8의 사람은 1에서 찬 것을 받아 다음으로 넘긴다.
둘째는 2에서 1로, 1에서 3으로, 3에서 1로, 1에서 4로, 4에서 1로, 1에서 5, 5에서 1로 이어 가서, 마지막에 1로 돌린다. 이것은 잘 차는 한 사람이 초심자를 가르치기 알맞은 방식이다. 10명이 차는 것은 전장(全場)이라 한다.
당대에는 희종(僖宗)이 축국을 즐겼으며, 문인 학사도 모두 익혔다. 국역이 없는 축국은 궁정에서 놀이로 벌였고, 가죽에 바람 넣은 공도 이때 선보였다. 앞에서 든대로, 문이 둘인 축국은 당대에 시작되었으며,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위에 그물을 친 높이 서너 발의 장대를 양쪽에 세워서 구문으로 삼았다.”고 적혔다.
공을 넣는 구멍(풍류안, 風流眼)은 그물 가운데에 있다. 골문 구멍을 공중에 둔 것은 바람 넣은 공이 나온 덕분이다.
⭕ 당대의 축국장과 문
초기의 공은 동물의 오줌통 등에 바람을 불어 넣어 부풀렸으며, 인원 제한 없이 편의에 따라 두 패로 나누었다. 두보(杜甫)가 청명시(淸明詩)에 “축국을 10년이나 했지만, 아직도 솜씨가 늘지 않았다(십년축국장추원, 十年蹴鞠將雛遠)”고 읊조린 것을 보면, 매우 어려웠던 모양이다.
축국은 당·송대에 이르러 더욱 성행 되었으며 공과 문 그리고 노는 방법 등 여러면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공은 환모(丸毛)와 환국(圜鞠) 두 가지였다. 환모는 늙은 소 털을 모아 진흙을 섞어 빚은 뒤, 소의 몸에 대고 문질러서 불려 만든다. 털을 가는 계절에는 곧 커지며, 털공이라고도 한다.
한대의 환모도 이를 닮았을 것이다. 환국은 여러 조각의 가죽을 둥글게 기워서 틀을 잡고 털로 채운 것으로, 국(鞠) 또는 구(毬)라 하며, 더러 동물의 오줌통도 이용하였다.
송대에는 무릎까지 차다가, 원 · 명대에 머리 부근까지 올렸으며, 여자와 어린이들도 즐겨 놀았다. 송대 및 금대 백자 베개의 어린이 모습이 그것이다.
원·명대의 여성 축국은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원 관한경(關漢卿)의 산곡(散曲)인 여교위(女校尉)는 전문적인 여자 축국을 노래한 것이며, 명 두근(杜菫)의 임여도(任女圖)에도 여성 축국 장면이 보인다. 이 전통은 명 · 청대에도 이어졌으며, 당시에는 축국을 기생이 갖추는 기예로 손꼽았다.
⭕ 원·명대의 축국 구장
금병매(金甁梅)의 축국 장면이다. 하나가 공을 머리로 받으면, 하나는 공을 담에 맞히기도 하며 갖가지 재주를 부리면서 연방 계저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네가 찬 공이 미처 원사(圓社)들 앞에 오기도 전에, 재빨리 받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다.
한 동안 (중략) 축국을 한 원사들은 서문경에게 계저 아씨의 축국 솜씨가 아주 좋아지셨습니다. 날아오는 공이 모두 곡구(曲球)여서, 저희도 받기가 여간 어렵지 않군요. 앞으로 한 두 번만 더 하면, 이 유곽 거리에서 아씨 자매님보다 더 잘 차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중략) 하며 아첨을 떨고, 화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네는 공을 두 번쯤 차고 나자, 벌써 눈 앞이 어지럽고 숨이 가빠지며 이마에 땀이 흘렀다. (중략) 계경 · 사희대 · 장소한 셋이 축국을 하고, 백독자와 나희자 둘이 땅에 떨어진 공을 주워 오는 것을 구경하였다.
축국을 업으로 삼는 원사들에 대한 시(조천하, 朝天下)가 있다. "집안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고/ 아무 데고 발 닿는 데에서 빌어 먹는다.// 빈둥빈둥 놀면서 일은 하지 않으니/ 공이 유일한 짝이로구나.// 날이면 날마다 거리에 나가/ 가난뱅이를 보면 돌아서고/ 부자만 좇아서 뒤 따르지만/ 그러나 시장기는 면치 못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도 못 버누나."
그들은 공을 다루는 재주는 있으나, 나날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아내들은 호구를 위해, 예사로 딴 사내에게 몸을 팔기도 하였다(제15회). 당시 축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조직인 원사가 있었고, 이들이 여기 저기 다니며 묘기를 보이거나, 축국을 가르치기도 한 것이다. 공을 머리로 받기도 한 것은 흥미롭다.
축국은 20세기에도 이어졌다. 연경세시기 내용이다. 10월 이후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돌을 갈아 만든 공을 앞 뒤에서 번갈아 차서 승부를 짓는다. 연경은 추위가 심한 까닭에 발가락이 동상에 걸리기 쉽다. 아이들이 공을 발로 차면 피가 잘 돌아 추위를 덜 수 있다. 이는 축국의 하나이다.
스튜어트 컬린(S. Culin)도 “흙이나 회를 헝겊으로 싼 평평한 공에 꿩 장목을 꽂았으며 상점 주인들이 발을 따뜻하게 하려고 찼다. 광동지방 출신들이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놀이를 벌였다.”고 적었다.
일본 축국은 왜명유취초(倭名類聚抄)에 “국(鞠)의 음은 국(菊)이다. 또 구(毬)의 이름은 ‘마리’로, 가죽 주머니에 겨(糠)를 채우고 찬다.”고 적혔다. 가장 오랜 기록은 일본서기에 있다.
(전략) 나까도미노 가마고노무라지(中臣鎌子連)는 (중략) 나까노 오오에(中大兄)가 법흥사(法興寺) 느티나무 (槻木) 아래에서 무리와 함께 축국(擊毬)을 할 때 공을 차는 순간 가죽신이 벗겨지자, 두 손으로 받아들고 나아가 무릎을 꿇고 바쳤다. 나까노 오오에도 무릎을 꿇고 받았다(皇極天皇 3년, 644 정월).
‘절간의 느티나무 아래’ 운운한 부분에서, 축국을 궁중 의식의 하나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미나모토(源高明)의 서궁기(西宮記)에 “다이고(醍醐)천황이 신하의 묘기를 구경하였다.”는 내용이 전하며, 953년 무라카미(村上)천황이 공을 520번 이상 차는 동안 땅에 떨어뜨리지 않은 자에게 녹(祿)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12세기에는 점점 의례화하여 경기 자체보다 차는 법을 중시하였으며, 기예를 중심으로 하는 독점적 가업(家業)으로 전승되었다.
13세기의 축국서 내외삼시초(內外三時抄)에 따르면, 당시 구장은 가로 17미터, 세로 27미터의 네모꼴 평지였다. 중앙부에 가로 6.6미터, 세로 6.9미터의 정방형 정점이 되도록 동남쪽에 버드나무, 동북에 벚나무, 서북에 소나무, 서남에 단풍나무를 심어서 네 계절을 나타냈다.
이것은 경기 기술상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공을 일부러 나무 위로 차 올려서 가지에 걸린 공이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게 하는 재간을 펼친 것이다.
한 동아리는 보통 4~6명이며, 경기장 크기에 따라 8명도 놀았다. 지름 24센티미터의 공은 큰 숫 사슴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가죽 구두를 신고 찼다. 복장도 따로 갖추었고 관이나 모자를 쓰는 것이 관례였다.
하루, 또는 일모(一暮) 축국은 서(序) · 파(破) · 급(急)의 세 단계로 이루어지며, 각 단계마다 차는 법이 달랐다. 서는 천천히 기본적인 재주를 펼치는 것이고, 파는 고도의 재간을 보이는 것이며, 급은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차는 회수를 겨루는 일이다.
소나무 아래의 사람이 처음 세 번 찬 다음 다른 사람에게 넘기며, 이를 일단삼족(一段三足)이라 한다. 처음에 공을 받고, 두 번째 높이 차 올려서 기량을 과시하며, 세 번째 상대가 받기 쉽도록 넘긴다.
12세기말에는 무사들도 이를 즐겼다. 요시다 겐코의 '도연초' 내용이다. 가마쿠라(鎌倉) 츄쇼오(中書王, 막부 장군 宗奠 왕자)가 계신 곳에서 축국 경기를 벌일 때이다. 비가 내린 뒤라 마당이 질어서 대책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때 사사키노오키노(佐佐木隱岐)가 달구지에 톱밥을 가득 싣고 와서 바쳤다. 이것을 마당에 가득 깔아서 진흙탕에서 축국을 하는 곤란을 피할 수 있었다. (후략)
14세기에 하나 조노(花園, 1308~1318) 천황이 축국이 왕자의 놀이가 되지 못한다고 일러서, 축국회를 폐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 동안 축국을 궁중에서 일상적으로 벌여왔던 것이다.
13세기 이후에는 서민들 사이에도 유행하였으며, 축국을 가직(家職)으로 삼는 공가(公家)가 나타났다. 비조정(飛鳥井) · 난파(難波) · 어자좌(御子左) · 삼종가(三宗家) 등이 나온 뒤 삼종가(三宗家)에서 면허증까지 발급하였고, 축국에 관한 의식과 방법도 이들 공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이후에는 비조정가만 남아 현재에 이른다.
축국 연기자는 축족(蹴足), 명수를 상족(上足), 미숙자는 비족(非足)이라 불렀다. 16세기에는 높이 15발(丈)에, 10미터 길이의 줄을 매고 그 위에서 외다리로 족국(足鞠)을 하며 건넌 재주꾼도 있었다(南都興福寺什物 大般若經 第73卷 奧書).
근래에는 교토에 축국보존회가 이어 온다. 1966년 1월, 한 신사(談山神社)에서 벌어진 축국 광경이다. 공은 사슴 가죽 두 장과 말 가죽으로 만들며, 먼저 신사의 본전(本殿)에 바치고 기도를 올린 뒤, 단풍나무 가지에 묶어서 경기장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여러 글귀를 붙인 검은 건(烏帽子)을 쓴 8명이 공을 찬다. 공은 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때로 열 댓 번까지도 찬다.
나카지마 가이(中島海)는 축국이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들어왔다면서, 문을 하나 세우고 겨루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중고(中古) 무사들이 즐긴 놀이이다. 홍 · 백 두 편 가운데 한 쪽이 문에 미리 정한 만큼 공을 넣으면 심판이 금은 또는 다른 색의 공을 준다. 이를 양구(揚毬)라 하며, 이를 문에 넣는 쪽이 이긴다. 상대는 이를 적극 막는 동시에, 자기 패들이 공을 넣게 하려고 애쓴다.
축국은 동남아시아에도 펴져 있으며, 이 지역 도서부에서는 세빠·라가라 한다. 말레이말 세빠(sepak)는 차기(蹴)이고, 라가(raga)는 공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공식 명칭인 세빠 타크로(takraw)는 말레이어 세빠와 타이어 타크로(축)의 합성어이며, 1956년에 경기 방법이 확정되었다.
등나무 공의 지름은 14센티미터, 무게는 160~180그램이다. 구장은 세로 13.42미터, 가로 6.1미터이고, 문에 높이 1.55미터의 그물을 친다. 경기는 세 명씩, 배구형식으로 벌인다. 말레이시아· 타이· 싱가폴· 미얀마·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에 협회도 결성되었으며, 구미 호주 등지에서도 애호가가 늘고 있다.
중국의 축구는 제기처럼 여럿이 둘러서서 차거나, 따로 마련한 경기장에서 두 패가 상대의 문에 차 넣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문도 하나만 세우거나, 양쪽에 두 개를 두거나, 아예 두지 않기도 하였다.
우리가 일본에 축국을 전하였고, 뒤의 방식이 일본에 들어간 것을 보면 우리도 즐겼을 법하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일본에서 이를 기예로 삼아 특정 가문에서 독점적으로 이어온 것은 특이한 일이다.
▶️ 蹴(찰 축)은 형성문자로 蹵(축)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발 족(足; 발)部와 음(音)을 나타내는就(취, 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蹴(축)은 ①(발로)차다 ②밟다 ③감축(減縮)하다, 줄이다 ④다가가다 ⑤쫓다, 뒤쫓다 ⑥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⑦불안(不安)해 하다 ⑧공경(恭敬)하는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11명이 한 팀이 되어 혁제의 볼을 차서 상대편의 골 속에 넣음으로써 승부를 다투는 경기를 축구(蹴球), 옛날 어린아이들이 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던 놀이를 축국(蹴鞠), 발로 냅다 참을 축축(蹴踧), 발로 차서 죽임을 축살(蹴殺), 발로 차고 짓밟음을 축답(蹴踏), 상대방의 의견이나 요구 등을 단번에 거절함 또는 상대방을 단번에 물리침을 일축(一蹴), 발로 걷어 참을 척축(踢蹴), 공이나 제기를 발로 참을 답축(蹋蹴), 축구 경기 따위에서 경기가 시작될 때 한 쪽 팀이 공을 먼저 차는 일을 선축(先蹴), 축구 경기에서 경기를 시작할 때 시축표에 놓은 공을 맨 처음 차는 일을 시축(始蹴), 매질하고 참으로 몸시 심한 학대를 편축(鞭蹴), 꾸짖으면서 발로 차면서 돕는다는 뜻으로 선행을 하면서 거칠고 발로 차듯이 베풀면 죽을지언정 먹을 것도 먹지 않는다는 말을 호축(嘑蹴), 옛날 어린아이들이 두서너 사람씩 떼를 지어 꿩깃으로 만든 구를 서로 번갈아 차던 놀이를 축치구(蹴雉毬), 성이 나서 바위를 찬다는 뜻으로 분을 참지 못하여 자기 몸을 해침의 비유한 말을 노축암(怒蹴巖) 등에 쓰인다.
▶️ 鞠(공 국/국문할 국, 궁궁이 궁)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가죽 혁(革; 가죽)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匊(국)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鞠(국, 궁)은 (1)축국(蹴鞠)이나 타구(打毬)에 쓰던 공. 가죽으로 둥글게 만든 주머니에 겨나 바람을 넣으며 꿩 깃을 꽂기도 함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공, 가죽 공 ②국화(菊花) ③성(姓)의 하나 ④궁하다(가난하고 어렵다) ⑤굽히다 ⑥국문(鞠問)하다 ⑦고하다 ⑧기르다 ⑨사랑하다 ⑩알리다 ⑪어리다 그리고 ⓐ궁궁이(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궁)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린 아이를 국자(鞠子), 어린아이를 사랑하여 기름을 국육(鞠育), 송사를 심리함을 국핵(鞠劾), 임금이 중대한 죄인을 국청에서 신문하던 일을 국문(鞠問), 죄상을 신문함을 국죄(鞠罪), 죄를 신문하여 다스림을 국치(鞠治), 추국을 당할 만한 중죄를 국정(鞠情), 국청에서 신문하는 중죄인을 국수(鞠囚), 격구를 하는 사람을 국수(鞠手), 조사하여 바로잡음을 국정(鞠正), 공을 발로 차는 놀이를 국희(鞠戱), 존경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이나 영위 앞에서 몸을 굽힘을 국궁(鞠躬), 나라에서 죄인을 잡아다가 국문함을 나국(拿鞠), 옛날 어린 아이들이 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던 놀이를 축국(蹴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 함을 국궁진췌(鞠躬盡瘁),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춰 온힘을 다한다는 뜻을 나타냄을 국궁진력(鞠躬盡力), 국양함을 공손히 해야함을 공유국양(恭惟鞠養)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