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면은 재현된 것이 아니라 각색된 것이라는 개념은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가설에서 온 것이다. 영화는 문학이나 연극, 미술을 옮기면서 영화 화면의 표상 시스템에 따라 창조성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영화를 전통적인 예술의 방법과 연관지으면서 동시에 예술의 방법론과 다른 영화의 수사학이 병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 루이 쉬페르는 영화에서 화면은 항상-이미 다른 예술의 구성에서 빌려온 맥락 속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영화의 한계가 아니라 영화의 '화면'이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된 예술(들)의 '프레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정의되는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화면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이다.
"일본에서의 기호는 강력하다. 그 기호는 훌륭할 정도로 규칙적이고 과시적이며, 각기 알맞은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 기호는 토착화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일본의 기호는 비어 있다. 그 기의는 도망가며, (궁극적으로 대체물 없이) 군림하는 기표의 신과 진리와 도덕에서 나타난다." (롤랑 바르뜨) 일본을 '기호의 제국'이라고 명명한 롤랑 바르뜨의 표현을 일본 영화의 전통에 적용하면 놀랍도록 잘 들어맞는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것은 일본 영화의 스타일을 정식화시킨 세 명의 거장이 (기호로서도, 기의로서도) '훌륭할 정도로 규칙적이며 각기 알맞은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영화라는 무게를 안정감 있게 받쳐주는 삼각대와도 같이 서로 다른 기틀을 마련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양식미는 일본의 가옥구조 속에서 180도 시선을 찾아낸 정지된 롱 쇼트(일명 다다미 쇼트)에서 나왔으며, 미조구치 겐지는 공간을 조감하는 시적인 크레인 쇼트의 롱 테이크를 건축의 컨셉트에서 가져왔다. 반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모더니즘과 몽타쥬를 기하학적인 대칭구도로 응용하였으며 이것은 서구적인 수사학이었다. 그 이후 이 세 가지 양식은 일본의 바깥에서 일본영화라고 부르는 모든 범주의 기준이 되어왔다. 따라서 서방세계에 가장 먼저 발견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속에서 민족의 원형의식이나 일본적인 계보를 찾는 것은 그의 시대극에 역사적인 고증의 잣대를 들이 대는 것만큼 소득이 없는 일이다. '가짜 이미지'로 가득찬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로 접어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기작인 <란>이나 <꿈>에 이르면 이러한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근대 이후의 휴머니티에 관심이 높았던 구로사와 아키라는 동서양을 일체로 보는 '영화적인 혼합어(lingua franca)'로서 서양의 고전문학을 자신의 영화적 질료로 삼아왔다. 그는 늘 영화의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원작인 <백치>(52)를 만들었고 막심 고리끼의 룸펜을 원작으로 한 <밑바닥>(57)을 만들기도 했던 그의 다음 목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었다. 가장 먼저 오델로에 관심을 가졌으나 오손 웰즈의 영화를 보고 난 그는 크게 탄식하며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대신 멕베드를 번안하여 야망과 탐욕으로 자멸하는 무사 '와시주'의 이야기인 <거미둥지의 성>(57)을 만들었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 셰익스피어적인 이미지로 리어왕을 찍겠다는 말을 인터뷰 때마다 되풀이했다. 그러나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이 프로젝트는 계속 미루어졌다. 80년 구로사와는 일본에서 제작비를 구할 수 없었던 10년간의 슬럼프를 딛고 드디어 <카게무샤>를 완성했다.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화려한 재기는 조지 루카스와 코폴라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구로사와는 다시 딜레마에 빠졌다. 영화 전체를 거대한 벽화처럼 만들고 싶다는 의도는 실천되었지만 <카게무샤>가 담고 있는 세계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구로사와는 "다음 영화는 진짜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스펙터클이 바로 리어왕 을 영화로 옮기는 <란>이었다(구로사와가 <카게무샤>를 찍으면서 <란>의 일부를 동시에 촬영하여 루카스와 코폴라를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다). 구로사와는 <란>을 시작하면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카게무샤>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의 영화였다면 <란>은 화가의 입장으로 만들고 싶다. 일본의 전통을 서구회화처럼 찍어보겠다."
<란>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의도대로 미쳐가는 왕과 세 아들의 증오와 용서를 장엄하게 그려낸 거대한 회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그림이다. 16세기 일본의 중세봉건 시대를 그리고 있지만 화면의 질감이나 색채, 구도는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이다. 구로사와는 <란>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의 역사적 컨텍스트나 고증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셰익스피적인 이미지도 아니고 이전 구로사와 시대극의 낯익은 컨셉트도 아니다. <란>에 담긴 것은 모두 가짜 이미지이다. 역사도, 시간도, 공간도, 인물도, 의상도, 모두 가짜이다. 구로사와는 자신의 나이에 맞을 때까지 기다려온 셰익스피어적인 이야기를 뒤섞고 해체해버린 것이다. 유럽의 비평가들이 <란>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오리엔탈' 텍스트로 논의하는 것도, 지금의 구로사와가 예전의 구로사와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이다. 도날드 리치의 지적대로 <란>을 분기점으로 구로사와의 영화는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에서 '움직이는 그림 '(painting in motion)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란>은 구로사와의 종래의 서사극들보다 양식화된 구도가 더 두드러지며 드라마틱한 내러티브 구성으로 신화적인 인물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닫힌 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성에서의 전투 장면은 대표적인 예이다.
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파리 목숨처럼 쓰러지는 병사들,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살 속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늙은 왕, 간간히 인서트되는 먹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한 줄기 햇살, 불길로 타오르는 성체, 아버지와 아들의 배신, 형과 아우들의 혈전, 정적 속에 흐르는 음악은 그리스 고전비극의 숙명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로사와가 직접 그린 유화를 바탕으로(말 그대로 그림 콘티!) 촬영된 <란>의 하이라 이트는 단테의 지옥도처럼 그려낸 격렬한 전투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를 볼 수 있는 진짜 '구경거리'로서의 스펙터클이다. <요짐보>, <요새의 세 악인>, <7인의 사무라이>와 같은 흑백의 명장면을 만들었던 구로사와는 <란>의 전투장면을 색채의 대위법으로 다시 배치한다. 세 아들의 군대가 서로 다른 색깔의 깃발을 들고 후지산 초원지대에서 싸우는 시퀀스들은 마치 색채들의 전쟁을 보는 것 같다. 특히 망원 렌즈로 촬영하여 원근법을 지워버린 풀 쇼트에서는 물감이 서로 번지며 스며드는 듯한 시각적 최면효과를 자아낸다. 여기서 아키라가 카메라로 그리는 그림은 동양화의 여백을 버리고 유화물감과 파스텔의 질감으로 번갈아 구성된다. 사람의 동작에서 정서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 구로사와는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트래킹의 효율적인 사용과 팬의 효과), 몽타쥬와 롱테이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편집을 통하여 이미지-운동의 절정을 보여준다. 구로사와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란>의 미장센은 대칭과 비대칭의 기하학적인 구도로 짜여져 있다. 프레임 내에 경계선을 설정하는 구로사와는 들판과 같은 수평공간일 때는 대각선으로 대치된 병사들과 수직으로 든 깃발들로 운동성을 부여하고, 높이 솟은 성을 배경으로 할 때는 카메라의 시선 조율로 감정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다른 색깔의 복장을 입은 세 아들을 나란히 한 프레임에 잡을 때도 구로사와는 대각선의 구도로 배치한다. 이러한 구로사와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미장센은 프레임 내부에 여백의 공간을 두어 이미지-감정에 치 중했던 미조구치 겐지와는 정반대의 방식이다.
PS. 초원에서의 전투 시퀀스 중에는 아직까지 그 미스테리가 풀리지 않은 한 장면이 있다. 숲을 향해 전진하는 질서정연한 병사들과 초원 위에 드리워진 구름의 그림자 경계가 같은 속도와 방향 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구로사와가 태양과 구름의 경계를 기다려서 얻은 것인 가? 프랑스의 비평가 세르쥬 다네는 도대체 이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일본의 후지산 촬영현장을 방문하지만 끝내 정답을 찾지 못한다. 어쩌면 스펙터클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첫댓글여기도 구로사와 아끼라 좋아하는 분 계시군요. 저는 그분 작품 중에서 랴쇼몽, 7인의 사무라이, 거미의 집, 란, 꿈, 요새 세 악인, 데루스 우잘라 등등 몇 편 봤거든요. 그중에서 라쇼몽과 꿈이라는 영화가 가장 감명 깊더군요. 1950년대 영화계는 미국이 아니라 거의 일본의 독무대였죠.
정말 가능하면 영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술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분들 이름을 들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말이죠. 란은 전투 장면에서 성에 갇힌 아버지가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 살아나오는 장면이 나오죠. 거기서 아버지가 미쳐버려요. 거미의 집도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영화인데 영화가 정말 잘 됐죠.
첫댓글 여기도 구로사와 아끼라 좋아하는 분 계시군요. 저는 그분 작품 중에서 랴쇼몽, 7인의 사무라이, 거미의 집, 란, 꿈, 요새 세 악인, 데루스 우잘라 등등 몇 편 봤거든요. 그중에서 라쇼몽과 꿈이라는 영화가 가장 감명 깊더군요. 1950년대 영화계는 미국이 아니라 거의 일본의 독무대였죠.
정말 가능하면 영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술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분들 이름을 들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말이죠. 란은 전투 장면에서 성에 갇힌 아버지가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 살아나오는 장면이 나오죠. 거기서 아버지가 미쳐버려요. 거미의 집도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영화인데 영화가 정말 잘 됐죠.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정말 한 쇼트, 한쇼트 마다가 그림 같아요. 원래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잖아요. 특히 고전 그리스의 비극과 세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성을 영화를 통해 구성한 그 집념, 그런 작가주의에 저는 완전히 매료 당했습니다.
전장에서 훌륭하게 싸운 장수는 적이라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저에겐 미시마 유키오와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작가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