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일본군 병사의 잘려진 머리가 나무에 걸린 모습이며 미군 병사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 참혹한 사진이라 링크로 대체 ###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역에 참전한 미군 병력 중 일부는 죽은 일본군 병사의 시신을 개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일본병사 시신의 훼손에는 "전쟁 기념품", "전쟁 트로피"로서 사체의 일부를 가져가는 행동도 포함되었다. 사체의 다른 부위도 수집했지만 치아와 두개골이 "트로피"로서는 가장 인기가 많았다.
"트로피 가져오기"현상은 널리 퍼져가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잡지와 신문에도 특집기사로 다뤄졌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람의 팔로 만든 편지개봉기를 선물받았다는 소문도 떠돌았다.(루즈벨트는 선물을 거부한 후 제대로 된 장례절차를 거쳐 묻어주라고 명령했다.) 1942년 초 사체 훼손행위가 중요한 쟁점이 되면서 미합중국 군 당국은 이런 행위를 명확하게 규탄하면서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사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태평양 전역에서 계속 퍼져나갔으며 미군의 소지품중에서 일본군의 시신에서 떼어낸 "트로피 두개골"이 발견되는 사례는 계속해 일어났다.
잔학행위에 참여했던 미군 현역군인들이 포함된 몇몇 목격자들에 의하면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 황군병사의 사체에서 "트로피"를 가져오는 행동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전쟁 중 일어난 사체절단하기 유행은 일본인을 비인간화 시키는 미국 언론매체, 미국 사회에 잠재된 인종차별적 사고방식, 절망스러울 정도의 전시환경에서 생겨난 광기, 일본 황군의 비윤리적인 잔혹함에 대한 반발, 복수를 위한 갈망등의 요인들이 결합되어 생겨난 현상이라고 판단내린다. 일명 "트로피 탈취"라고 불리는 사체절단 행위는 계속해서 퍼져나갔으며 1942년 9월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은 "적군의 시체 중 어느 부위도 기념품으로 사용해서는 안되며"이 규정을 어기는 미군 병사는 "단호한 징계를 받게된다"라고 공표했다.
유진 본듀란트 슬레지
유진 슬레지는 동료 해병들이 일본군 병사 시체에서 금니를 뽑는 사례가 많았으며 적군이 아직 살아있는데도 금니를 빼내는 경우도 목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일본군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일본군은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팔을 움직지 못했지만 마지막 숨을 내쉬며 저항했다. 그 일본군의 입은 금을 덧씌운 치아때문에 광이 났고, 그를 붙잡은 해병은 금니를 탐냈다. 해병은 카바르 대검 칼끝을 일본인의 이뿌리에 대고 손바닥으로 칼손잡이를 내려쳤다. 일본군이 발로 해병을 걷어차자 칼끝이 치아에서 미끄러지며 희생자의 입속으로 박히고 말았다. 해병은 일본인에게 욕을 퍼부은 다음 대검으로 상대의 뺨을 귀밑까지 찢어버렸다. 이후 해병은 발로 상대의 아래턱을 ?은 후 다시 금니를 빼내려고 시도했다. 일본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나는 이렇게 외쳤다. "그놈을 죽여버려." 돌아온 대답은 욕설뿐이었다. 그러자 다른 해병이 달려와 일본군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어 극도의 고통을 끝내줬다. 약탈자는 잠시 투덜거리더니 자신의 전리품을 빼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미 해병 참전용사 출신인 도날드 폴은 적군 사체를 절단하는 행위가 증오와 복수에 대한 열망때문에 생겨났다고 본다.
과달카날에 도착한지 이틀채에 우리는 여러종류의 맥주와 보급품을 갖춘 일본군 야영지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사지가 잘리고 훼손당한 해병들의 수많은 사진 또한 발견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해병들이 잽(Jap)들의 귀를 잘라서 탄띠와 수류탄 안전핀에 걸고 돌아다녔다. 상부에서는 적군 시체를 절단하는 해병은 군법회의에 회부될거라고 경고했다... 실제 전투상황에서는 정신상태가 포악해지기 쉽다. 자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게된다. 잽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걸려 죽은 해병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부비트랩에 걸려 죽은 잽들도 목격했다. 해병들은 적군 사체를 절단해버렸다. 우리는 잽들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펠릴루에서 사용된 일본군 병사의 두개골을 이용한 최전방 경계 표식
미 해병대로 참전했던 오어 매리언도 사체훼손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우리는 일본군으로부터 야만성을 배웠다..... 하지만 과달카날에 도착한 열여섯살에서 열아홉살 밖에 안된 신병들 또한 빠르게 학습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더럽고, 굶주림 때문에 뼈만 남았으며, 대검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고, 전투복은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우리 아이들 몇몇이 일본군 머리 3개를 잘라와서 나무막대에 꽂아 "잽 방향"을 바라보도록 강변에 세워놨다. 대령이 막대에 꽂힌 일본군 머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자네들 뭐하는 짓인가? 마치 짐승같이 행동하는군." 더럽고 악취나는 어린 신병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령님, 우리는 짐승입니다. 짐승처럼 살고, 먹고, 짐승처럼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 씨발 도대체 뭘 기대하시는 겁니까?"
1943년 1월에 라이프(Life) 매거진은 과달카날 전투 도중 미 해병대 소속 탱크의 회전포탑 밑에 놓여진 일본군 병사의 잘려진 머리를 랄프 모스가 촬영한 사진을 실었다. 라이프지는 "미군 병사들이 적군에게 그런 야만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걸 믿기힘들다."라고 항의하는 수많은 편지들을 받아야했다. 편집장은 이렇게 답했다. "전쟁은 불쾌하고, 잔혹하며, 비인간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기록하여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보다 단순히 묻어두는 편이 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하지만 라이프지의 잘려진 머리 사진에 대한 항의편지는 같은 호에 실렸던 학대받은 고양이 사진에 비해 절반 수준밖에는 안되었다.
1943년 10월에 미군 최고 사령부는 지난 신문에 실린 기사들에 대해서 경고를 보냈다, 예를 들어서 일본군의 치아를 사용해 묵주를 만든 병사나 , 일본군의 머리를 끓이고 피부를 벗겨서 두개골로 만드는 작업을 촬영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해서는 안된다고 못받은 것이다.
1944년에 로드 아일랜드에서 기자로 일하던 윈필드 타운리 스콧은 한 수병이 신문사 사무실에 두개골 트로피를 전시한 걸 목격했다. 시인은 미군 수병에게 일본군 머리를 가공해 두개골로 만드는 작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피부가 벗겨진 머리를 구해서 그물에 넣어 함정 뒤에 매달아 놓아 바닷물로 씻어낸 다음, 광을 내고 마지막으로 가성소다를 사용해 문질러 씻는다고 말해주었다.)
두개골 끓이기
찰스 린드버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귀나 코가 잘려나간 수많은 일본군 시체를 목격했다는 해병장교와의 대화를 기록해놓았다. 두개골의 경우 방금 죽은 신선한 일본군 시체에서 잘라내기보다는 대부분 부패되어 몸에서 떨어져 나갔거나 완전히 해골화된 시체를 이용한다고 그 장교는 설명했다.
첫댓글 중간에 유진 슬레지는 퍼시픽의 그 유진 옹?? 퍼시픽서도 일본군 금니 뽑는거 잠깐 나오던데 이거에 대한 묘사였군용
그리고 맨위에 링크가 안들어가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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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가 안되용~ 직접쳐도 안되고
복사/붙여넣기 다시해보세요.
오....유진 슬레지씨 미남이시네요.....그나저나 전쟁은 정말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것 같군요.
저도 퍼시피보긴봤는데.. 전쟁은참..
thin red line에서 해병대 병사가 일본군 시체에서 금니를 뽑아대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탐룍스러운 병사겠구니 싶었습니다. 이제야 왜 저런 행위를 했었는지 이해가 가는군요. 두개골 트로피는 정말 의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