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을 미장하다
손석호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슬퍼서
웃었다
울음도 자주 울면 얇아져
미장 층처럼 거친 세상에서 쉽게 찢어지고
때론 낯선 지하도 바닥에 떨어져 덩어리째 아무렇게 굳었다
울퉁불퉁한 초벌 바름 표면에 밀어 넣던
통증 부스러기 흩날리고
햇볕에 그을린 당신이 재벌 바름 되기 시작하자
무엇이든 세 번은 발라야 얼굴을 갖게 된다며 바빠지는 흙손
흙손 뒷면에 노을이 들이치고
붉어져 선명하게 드러나는 화상흔
예상치 못한 화재였다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아물 때마다 뜯어내던 눅눅한 당신과
욱여넣어야 할 요철 많던 삶의 벽면
정처 없이 떠돌며 표정을 미장했으나
얼굴에서 꺼지지 않는 화염
노을에 불을 붙인다
이마에 기댄 팔뚝을 타고 타오르는 붉은 손목의 감정들
어디든 지나가면 평평해지던 흙손을 놓친다
가까워지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
황급히 골목을 돌아나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포격 멈춘 부서진 창고 모퉁이
소년의 눈에 기대어 웅크린 어둠
공포가 번쩍이며 하얗게 웃고
뱉어낸 울음이 잘린 다리 옆에서 자지러지고
광선은 어둠을 밝히는 게 아니라
한 번은 죽음을 실행하고
다시 한번은 죽음을 확인하고
조준하지 않아도
명중되는 슬픔
부들거리다 웅얼거리는 그림자
깡마른 침묵
벽돌과 벽돌 사이 줄눈처럼 포로가 된 붉은 눈
끝없이 폭발하는 귀
장난감 대신 포탄 파편을 줍는 어린 손
지구는 잠시도 멈추질 않고
흰 눈에 찍힌 죽은 자의 선명한 발자국
죽은 자의 손목시계 속
아직 살아있는 시간
그리고
저 눈 녹아
발자국 지워지면
돌아올 수 없는 자의 두고 간 시간은
두고 간 시간
나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사람이고 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좋은 작품을 쓰지도 못하면서 다작하는 편이 아니다. 어쩌다 청탁원고 마감을 맞추려 밤을 새워 쓰기도 하지만 쓰고 싶을 때만 시를 쓴다. 시를 쓰고 싶은 날에는 시를 쓰기 전에 무작정 거리로 나와 정처 없이 떠도는 버릇이 있다. 거리를 걸으며 시장을 보듯 시어들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흥정하며 마음속에 담아온다. 언젠가 황학동 벼룩시장의 외진 골목을 지날 때였다. 손목시계를 무더기로 쌓아두고 판매하는 가판에 저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가판대의 손목시계는 모두 작동하지 않는 고장 난 시계일 뿐만 아니라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된 시계로 보였다. 판매가격은 무조건 천 원이라고 사각 골판지에 쓰여 있었는데, 손목시계 무더기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흥미로웠다. 몸통만 있는 시계, 시곗줄이 한쪽만 있는 시계, 액정이나 유리 커버가 깨진 시계, 시곗바늘이 없는 시계 등 고장 난 손목시계가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마치 시간의 시쳇더미 같았다.
손목시계들은 유실, 도난, 고장 등 여러 사유로 주인의 손목을 떠났을 것이고 잊은 시간, 잃은 시간, 버려진 시간, 아픈 시간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거기엔 사자가 된 착용자의 두고 간 시간도 섞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문득 우크라이나가 생각났다. TV에서 본 우크라이나 전쟁 영상에서 병사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와, 어쩌면 사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그 병사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손목시계를 떠올렸다. 손목시계의 시간은 사자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손목에서 살아있을 것이고 혼자 돌아가던 손목의 시간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손목이 온기를 잃듯 차갑게 정지할 것이다. 이 순간에도 지구라는 굴레는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 우리의 짧은 인생도 굴레 속에서 삐걱대며 돌아가고 있고 누구든 언젠가는 시간을 두고 떠날 것이다. 지금 지구는 두고 간 아픈 시간으로 가득하다. 우리 이제 두고 간 시간을 찬찬히 닦아주고 보듬어 보자. 살아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어 가능한 이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