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반자의 처형에 관하여
the Beast
끄응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자다가 일어나 보니 몸이 괴상한 자세가 되어 있는 상황이야 잠꼬대가 심한 나로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양 팔이 몸 뒤로 가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는 잠꼬대 아니라 몽유병이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하다. 포박당했군. 그러고 보니 나는 반쯤 앉은 자세였고, 앞에는 비우다 만 주안상이 놓여 있었다. 그 곳은 내가 좀전까지 술을 마시던 우리 부대 주둔지의 한 폐가 안방이었고, 초토화된 이 일대에는 빛꽃이 들어오지 않아 기름 랜턴을 밝혀 둔 것까지 내가 잠들기 전과 그대로인 상태였다. 변한 거라면 내 자세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던 부관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굵직한 목소리. 나의 부관 미지 소위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팬더런의 거대한 덩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직하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미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강한 근육이완제와 약간의 수면제입니다. 대위님이 힘이 워낙 좋으셔서 약을 많이 썼습니다. 두 시간 정도는 일어서시기 힘들 겁니다."
미지의 침착한, 아니 뻔뻔한 태도에 나 역시 화를 내는 대신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근육이완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배반인가?"
"그렇습니다."
미지 소위의 대답은 평소 나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던 모습과 어조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랜턴 불빛이 어두워서, 게다가 낭인의 밤눈으로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왜?"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전황은 우리 혁명군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임프 황제의 화륜火輪 부대를 앞세운 진공작전은 혁명군의 끈질기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유격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고, 제국군에게는 더 이상 꺼내들 패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후방의 점령군이다. 제국군의 비차飛車 발진소인 세이버Saver가 8할 이상 파괴된 지금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기껏해야 주둔지 치안활동 도중 전선광증을 일으킨 신병이 난사한 총에 맞아죽을 위험 정도가 있다면 모를까.
"승리가 눈앞이다.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는 20년 이상 알고 지낸 고향 동생, 대학 동기에게 배신당했을 때 어떤 말을 외치는 게 가장 적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
미지는 품에서 군용 담배를 꺼내들고 파이프를 채웠다.
"한 대 하시겠습니까?"
"일 없다."
칙, 기름등에 가져다댄 파이프가 화르륵 타오른다. 미지는 왼손에 든 곰방대를 물고 한 모금 빤다. 어조는 계속 무미건조하다.
"일각 정도만 지나면 제국군에서 대위님을 모시러 올 겁니다."
"이거 어서 풀어라. 아무 것도 묻지 않겠다."
"가급적이면 고문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으니, 협조적으로 응하신다면 험한 꼴은 당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 협조에 의해 제국군의 공작병들이 혁명군 측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 수많은 장병들이 총탄 부족 속에서 죽어가게 되겠지... 너 이 개자식!
"미지!"
나는 부관인 소위가 아닌 고향 동생의 이름을 외쳤다. 녀석은 완전히 무력한 상태인 나를 험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갈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재갈을 물리고 구석에 처박는 것이 훨씬 속편한 방법임에도, 그러지 않고 내가 계속 말하게 놔두는 것만 봐도 녀석이 나와 대화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무심한 듯한 어조는 심적 갈등을 감추기 위한 가면일 것이었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20년 넘게 알아 온 미지가 아닐 것이었다. 나는 20년간 사람을 잘못 보고서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역시, 미지에게는 대화할 의사가 있었다. 남은 시간이 일각이라고 했던가.
"너, 뭔가가 있구나. 말해라. 형한테 말 못 할게 뭐가 있느냐. 무엇 때문에 동지들을 배신하고 날 팔아넘기려 하는 거냐?"
"왜 사십니까?"
"뭐?"
내가 아는 미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힘 좋고 성격 유쾌한 보통의 팬더런인 미지는 저런 철학적이고 짤막한 존재론적 성찰과는 안 어울린다. 미지는 파이프를 깊게 빨더니, 갑자기 성마른 어조로 쏟아붓듯이 말했다.
"사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혁명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 물론 형님에게는 타락한 제국의 권력자들을 갈아엎고 자유 만민에게 평등하게 기술의 과실을 분배하시려는 원대한 이상이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모든 혁명군이 다 그런 고결한 이상주의자는 아닙니다. 저처럼요. 저는 그냥 이기는 편에 붙고 싶었을 뿐입니다. 형님이 대위로 계시니, 연줄 가지고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미지도 나를 '대위님'이 아닌 '형님'이라고 불렀다. 사석에서처럼. 좀전에 술 한 잔 걸치면서 껄껄거릴 때처럼.
"지금 전황이 불리해 보인다는 거냐?"
"물론 아닙니다."
미지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답잖은 말을 하기가 영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도 미지는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저는 오래도록 잘 살고 싶습니다. 왜냐면, 오래오래 살아서 제 주변의 많은 이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는 게 제 가치관이거든요. 그러려면 잘 살아야 하고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새 시대를 열겠다는 치들에게 붙어서 전후에 한 자리 차지하고 어깨 힘 주려면 군인만한 직업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친구놈들 술값은 대신 내 주기 부족함이 없겠지요."
나도 친구잖아, 이 자식아.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그 많은 이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친구 녀석의 딸네미 돌잔치와 삼촌의 초상집이 동시에 있는 경우 같은 때 말이죠."
뜬금없는 일반론이었다. 그래서 조금 열적게 대답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지."
미지는 지당한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형님을 팔아넘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 뭐?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 늦게 깨달았다. 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솜비 때문입니다."
솜비, 미지의 정혼자. 남령의 주락 시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지는 뜯겨져 나가고 곰팡이가 가득한, 폐가의 황폐한 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메마른 어조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 역력한, 억눌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저께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협박을 참 세련되게 하더군요. 내용이 기억나는군요. <아직까지 약혼자분에 대한 구타 및 가혹행위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구타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폭행이 가해진다면, 그 폭행이란 글자 앞에는 '성'자가 추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운운."
7척 장신의 팬더런 여인에 대한 성폭행이라. 제국군에 팬더런이 없다면 그건 필시 이종족에 의해 행해질...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미지는 벽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저를 비난하고 욕하십시오. 저는 배신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모든 게 세상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욕하는 건 바보짓이니까요.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군과 어떻게 교신했나?"
동기를 안 이상, 내게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미지는 허공을 바라보며 뿜어 놓은 담배연기에게 말하듯 대답했다.
"진중에 의외로 첩자가 많더군요. 밀서에서 시킨 대로 신호를 하자 병사 몇이 찾아왔습니다."
애당초 의용군들 속에 첩자가 한 명도 없으리라는 환상 같은 것을 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장교로서 마음이 씁쓸했다. 웬만한 정보는 서로 다 새나가고 있었겠군.
"미지."
배반한 장교는 폐가 천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아직 기회는 있다. 나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가라." 아직도 내 손발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고, 네 약혼자의 구출에도 최선을 다할 테니 마음을 돌려라. 이건 옳지 못한 짓이다."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만일 납치된 것이 형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내 아내는 진중에 있어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역지사지 같은 걸 해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판단과는 별개로 내 심장은 공감했다. 덜컥, 하면서. 나도 참 감정적이라니까.
"저를 이해해 달라는 말 같은 것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부대원들은 저를 저주하고 욕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반려자의 무덤 앞에서 영광을 수여받느니 산 아내와 도망자 생활을 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내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풍겨 오는 냄새로 보아 낭인 병사들인 모양이었다. 절망감이 엄습했고 미지는 몸을 일으켜 폐가의 현관으로 나섰다. 그가 잠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달빛 아래 비친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 실려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낭인의 빌어먹을 근시안 때문이길 바라지만.
미지는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들에게 뭐라고 하려고 했다. 그리고 들이닥친 첫 번째 병사에게 그대로 턱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거구의 미지가 만만찮은 덩치의 세인트버나드 낭인에게 맞아 바닥의 주안상을 어지럽히며 요란하게 쓰러짐과 동시에 두 번째 병사가 나를 발견하고 외쳤다.
"대위님! 괜찮으십니까?"
내 눈은 그제서야 그들의 복색을 알아보았다. 혁명군 병사들이었다. 병사들이 내 결박을 풀어내는 동안, 나는 병사들의 구타에 거세게 저항하는 미지를 바라보았다. 미지는 얼굴 한 쪽에 안주 접시 위에 쓰러질 때 묻은 음식 찌끼를 가득 묻힌 채, 몸뚱이를 짓밟고 목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팔을 꺾는 우악스런 낭인과 인간 병사들에게 으르렁거리며 "좆 같은 반란군 새끼들!"이라고 외쳐댔다. 한 인간 병사가 그런 그의 얼굴을 군화발로 짓밟았다. 퍼억. 나는 눈을 돌렸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절망감이 엄습했다. 이제 미지를 구할 길은 없게 되었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 다른 인간 병사가 내게 물어 왔다.
"대위님! 이 배신자 새끼 어떻게 할까요?"
내가 가진 군인의 입은 머리의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우선 포박하고 막사로 연행한다. 배후를 조사해야 하니까."
나는 병사들이 임시변통으로 만든 간이 들것에 실려 시내를 지나 막사로 돌아갔다. 미지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보지 못했다. 험하게 다루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대위인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위였으니까.
그리고 솜비의 정혼자인 미지는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정혼자였으니까.
피차 역할분담은 마찬가지였다.
* * *
입단속을 지시했지만, 중대장을 팔아넘기고 적군에 투항하려 한 소대장의 이야기는 애당초 그리 쉽게 막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기에 사병들 사이에 북령 악어의 짝짓기보다도 빨리 퍼졌다. 그래서 조용히 심문하고 날이 밝으면 총살형을 집행하려던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앞부분만.
진지 경계병과 무기고 당번병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임시 연병장으로 삼고 있는 소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달밤 아래 학교 운동장이란 원래 푸른 달빛과 어슴푸레한 빛꽃 불빛으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유령 이야기 배경에나 걸맞을 장소였지만 화기를 챙겨든 7백여 명의 병사들이 모인 그곳은 여기저기서 피워든 랜턴 불빛에 일렁거리는 사내들의 얼굴들만큼이나 험악한 분위기였다. 사실 험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소학교 교장이 아침 조회 할 때 올라가곤 했을 연단에 다섯 개의 의자를 놓고 나와 네 중대장이 앉았다. 원래 의자는 여섯 개였지만, 여섯 번째 의자의 주인이 오늘의 심문 대상이었기에 중대원들은 의자를 다섯 개만 가지고 오면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 표정에 공감하고 싶었지만, 그랬기에 일부러 얼굴을 더 딱딱하게 굳혀야 했다. 내 그런 얼굴을 본 2소대장은 3소대장 미지를 빨리 불러내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자유연대혁명정부의 적법한 수권으로 성립된 11연대 2대대 6중대 군사법원의 제 4회 군사재판, 내부 역모자에 대한 심문을 실시하겠다. 이 재판은 자유연대혁명정부에 의해 법적 소양이 있는 것으로 인준된 6중대장 시칸 뫼 기라 대위 외 4명의 엄정한 심사 아래 이루어질 것이며..."
동령 출신 인간인 2소대장 레일리 준은 법학을 배운 재원이다. 그의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토씨 하나 실수하지 않는 목소리는 평소에는 정나미가 떨어질 만치 차가웠지만 오늘만큼은 오히려 그것이 고마웠다. 내게도 그런, 아니 그보다 더한 냉정함이 필요했기에. 나는 준 소대장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그러니까,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기대다시피 하면서 들었다.
친구의 배반을 심판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나는 너무도 약해져 있었다. 도베르만 낭인은 누구보다도 파워에 민감한 자이고, 도열한 병사들의 절반은 낭인인 만큼 그들 역시도 나의 파워가 위축되어 있음을 쉽게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군단 전체의 와해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재판을 끝내고 날이 밝자마자 처형해야 한다.
늘 그렇지만, 총살형은 밤에 행해지지 않는다.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면서 밤에 죽이는 것은 병사들에게 규율을 상기시키는 대신 공포와 흥분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로 처형식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처형 대상은 하룻밤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맞아야 하는 것이다.
심문과 구술에서 중대장인 내가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능한 허수아비여서가 아니라, 미지가 아무 것도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지는 자신이 찾아낸 적군의 첩자 병사들의 관등성명을 모두 대었지만 그것조차도 별 필요가 없었던 것이, 오늘 저녁 내가 구조될 수 있었던 것이 그 자들의 동태를 심상찮게 여긴 1소대장 마샤 실버빌이 뒤를 밟아 미지의 배반 사실을 알아낸 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문의 성과는 적 측의 밀서 전달 방식을 알아내고 두 명의 첩자를 더 찾아내는 데서 그쳤다. 첩자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일곱 명은 끌려나와 묶였다. 2소대장 레일리가, 오직 절차상의 필요 때문이라는 것이 역력한 말투로 싸늘하게 물었다.
"죄인들은 더 할 말이 있는가?"
"살려주십시오!"
고함을 지른 것은 아까부터 부들부들 떨던 오셀롯 취사병이었다. 동령의 병사들을 규합해 구성한 것이 혁명군이었기에 오셀롯은 드물었고 그래서 나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포박당한 채 꿈틀거리며 취사병은 외쳤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푼돈을 받고 정보를 전했을 뿐입니다! 동지를 팔아넘긴다거나 하는 일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아우성을 치는 병사에 자극받아 다른 죄수들도 뭐라 막 외치려 했지만 그 순간 2소대장이 성난 핏불테리어 낭인보다도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저 친구는 인간인데.
"간악한 놈들! 너희가 넘긴 정보 하나하나가 군의 발목을 잡고 숨통을 조여온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옛 군율대로 거열형에 처해도 시원찮을 놈들이 어찌 그 알량한 목숨을 구하느냐!"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본 당사자가 구명을 애걸하는 죄인들에게 저렇게 윽박을 지르는 건 차분하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차분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잘 통제된 군기에 의해 모인 병사들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낭인인 나는 그들의 파워가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살기에 가까운 것이 사병들 속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2소대장은 다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특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3소대장 미지의 하극상 행위다. 그는 감히 상관을 속여 독약을 먹이고 포박하여 적에게 팔아넘기려 하는, 기괴하기까지 한 반역행위를 감행했다. 이는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워 온 전우였던 우리를..."
내 나이는 서른다섯 살. 낭인 치고는 오래 살았다. 낭인 장교들의 진급이 빠른 것은 종족적인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낭인들은 보통 내 나이쯤 되면 돌연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0년간 친구라는 건, 평생지기라는 거나 다를 게 없지. 내 고향 동생, 미지.
"... 기만하고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적에게 빌붙으려 든 것이자, 우리 모두의 지휘권을 맡으신 대위님을 잃은 우리 중대 전체를..."
이제 황제군에 쓸모가 없어진 솜비는 죽겠군. 아마도 윤간 같은 건 당하지 않겠지만. 나는 입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와해시키고 자멸하게 하여 저 간악한 임프 황가의 지배를 계속케 하려는..."
이제 몇 시진 전에 먹은 근육이완제의 효력이 다했을 텐데도,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내 자세와 파워를 유지하며 앉아 있다가 어느새 조용해진 주위를 둘러보니, 2소대장이 말을 멈추고 내 쪽을 향해 눈짓을 하고 있었다. 내 몸이 다 그렇지만, 내 입 역시 10년을 근속한 군인의 것이다. 상황판단이 머리보다 빠르다.
"죄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영창 독방에 각각 감금한다. 날이 밝으면 이곳에서 처형을 집결한다. 이상."
증오와 적개심을 통제하느라 바쁜 병사들의 무리가, 소대별로 움직였다. 소대장을 잃은 3소대는 소대인솔자인 상등병의 구령에 맞추어 이동했다. 이동하는 병사들이 든 랜턴 불빛이 장사진을 이루어 은하수처럼 꿈틀거리며 소학교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 * *
끼이이익. 두툼한 철문이 열렸다. 임시 영창으로 사용하는 이 곳은 원래 냉동육 창고이다. 이 도시가 상등급 쇠고기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창고에는 꽤 많은 방이 있었고 그래서 죄수들을 각각 분리해 넣을 수 있었다. 물론 포박당한 채 두어 시진 정도 두었다가 날 밝는 즉시 총살할 죄수가 자살하거나 탈옥할 것을 염려해 각자 따로 가두는 것은 아니다. 혁명군의 군율은 죄수들에 대한 구타를 엄중히 금지시켰기에 장교들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복은 그들에게 철저한 고독을 맛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미지가 갇힌 감방에 가겠다고 했을 때 네 중대장은 소극적으로 인상을 쓰거나 적극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미지."
"군사재판에 회부된 죄수에게는 접견교통권이 없습니다."
내부첩자에 의한 기밀누설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부첩자가 아니다.
나는 미지의 고향 선배였다.
"거부할 권리도 없다."
미지의 커다란 몸은 손이 뒤로 묶인 채 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양 발목도 묶여 있었다. 파워 비슷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모습은 이 도시가 폐허가 되기 전에 아마도 이곳에 매달려 있었을 냉동된 소의 사체들을 연상케 했다. 어둠 속에서도 팬더런의 얼룩무늬는 뚜렷하게 보였다. 피 냄새가 났다.
"다쳤나."
"군화발에 얼굴을 차이면서 이가 몇 개 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발음이 부정확했고 말하면서 계속 피를 삼키는 듯했다.
"미지."
"돌아가십시오."
사실 할 말도 없었다. 솜비를 구해주겠다는 약속? 주둔군의 중대장이 언제 남령의 내륙 도시에서 납치되어 어느 제국군 진지에 억류되어 있을지 모르는 팬더런 처녀를 찾아내 구출한단 말인가? 남겨진 혈육들을 도와주겠다는 약속? 미지는 대숲에서 유기된 채 발견된 것을 사당패가 주워 내 고향까지 데려온 천애고아다. 어려운 환경에서 미지가 보인 학구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동령의 영도 라판의 영립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만큼. 그는 내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나는 몇 년을 응시해 합격했기에 그와 나의 합격년도는 같다. 똑똑한 인재였고 유쾌한 남자였다.
곧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가 되겠지만.
"무슨 말이든 하거라. 듣겠다."
"'옛 군율대로 거열형에 처해도 시원찮을' 죄인의 말 같은 건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녀석은 2소대장 레일리의 어조를 흉내내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부탁해 보자.
"중대장이 배신자 말을 듣겠다는 것도, 대위가 소위 말을 듣겠다는 것도 아니다. 시칸 형이 네 말을 듣겠다는 거다."
미지가 고개를 쳐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들으시죠. 아시겠지만 곧 죽을 자의 말은 귀에 오래 남습니다. 그 점 염두에 두십시오."
결코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이나마. 미지는 쉽게 멎지 않는 핏물을 꿀꺽 한 번 크게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걸 뱉아내지 않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일까.
"제가 봐 온 형님은 항상 정의롭고 바른, 멋진 분이었습니다. 강한 낭인이었고 남자로서도 흠 잡을 데가 없었지요. 저는 그런 형님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도 늘 따랐지요. 하지만 제가 형님께 갖고 있던 마음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미지의 어투는 체념한 것도, 원망과 저주에 차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확실치는 않았지만 자기혐오인 것 같았다.
"저는 유기된 업둥이입니다. 남의 집 앞에 버려진 것도 아닌, 배내옷에 싸여 대숲에 그냥 던져진 좆 만한 팬더런 새끼였지요. 그런 핏덩이를 사당패가 주워갔으면 응당 광대나 춤꾼으로 키워져야 마땅했겠지만, 저는 그러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사당패를 따라가지 않고 우리 도시에 남아, 어릴 때부터 그런 세상에 삐딱하게 맞서며 살아왔습니다. 둔하고 미련한 팬더런 고아 새끼라는, 철이 들기 전부터 제게 지긋지긋하게 붙어다니는 시선이 싫어 악착같이 공부를 하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습니다. 성과는 썩 좋았죠. 무려 동령 영립대학, 그것도 라판의 대학에 들어갈 정도였으니까요."
그것이 내가 아는 미지라는 팬더런의 일대기였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다. 나는 그가 그런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항상 밝고 명랑하게 살아오면서 동시에 자기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멋진 청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미지는 그 모든 것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었다. 자기 삶에 대해서야 유일한 권위 있는 해석자는 자신이겠지만, 그 유권 해석은 내 견해와 지나치게 달랐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죽을 자의 말을 막기는 싫었다. 대신 나는 귓바퀴를 세우고 미지의 말을 더 주의깊게 들었다. 미지의 말은 조금 빨라져 있었다.
"반면 형님은 달랐습니다. 제가 학원에서 처음 만난 형님은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생활고를 등에 업고 고학생활을 하는 동기생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또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신분답지 않게 늘 자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야말로 선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지요. 제게 형님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저 자신은 뒷골목 그늘 속에서 살아남으려 서로 물어뜯는 쥐새끼였는데, 형님은 대로를 당당히 거니는 백마 같은 존재였지요. 저는 형님께 다가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가슴아팠다. 내가 그와 친해진 것은 단지 농담이 잘 통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미지는 입의 통증이 도지는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입술 사이로 삼키지도 뱉지도 않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어두운 달빛 아래서 내 나쁜 시력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미지의 표정에 드러난 자기비하를 보니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 가슴이 쩍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착각이 들었다.
"제가 악착같이 살아오며 쌓아온 그 모든 가치관, 세상은 결국 살아남은 자의 것이고 선악 따위를 논하는 건 배부른 자들이 양지바른 곳에서 흥얼거리는 음풍농월일 뿐이라는 가치관이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무너져 갔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가 형님에게 감화되어 가는 과정일 거라고, 저도 밝은 모습을 가장하는 이가 아니라 진짜 밝은 성품을 가진 이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미지의 얼굴에 지독한 자조가 묻어났다.
"수채구멍 속에서 태어난 쥐새끼는 쥐새끼로 죽는 게 팔자였지요. 저는 저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살아남아서 죽은 것들을 비웃어주기 위해 악착같이 해온 노력들과 수많은 부정한 짓들 - 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시험 부정도 몇 건 있었습니다 - 이 옳지 않은 죄악이며 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저는 긍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형님을 가장 화려하게 처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자신의 방식으로 말이죠."
미지의 말은 아주 길었고, 힘이 드는지 중간중간 쉬어 가며 이어졌기에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침묵한 채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언제 심장마비로 죽을지 몰라 집무실에 유언장까지 써 둔 서른다섯의 늙은 낭인이 술에 섞인 약을 먹고 쓰러졌다가 일어난 몸으로 밤을 새 가며 감행하기엔 무리가 있는 짓이었지만, 나는 계속 들어야 했다. 나는 진실이 알고 싶었다.
"그리고 10년 전 대전大戰이 일어났고, 형은 당당하게 혁명군에 입대했지요. 말이 혁명군이지 그건 기존의 기득권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독차지하려는 속셈에 불과하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마저도 형님에 대한 반발심에서 품게 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형님을 파멸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입대했습니다. 형님의 연줄? 저는 얼마든지 제 능력만으로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님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형님 곁에 있어야 했지요."
먼 데서 호각소리가 울렸다. 우리 중대 병사들이 치안활동에 열심인가 보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여전히 형님의 그 빛을 동경하고 있었나 봅니다. 현실의 저는 언제 형님을 배반할 것인가만 궁리하고 있었지만, 저는 부질없게도 여전히 형님의 그, 황궁 정원에 매달린 수천 개의 빛꽃 같은 찬란한 빛이 부러웠습니다. 제가 꺼뜨리고 싶었던 빛이. 10년의 지긋지긋한 전란 속에서 저는 빛만을 갈구했습니다. 제게 그런 빛을 솜비가 주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요술사가 없었고 그래서 빛꽃 또한 없다. 연료도 없이 부서질 때까지 찬란하게 빛나는 어둠의 학살자. 나 역시 황궁의 빛꽃을 본 지는 오래 되었다. 황제군과 맞서는 우리에게 황궁은 최후의 수복지역이니까.
"그리고 솜비가 잡혀갔다는 말을 들은 뒤, 저는 제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잃었음을, 그리고 그런 저 자신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20년을 미루어 둔 복수에 착수했지요. 그들이 처음부터 형님을 잡아오라고 한 건 아닙니다. 그들은 장교급 끄나풀을 심어 놓는 수준에서 그치려고 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시칸 대위를 납치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무모한 계획이라며 말렸지요. 하지만 저는 솜비의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형님을 팔아넘기기로 했습니다."
나를 팔아 애인을 구하려 했던 젊은 팬더런은 어느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과 피와 침이 뒤섞인 짜운 냄새가 났다. 미지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증오하십시오. 쥐새끼는 페스트를 온몸에 담은 채, 시궁창에서 뒈지는 게 정석입니다."
나는 일어나 돌아서서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사로 돌아가다가 문득, 나야말로 내일 아침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늙은 낭인의 정석대로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아무래도 오늘 새벽이 적당할 것 같았다.
* * *
자유연대혁명정부력 11년(제국력 1275년) 4월 21일 인시 말, 11연대 2대대 6중대의 내부 첩자들에 대한 총살형이 실시되었다. 일곱 명의 첩자는 말뚝에 묶인 채 눈을 가리우고 각자 다섯 명씩, 총 서른다섯 명의 사수가 발사한 총을 맞았다. 사형수들의 시체는 바로 소각장에서 소각되어 어딘가에 버려졌다.
그 해 5월 27일경 6중대장 시칸 뫼 기라 대위가 집무실에서 급사했다. 낭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고 유언장도 미리 작성되어 있었기에 장례는 유언장에 지시된 대로 빠르게 치러졌다. 유언장 초안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그 유언장이 초고와 비교해 한 대목이 추가되었다는 점을 발견한 이는 없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남령의 주락 시에서 솜비라는 27세의 팬더런 여인의 가족을 찾아 위로금 200냥을 전달할 것.>
오랜만에 쓴 글이라 영 삐그덕거립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몸살로 쑤시는 몸 붙잡고 반강제로 쓴 글이니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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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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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타가 있습니다. '좇만한'이 아니라 '좆만한'이 옳은 표현입니다. 아아, 맙소사.
아아 그렇군요;;; 말로는 가끔 해도 글로 쓸 일은 없다 보니 그만;;;
하하하하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진지한 내용이지만, 양 눈두덩이가 시커먼 팬더의 얼굴로 말하니 긴장감이 사라지는군요. 하지만 인간이 아닌 반인반수이기에 왠지 글의 느낌이 잘 전해져 옵니다. 역시 배반이란 합리화는 되지만 용서는 안되는군요. 그 용서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보라색 배경이 오히려 눈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