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가 노숙자가 되었을 때
2023.10.25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공간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독립서적이 가득한 책방, 사람 냄새 나
는 시장,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는 아늑한 나만의 카페 등. 나의 경우는 공항이다.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과정은 험난하다. 대학생 때는 어렵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고이 모든
돈으로 티켓을 사곤 했다. 직장인이 되니 돈은 있지만 상사의 눈치를 보며 휴가를 쓰는 것
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인천공항 지하의 맥도날드에서 먹는 맥
모닝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새벽 비행기를 위해 공항에 일찍 도착했던 날이었다. 최갑수 작가님의 <밤의 공항에서>를
읽으며 공항의 밤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한 지 5분 만에 후회했다. 잠이 밀려
온다. 조금 자고 새벽 2시에 집에서 나오는 것보다 차라리 공항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는데, 착각이었다.
‘인천공항 노숙’을 검색했다. 역시 한국인들의 정보력은 전세계 최고다. 이미 수많은 공항
노숙 경험자들의 글이 주르륵 펼쳐진다. 공항 지하에 있는 찜질방은 이미 만원이고 대기 줄
까지 늘어져 있다. 도착장B 옆에 있는 카페에는 콘센트도 있고, 와이파이도 있어서 명당이
라는 정보를 얻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콘센트를 찾는 하이에나가 된 기분으로 카페로 향했
으나 역시나 만석이다.
2층 공항 가운데에 위치한 카페는 불은 다 꺼져 있지만 콘센트는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가
보니 어두컴컴한 공간에 야간 근무를 하는 두 명의 직원이 애정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사
이 멀리 보이는 카페에 자리가 났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4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와
이파이와 콘센트를 제공해줄 마지막 자리기 때문이다. 새벽의 공항은 이토록 치열하다.
처음 공항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혹여나 여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손에 꼭 쥐고 있었고,
공항 이곳저곳에서 인증샷도 열 심히 찍었다. 면세점 구경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은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생각해 보면 다 추억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초토화되었던 얼마 전의 공항.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공항도 나도 예전
처럼 돌아 갈 수 있을까? 나를 늘 설레게 했던 장소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느꼈던 일상적인 것들에 소중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엄지사진관 수필, <좋은 건 같이 봐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