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23년 전 광주에서는 미국의 비호 아래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누었던 비극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수의 힘있는 사람들의 권력유지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벌어졌던 이 학살극은 우리가 해결해 가야할 우리의 역사이며 효순이, 미선이 이름으로 되살아난 우리의 현실입니다.
위 노래는 5월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중에 하나입니다.
너무나도 억울하게 스러져 갔던 광주 2000 영령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가슴에 새겨 봅시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배경
광주민중항쟁 일지 - 광주항쟁 전개과정
광주학살의 실상 - 그 당시 학살사례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의
5.18로 바라본 광주 - 5.18 사적지
오월 열사 이야기
오월 청소년 열사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오월열사
5.18묘역 민족민주열사
- 노동열사
- 재야열사
- 학생열사
< 별첨자료 >
1. 미국의 광주학살 방조, 승인 자료
2. 2002 5.18 시민법정 다시보기
== 항쟁배경 ==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반도, 민주화운동과 박정희 죽음, 광주의 역사성이 하나로 모여 폭발한 것이 5.18이기 때문에 5.18 민중항쟁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 3가지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1.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반도
미국은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과 함께 지구를 나눠가졌다.
미국의 세계전략은 지구를 자본주의화, 제국주의화 하여 지구를 손안에 넣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대장인 소련의 영향력을 막는 것이 제 1과제며, 3세계를 신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제 2과제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보적인 노동운동의 싹을 없애는 것이 제3과제였다.
한반도는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서유럽과 함께 수레바퀴의 하나가 될 정도로 전략요충지가 된다.
왜냐면 동북아에는 사회주의 강국인 소련, 중국, 북한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에 맞서고 있고, 유럽에서는 모스크바와 동유럽이 형제국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곳은 석유가 나는 중동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나토와 주한미군의 위상은 미군에서 아주 높다.
해외 사령부 중에서 별 4개가 있는 곳이 바로 나토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다.
한국군에서 보안사, 수방사, 특전사령관이 노른자위인 것처럼 미군보직에서도 주한미군은 노른자위다.
주일사령관은 별이 3개다. 이것은 한반도가 일본보다 더 중요한 군사요충지라는 뜻이다.
즉 일본은 대소전진기지인 남한의 후방기지, 병참기지 역할을 하였다.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부터 이런 역할을 맡아 군수산업을 발전시켜 한국전쟁 특수를 누려 2차대전의 상처를 딛고 빠른 경제성장을 하게 된다.
소련이 갈팡질팡 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세계전략은 중국을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대로 정한 리비아, 이라크, 쿠바, 북한, 시리아등 악마의 나라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
용산에 있는 미 8군을 국방성에서는 Kingdom of Yongsan (용산왕국) 또는 ‘제 8 제국군대’라고 부른다. 왜냐면 면장 정도 계급으로 도지사 대접과 행세가 가능한 나라는 한국뿐이므로.
80년대 중반 S그룹 회장이 겪은 일화를 알고 나면 한국에서 미국이 갖는 영향력을 손쉽게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슬픈 마음까지 느끼게 된다.
그는 미 8군 골프장에서 미국사람을 만났다.
“하이” 그런데 코쟁이는 “안녕하세요?”라며 우리말로 대답했다.
코쟁이는 우리말도 잘했고 한국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회장은 ‘이 사람은 보통 군인이 아니야, 근무시간에 사복을 입고 골프를 치는 것을 보거나 우리나라 사정에 밝은 것으로 보아 미 CIA 간부가 확실해’하며 북한산에 있는 초호화판 요정으로 모시고 가 극진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명함을 주면서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라고 깍듯이 보냈다.
얼마 뒤 회장이 연락해 부부동반으로 용평 스키장에 갔고 사장단 회의까지 초대해서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3일이 멀다하고 선물공세를 펼쳤다.
코쟁이는 9시 뉴스를 빠지지 않고 보면서 미국의 높은 양반에 대한 가십거리들을 무슨 귀중한 정보인양 흘려주며 회장의 접대를 마음껏 즐겼다.
코쟁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 8군 소속 병참계 보급 중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고위층 인사일수록 미국사람이면 사족을 못쓴다”
왜일까?
그것은 출세하려면 미국줄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고위층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미 8군 출입증은 한국 사회에서 신분의 상징이다. 자신의 자가용에 미 8군 출입증을 달고 다니는 것이 마치 암행어사 마패나 되듯 으스대고 뽐낸다. 미군은 자체 수익금으로 기지안에 클럽을 운영하고 호텔을 짓고 있다.
얼마전 9시 뉴스에 나왔듯이 여기를 이용하며 미군배를 채워주는 사람들은 100에 90은 한국 사람들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왕조시대보다 더 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에게 전략적 요충지며 그들의 이익이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는 황금의 땅 한국에서 광주시민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자 미국은 그들의 ‘전략과 이익’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전두환에게 한국군의 투입을 승인하고 미국 항공모함을 진해로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들이 직접 내뱉은 말을 보자.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에서 안정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이익에 관한 문제였다.”
- 5월 31일 미 고위정책 재검토회의 -
“사이공 함락 후 아시아에서 미국의 우방이 맞이한 최대 위기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 5월 27일 워싱턴 포스트 -
미국은 75년 베트남전 패배, 캄보디아 혁명, 미국의 안방인 남미에서 칠레, 니카라과 혁명, 아프니카스탄에 소련군 진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79년 이란혁명으로 미대사관이 점령되면서 3세계전략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이런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익’에 엄청나게 중요한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질겁했으며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한 것이다.
2.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박정희 죽음
총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끝내 총성과 함께 세상을 떴다.
그는 18년 동안 반공과 경제발전을 앞세워 자기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렸고 공장과 대학에 경찰을 들여보내 노동자와 학생들의 움직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시하였다. 민중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던 4.19의 감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이 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싹을 군화발로 짓이겨버렸다. 그러나 민중은 밟을수록 생명력이 질겨지는 보리와 같이 거센 눈보라를 이겨내고 새봄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내 79년 10월 26일 독재자가 사라지고 지배권력은 흔들렸다. 대학생들이 가장 먼저 일어섰고 집단행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노동자들도 2,168회의 노동쟁의를 통해 그동안 억눌린 설움을 마음껏 뿜어냈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 이제 막 싹이 나고있는 보리밭을 군화발과 탱크로 뭉게 버렸다. 육사생도를 움직여 5.16 군사쿠데타 지지 데모를 벌였고 청와대 경비를 하면서 박정희 양아들이 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대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권력을 노린 그는 유학할 때 미국정부와 군부핵심 인물들과 친분을 다지면서 미국으로부터 믿을만한 친미성향의 정치군인으로 쑥쑥 자라고 있었다. 그중 한사람이 주한미군 사령관인 워컴이다. 전두환은 워컴과 베트남전에서 깊이 사귀면서 80년 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전두환은 경쟁자인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없애기 위해 79년 12월 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청와대를 향한 게임에서 가장 앞서나갔다.
이렇게 군대를 손에 쥔 그는 민중의 저항만 누르면 대통령 자리에 올라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80년 2월18일 공수부대를 비롯한 주요 부대에 폭동진압훈련을 명령하고 투입을 준비시켰다.
다음은 2월 27일 국방정보국이 미국방부에 보고한 ‘특전사 부대위치와 주요인물’에 대한 비밀전문이다.
‘특전사는 국내치안에 계속 개입하고 있다. 서울 지역에 있는 특전사 병력은 낮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되면 주요 거점이 특전사 병력으로 강화된다.’
학생회를 만들면서 조직력을 키워 온 대학생들은 5월 14일 7만여 명이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였고, 15일에는 10만여 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시위를 하였다.
대학은 민주주의를 위해 강철을 담금질하는 뜨거운 용광로였고 군부에게는 가장 무서운 저항세력이었다.
노동자들도 노동시간 단축과 40%나 임금을 올리면서 승리하는 싸움을 전국에서 벌여 나갔다. 이에 놀란 군부는 4월부터 쟁의현장에 경찰을 집어넣어 진압에 나섰다. 4월 20일 강원도 사북 탄광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치열한 저항을 벌였다.
3,500명이 햇볕도 없는 두더지 생활을 하면서 18만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서럽게 살고 있었다. 어용노조위원장이 혼자서 임금인상율을 정해버리자 성난 노동자들이 투쟁에 들어갔고 경찰은 어김없이 찾아와 노동자들을 강제해산하다 경찰차에 치어 광부 4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동료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 광업소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광업소 무기고와 예비군 무기고까지 점거했지만 무장하지는 않았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경찰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00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다.
노동자들은 돌로 경찰을 공격했고 부녀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 주며 적극 동참했다. 경찰은 놀라 도망을 쳤고 3일 동안 사북읍은 노동자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자치규찰대를 만들어 질서유지에 힘썼다. 이 투쟁은 전국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천제철, 일신제강, 동국제강, 원진레이온 등에서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하였다.
이 때 놀라운 사실이 5월 8일 비밀전문에 나온다.
강원도 사북에서 경찰이 도망칠 정도로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세지자 전두환은 공수부대를 대기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든 특전사 부대가 비상 대기중이며 13공수는 5월 6일 서울로 이동했고 11공수도 7일 서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직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사태 때문에 원주지역에서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노동자와 대학생들은 군부에 맞서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를 놔두고서는 ‘다 된밥에 재 뿌리듯’ 청와대를 향한 게임에서 민중에게 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서둘러 민중과 민주주의를 향해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확대라는 기습공격을 하였다.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 앞에서 민중은 숨을 죽였다.
그러나 오직 한곳 남녘의 땅, 광주에서 한반도와 세계를 놀라게 한 역사가 시작된다.
3. 광주의 역사성
왜 하필이면 광주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
전국이 조용한 데 왜, 광주만 공수부대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1) 호남민중의 저항정신
호남은 민족의 운명이 벼랑에 설 때마다 목숨을 바쳐 싸워온 정의로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 70%가 호남출신이었고 썩은 봉건정부와 일본군에 맞서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외치며 45만명이 죽은 갑오농민전쟁에서도 광주·전남에서 만 22만 명이 목숨을 바쳤다.
이 정신은 조선말 의병전쟁과 3.1운동 그리고 전국 94개 학교의 연대투쟁으로 퍼진 광주학생운동 등 자랑 찬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이어갔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온 광주·전남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 전남대를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지식인과 종교인이 중심에 선 재야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2)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전투성
광주지역 학생운동은 ‘유신잔당의 타도를 위한 전면적 투쟁’으로 목표를 잡고 시민과 함께하는 투쟁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서울 지역 학생들은 군투입에 겁을 먹고 15일 10만이 모인 서울역 집회를 자체 해산해 버렸다. 이에 대해 광주에서는 이를 비판하며 유신잔당과 결연한 투쟁을 선언했다.
5월 15일 도청에서 9개 대학 2만명이 시국성토대회를 하고 횃불 시위를 하였다.
16일에는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열고 횃불 시위를 하였다. 교수들도 적극 참여했으며 경찰들도 이들을 보호하였다.
시대를 앞서가고 이끌어 가는 학생운동의 정세판단과 투쟁의지가 서울과 광주에서 다르게 나타났고 이는 엄청남 결과를 낳고 말았다.
3) 호남에 대한 푸대접
그리고 호남사람에 대한 정권의 푸대접은 내 고장에서 인물 하나 나와야 한다는 집단의식으로 뼈 속 깊이 박혔다.
4) 벼랑으로 몰린 민중생존권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농촌과 직접 연결 된 광주가 정부의 저곡가 저임금으로 시달린데다 높은 물가와 실업율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 때문에 민중들의 불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5) 정서적 유대감이 강한 도시
또한 산업화가 안되어 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농촌의 전통적인 인간적 유대감이 강한 도시였다.
이는 광주해방공동체에서 뚜렷하게 보여준다.
6) 공수부대의 잔악성
그리고 79년 10월 16일 일어난 부마항쟁을 3공수가 탱크를 앞세우고 1시간만에 진압한 경험이 있어 광주에서도 초전박살의 자세로 살인기계와 같은 야만성과 잔학성을 보였다.
이렇게 3가지 배경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우리 역사를 한 순간에 커다랗게 발전시킨 “5.18민중항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광주항쟁 전개과정 ==
5.17 군사쿠데타는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진행되어갔다.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주요도시에 군사력이 집중되었다. 모든 도시와 지역, 그리고 국민들에게 침묵이 강요되었다. 남한의 모든 지역과 도시 주민들이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던 기간이었다. 하지만 남쪽의 빛고을 광주에서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시기별로 4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1. 18, 19일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2. 20, 21일 이에 뭔가 대응해야겠다고 느낀 시민들이 힘을 모아서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몰아낸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게 되고 스스로 하나의 자그마한 ‘혁명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3. 26일까지 시민들은 정권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치권력을 지니게 되어 이른바 ‘민주공동체’ 수준의 사회를 형성한다.
4. 27일 끔찍한 계엄군의 끔찍한 학살, 만행으로 그들은 도청을 함락하고 모든 사건을 덮어버린다.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전부터 여산에 주둔한 제 7공수가 각 대학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와 광주교육대에는 33특전대대가, 조선대와 전남대 의과대학에는 35특전대대가 투입되는 등 광주전남지역 12개 대학에 700여명의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각 대학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도서관 등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전북대에서는 이세종군이 구타로 사망하기도 했다. 일요일인 18일 새벽부터 전남대 정문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교문을 봉쇄하는 공수부대와의 마찰이 일어났다. 오전 10시쯤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상당수의 학생들(휴교령이 내리면 10시에 교문앞에 모이자고 약속되었음)이 전남대 정문앞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문앞 다리에 연좌하여 “비상계엄 해제”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외쳤고, 정문을 지키던 공수부대는 갑자기 “와”소리와 함께 달려나와 최루탄을 쏘며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였다.
학생들은 급작스러운 공격으로일시 해산되었으나 동료학생들이 계엄군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며 연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교문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서 다시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계속했고 이에 대해 교문안으로 철수한 공수부대는 다시 두세차례의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실시한 후 이번에는 첫번째보다 많은 수가 2-3명 1조로 시위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여 쫓기던 학생들이 인근 주택가로 몸을 피할 경우 주택에 난입하면서까지 연행하는가 하면 잡히는 학생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무참하게 구타하여 연행하였다.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금남로로 모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고 신역과 공용터미날, 일부는 광주공원을 거쳐 금남로 도청앞까지 뛰어갔다. 카톨릭센타앞 금남로 거리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 숫자가 3-4백명 정도였으며, “비상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11시경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해산되었다. 골목골목으로 흩어진 학생들은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기습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쯤에는 학생들이 시내중심부를 벗어나 시민들에게 계엄사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에 돌입하였고 군데군데에서 경찰과 학생들과의 충돌이 이어졌다. 오후 3시 30분경에는 각 대학에 주둔중이던 공수부대가 시내로 출동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수창국민학교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곤봉과 대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30분만에 300여명을 연행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금남로 일원에서 몸을 피한 학생 시위대는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공용터미널 광장에 모였다. 일부 학생들은 터미널 대합실 안에 들어가 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남로 일원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폭로하고 있었고, 시위대는 광장에 세워져 있던 자갈을 실은 트럭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어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어 금남로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계엄군들이 공용터미널 상황에 투입되자 경찰병력은 곧바로 철수했다.
공용터미널 부근의 시위대가 해산되고, 일부 시위대가 터미널 안으로 몸을 피하자, 이번에는 터미널 안에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방독면을 착용하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젊게 보이는 사람들마다 닥치는대로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여 끌고 나갔다. 이렇듯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은 당시 터미널 지하실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말과 더불어 광주시내 뿐만이 아니라 전남일원에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시위는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몽둥이와 연탄집게 등으로 공수부대에 대항하였으며, 공수부대는 이날 밤늦도록 가택수색을 계속하며 젊은 사람은 무조건 연행하였다. 한편 전남북계엄분소는 통행금지 시간을 밤 9시로 앞당기고, 계엄사령부는 서울시내에 배치된 11공수를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일부는 수송기로 일부는 열차로 수송하였다.
5월 19일
이날 아침부터 거리거리에는 착검한 공수부대가 배치되었고, 증파된 11특전여단은 금남로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거리에는 살기가 돌았고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러나 어제의 만행이 이 집 저집에 알려지자 분노에 찬 시민들은 오전 11시경부터 금남로 3가 카톨릭센타 앞으로 몰려나와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금남로 일원 7특전여단 35대대 및 11특전여단 병력 투입되어 진압작전이 개시되었으며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착검한 대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열은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일반시민들로 구성되기 시작했으며,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18일보다 가일층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는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 기대어 세워놓고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집중 구타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했으며, 이날 오후부터는 붙잡히면 상하의를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도로상에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자행하기 시작했고 나이든 시민들이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거나 추격을 제지하면 가차없이 진압봉으로 내리쳐 이날 나이든 사상자가 제일 많이 발생하였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공수부대가 교대하러 간사이 시위대는 금남로 카톨릭센타 옥상에 고립되어 있던 몇 명의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도청 저지선에 불붙인 드럼통을 굴리는 등 적극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은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중앙여고생 1,300명은 아침 10시부터 교복에 흰리본을 부착한 채 죽은학생을 위한 추도식을 갖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고, 대동고와 광주일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을 기해 시내 각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고교생들은 이날부터 개별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오후 5시쯤에는 계림동부근에서 위력시위를 전개하던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감시경이 깨지고, 같이 있던
공수부대가 달아나자 다급해진 공수부대 중위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시위대를 향해 정조준 사격을 해 조대부고생 김영찬군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밤늦게까지 유동과 터미날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시민들은 광주역앞에 있는 KBS와 파출소에 투석하고, 임동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유동, 임동 일대는 밤새도록 공수부대의 가택수색이 이어졌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TV 앞에 앉아 광주소식이 어떻게 방영되는가를 지켜보았으나 방송에서는 연속극과 오락프로만 방송되고 있었고, 뉴스에서도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 지구 공군사령관 휴즈중장은 ‘북한의 남침’운운하면서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했다.
5월 20일
5월 20일 새벽에 또다시 광주에 3특전여단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 전남대에 주둔하며,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이 3특전여단 병력은 주로 광주역과 광주시청 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5월 20일 오전은 시내 전역에서 밤을 지새는 시위가 있었던 탓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당시 계엄사에서 최초의 사망자로 공식 발표되었던 시민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됨으로서 상황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남주조장에서 발견된 이 시신은 김안부씨로 얼굴과 가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시민들은 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진출, 시민들에게 공개함으로서 다시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날 오후부터는 계엄군의 착검한 대검과 곤봉에 맞서 각목과 쇠파이프등으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치함으로서 이전의 양상과는 달리 공수부대는 목표를 향한 무조건 돌격식 진압작전의 형태에서 상당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 앞에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형언할 수 없을 지경으로 피곤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는 상황을 목격해 온 시민들이었지만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뭉개진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결사적 대항의지를 갖게 되었고 오후가 되면서 금남로에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리어카에 실은 시신을 앞세우고 금남로에서 시위대열을 형성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흩어졌다가 다시 금남로와 연결된 도로에 수백명 단위로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5월 19일 시외곽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른다는 이유로 택시운전사 4명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구타당한 시신이 시내 운전사들에게 전달되어 5월 20일 공설운동장에 시내 차량들이 집결, 오후 5시경에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차량으로 물리치자는 결의로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택시운전자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시내버스, 대형트럭운전자등도 참여했는데, 이는 18, 19일 양일간에 공수부대가 시내를 운행하던 시내버스를 무조건 세우게 한 후 차내에 있던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끌어내리는 만행을 곳곳에서 자행하여 운전자들이 이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만큼 공분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남로는 일시에 뒤엉킨 차량과 자욱한 최루탄 가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내려앉았으며, 비명과 함성이 뒤섞이고 피가 낭자했다. 금남로 차량시위에서 해산된 시민들은 다시 흩어져 양 옆 도로로 몸을 피했다가 당시 문화방송이 있던 장동지역에 재집결하였다.
당시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던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이 타지역에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는 갈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론에서는 소요의 모든 원인을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계엄군의
잔악한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불행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군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보도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론에 대해 시민들은 격분하였고, 마침내 문화방송이 불태워졌다.
10만여명에 이른 시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공용터미널을 경유, 그 지역에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여 광주역으로 향했다.
광주역 광장에 이른 시위대는 도로가의 가로등과 공중전화 부스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부족한 계엄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청 지역은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의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자정무렵 시위대에 의해 시청과 광주역은 점거위기에 직면했다. 고립된 공수부대는 지원부대와 연결할 방법과 특히 시청과 광주역 병력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의 치열한 대치로 용이하지 않자, 마침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광주역 병력은 발포를 시작했고, 시청에서는 31사로부터 긴급 지원된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며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날 시청 앞에서 발사한 화염방사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최강식씨로 이후 7년여 동안 골수암을 앓다가 사망했다.
광주역과 시청일원의 시위는 공수부대의 발포와 화염방사기의 사용에 의해 해산되고 지역에서 고립되어 있던 3특전여단의 병력은 전남대로 철수했다.
5월 21일
21일 새벽 6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밤을 세운 시위대는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역안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역대합실에서 계엄군이 버리고 간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앞 광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시내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공수부대는 20일을 전후해서 연행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미처 상무대로 이송하지 못하고 전남대에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숙영지였던 전남대로 끌려들어 간 시민들은 잡혀 올 때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공수부대는 이곳 전남대학교에서 다시 들어올 때마다 여기에 구금되어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했다. 구금된 시민들을 세워놓고 대검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구타를 자행했다.
공수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전남대에 구금되어 있던 시민들을 함께 이송했다. 이송은 군용 부식차량에 시민들을 세워서 빽빽하게 태운 후 그 차안에 최루탄을 터트리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채 이동하여 그 차안에 있던 상당수의 시민들이 질식, 또는 화상에 의해 중상을 입었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시민들은 교도소내 창고에 구금된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몽둥이로 맞고 군홧발에 걷어 채이는 등의 구타와 기합, 그리고 끊임없는 조사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계엄당국에서는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얻어 20사단 4개 대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하여 오전 8시쯤 상무대에 도착하였다. 시민들의 저항을 광주진입에 실패한 20사단은 광주외곽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이날 오전에 아시아 자동차로 몰려가 군용트럭과, 버스,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은 사실전파를 위해 시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9시가 넘어서부터는 차량을 이용한 도청공격이 본격화되었고, 차량을 몰고 도청으로 진격하던 시민과 차량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민 모두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에만 몰려 있는 상태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포위하고 있었다. 10시쯤에는 시위현장에서 뽑은 대표 김범태씨와 전옥주씨가 도청안으로 들어가 장형태 전남지사를 만나 협상했다.
이들은 지사에게
1. 유혈사태에 대해 도지사가 공개 사과할 것
2. 연행한 시민.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
3. 입원시켰다는 부상자들의 소재와 신원을 공개할 것
4.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시내에서 모두 철수할 것
5. 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전남도지사는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으며 나머지도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대표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도지사의 무책임한 약속에 시민들은 시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11시 쯤에는 시위대가 10만을 넘어섰다. 약속한 12시가 되어도 계엄군이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도청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다. 군인들과의 거리는 10m밖에 안되었다. 12시 30분쯤 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숙연해졌다. 그러나 애국가 소리가 끝나자마자 콩볶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며 앞에선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에는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시민들은 인근 골목으로 피하였다.
5월 22일~24일
22일 아침이 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들어갔으나 지난 싸움에서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오전 11시경 지역 유지급 인사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서기로 하고, 재야인사들은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여 정부당국에 대한 7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정하였다.
1. 사태수습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 것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4. 사후 보복 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 보상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는 내용을 가지고 수습위원 8명이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군측과 협상하였으나, 계엄군은 불성실하게 협상에 응하면서 ‘무기회수’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22일부터는 지금까지 유인물을 제작하였던 팀이 합하여 ‘투사회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도청에 들어간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모아 ‘학생수습대책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위원장,총무,대변인,무기관리,장례담당,총기회수반,차량통제반,의료반등으로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는 즉각 무기회수에 들어가 2천여 정의 버려진 무기를 도청으로 수집했다. 당시 도청안에는 도청간부와 이들이 내세운 ‘수습대책위’, 재야인사가 중심이 된 ‘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 및 계엄군 정보공작요원 등이 혼재되어 체계가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이에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YMCA로 집결시킨 뒤 모이는 대로 도청으로 들여보냈다. 마침내 25일 저녁에는 무기를 든 많은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2일 광주에 온 박충훈 국무총리는 정작 광주시민들앞에 나서지 못하고 계엄분소에 들러 상황보고만 듣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만 내놓았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일부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저녁 7시 30분 전국적으로 중계된 라디오와 TV방송을 통해 “현재 광주시내에는 군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상태이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5월 25일
오후 5시경 최규하 허수아비 대통령이 상무대를 방문하였다. 상무대에 도착한 최규하는 현지담화를 발표하고, 충정작전 계획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의 합의내용을 토대로 27일 이후에 전교사 사령관인 소준열 소장의 책임하에 충정작전계획을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도청에서는 25일 오후 새롭게 지도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항복요구에 무릎을 꿇고 만다면, 도청에 있는 수습위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지금까지 고귀한 생명들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포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5일 밤 항복과 투쟁의
갈림 길속에서 도청안은 수선스러웠다. 계속적인 투쟁만이 진정한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가두홍보방송을 통해 집결시킨 대학생들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이 조직을 결성하고, 무기회수와 무조건 반납을 주장하던 측은 위협을 느끼며 도청을 빠져나갔다.
이때 도청내에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이 뒷날 통상 ‘항쟁지도부’로 불리게 된다.
새로운 조직 구성과 더불어 계엄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할 것으로 판단하고 투쟁위원회는 시민생활을 정상화시키고 산만하던 무장력을 통일된 지휘체계로 조직화하기로 하였다.
1.시내버스를 정상운행하도록 한다.
2.공무원과 경찰을 비무장으로 근무토록 한다.
3.상가와 시장의 문을 열도록 한다
4. 각 동별로 피해상황을 집계한다.
5.시민들에게 시청의 비축미를 공급한다.
6.가능한대로 언론기관을 가동시킨다.
7.유류사용을 통제한다
8.시외전화를 개통시킨다
9.순찰대를 개편강화하고 기동타격대를 운영한다.
등이었다.
또 무장력 개편을 위해 도청 주변에 산만하게 배치되었던 경계요원을 25일 새로 도청에 들어온 일반 대학생들로 교체했으며, 예비군을 동원하여 외곽경계를 서도록 하고 기동타격대를 편성 운영키로 하였다.
5월 26일
도청 민주투쟁위원회 위원들이 날을 새우며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고 장기전을 준비하는 동안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새벽 5시경 화정동 통합병원에 버티고 서있던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김성룡신부등 일반수습위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이 진입해 오는 농성동 부근으로 ‘죽음의 행진’이라 불린 침묵행진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지휘관과의 협상에서 계엄군은 ‘무조건 총기를 회수하고 반납하라’고 협박하고 수습위원들은 ‘시내질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처리할 것이니 계엄군은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지 말라’고 주장하였으나, 계엄군은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서 계엄군 진입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다시 도청앞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제 4차 민주수호범시민 궐기대회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분노가 가득한 시민들이 분수대에 올라가 계엄군의 잔인성과 시민군과의
협상을 배신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여 진행했다.
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토론과 발표을 했다.
시가행진의 코스와 요령 및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되었으며, 광주 조직폭력배인 오비파와 화신파 두목들도 연단에 나와 민주화 투쟁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특히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 경찰 서장집, 박인천 사장집, 관공서 등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폭력, 방화, 강도를 방지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나누어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석유의 매점매석을 막았다. 광주시민들은 7번의 집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회상을 창조하였다.
25일 궐기대회에서는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도청 옥상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300명 시민이 도청에 남았다. 투쟁위원들은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다. 살아서 증언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
그러나 10명의 고등학생들은 형들과 함께 하겠다며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날 밤 윤상원 대변인은 시민군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오후 2시경에는 정시채 부지사, 구용상 광주시장, 일반 수습위원, 투쟁위원회 간부급 인사들이 참석한 모임이 도청 기획실장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수습위원과 투쟁위원회는 시민생활 정상화를 위한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제출하였고, 도청과 시청의 책임자들도 대체적으로 수락하였다.
그들이 합의한 내용은,
1.매일 도청에 백미 한가마씩 공급한다
2.도청에 부식과 연료를 계속 공급한다
3.장례식 준비를 위해 필요한 관 40여개를 공급한다
4.부상자 수송을 위해 앰블란스를 공급한다
5.상가와 시장을 열어 생필품 공급을 원활하게 한다
6.치안문제는 일반 형사범에 한해 경찰이 책임진다
7.시내버스를 운행토록 한다.
8.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한다.
이러한 내용에 덧붙여 장례식도 5월 29일 도청앞에서-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무기를 반납하자’던 사람들이 다시 도청에 들어왔다. 이들은 “오늘밤 계엄군이 무력진압할 것이니 빨리 빠져나가라”고 이야기하며 돌아다녔다. 시민열기의 쇠퇴를 걱정하던 도청안의 사람들은 ‘미친소리 하지말라’며 그들을 도청밖으로 몰아냈다.
5월 27일
새벽 2시경 계엄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탐지되었다. 도청에 비상명령이 내려졌다. 그동안 실탄없이 경계근무를 서던 경계병들에게 실탄이 지급되고, 기동타격대 병력이 배치되었다. 부지런히 뛰며 병력을 배치하던 중 계엄군은 이미 도청앞까지 와있었다. 공수부대는 도청후문 뒷담을 넘어 숨어들었고 계엄군은 도청을 포위하였다.
시민군은 정면의 계엄군 탱크를 향해 몇차례 응사하였지만 화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늘에는 월남전에서 맹위를 떨치던 캐터필러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도청주위를 맴돌고 “폭도들에게 알린다. 즉각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는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시민군의 화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게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만행을 알려야겠다며 총을 머리위에 치켜들고 흰손수건이나 런닝을 벗어들고 건물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계엄군은 그들마저 M16으로 사살하고 말았다.
YWCA를 지키던 젊은이들도 계엄군의 기습에 대항하였으나 총 몇발 쏘아보지 못한 채 죽거나 다쳤다. 동이 터올 무렵 수십명의 사망자를 내고 총소리는 멎었고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날 확인된 희생자는 26명으로 노동자 12명, 대학생 6명, 고등학생과 재수생 8명이었다.
계엄군은 날이 새면서 도청 등에 남아있던 시민군은 물론 주변의 민가까지 샅샅이 뒤져 젊은이들은 무조건 연행했다. 그들은 연행한 사람들을 건물밖으로 끌어내어 엎드리게 한뒤 포승줄이나 전기줄로 두손을 등뒤로 결박하고 목에 걸기도 했다. 연행된 사람들은 군용버스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계엄군의 총칼이 휩쓸고 간 뒤 도로의 핏자국과 건물의 총탄자국은 지워졌지만 항쟁의 열기와 학살의 진상은 결코 가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5·18묘역에 누워
산자들에게 끝없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그들의 심장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다.
== 광주항쟁 당시 학살만행사례 ==
다음의 글은 가슴아픈 광주학살의 실상을 사례별로 엮은 글입니다.
전남대 구금자와 교도소 내에서의 학살 행위
3공수여단은 교도소로 후퇴하면서 체포한 시위군중을 싣고 왔다. 그 가운데는 부상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체포한 시민들을 간이천막에 넣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체포된 시민들 가운데 강길조씨는 3공수여단의 잔인무도한 행동에 의해서 교도소 내에서 다음과 같은 희생자를 목격하였다. 3공수부대원이 체포되어온 어느 시민군에게 "어디에서 사느냐?"고 물어보니까 그 시민군은 "양동구에 산다"고 하였다. 공수대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양동이면 양동이고 구동이면 구동이지 양동구가 어디 있느냐?"하면서 "이 자식 간첩이다"고 총개머리판으로 몇 사람이 치니까 이 사람이 고통을 못 이겨 혀를 깨물었다. 이를 본 5-6명의 공수부대원은 "이 새끼! 독종이다"하면서 개머리판으로 짓이겨 죽였다. 3공수에 노획된 차량들은 도로를 봉쇄하는 바리케이트로 사용하였다. 20시경 경운기를 타고 이 차량 바리케이트를 지나 집으로 귀가하던 담양거주 주민 4명중 3공수의 무차별 사격을 받고 2명이 즉사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5월 22일 오전에는 진도 거주 김성수씨 일가 3인은 고향으로 귀가하기 위해 차량통행을 애원하다 거절당해 광주방면으로 돌아서는 순간 뒤에서 총격을 가해 총상을 입히는 만행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 만행으로 김성수씨의 처 김춘아씨는 이후 사망하였다. 또 불과 5세의 어린 딸 김내향양은 하반신마비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3공수의 무자비한 만행은 교도소 근처를 접근하는 차량이건 인근 주민들 이건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또한 총격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이 지역을 통과하다 3공수에 잡힌 사람들 역시 무차별 구타를 당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계 엄사령부는 소위 교도소습격사건으로 왜곡하여 공수부대의 만행을 은폐하였다. 그러나 3공수가 노인들이 탄 관광버스에까지 총기를 난사, 수명의 부상자를 냈던 점 만을 보아도 소위 "교도소 습격 사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주남마을(광주 - 화순간 도로 일원)
80년 5월 21일 오후 1시 30분 계엄군은 도청 앞 광장에 모인 20만 군중에게 집단 발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더욱더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5월 21 일 5시경 도청에 주둔하고 있던 제7특전여단 35대대, 11특전여단 63, 62, 61대대는 차례로 도청을 빠져나가 조선대학교에 철수하여 광주공원에서 작전하고 있던 33 대대와 함께 조선대 뒷산, 학동, 지원동을 거쳐 5월 22일 06:00까지 주남마을 뒷산 에 집결하였다.
주남마을 뒷산에 집결한 부대는 대대별로 주둔비 사수방어에 용이한 주변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여 지형적 잇점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광주로부터 화순방향으로 나가는 외곽도로를 차단하였다. 7특전여단과 11특전여단의 주남마을 배치도는 다음 과 같다.
이상과 같이 제7특전여단 33대대, 35대대와 제 11특전여단 61대대, 62대대, 63대대 는 5. 22 - 5. 24 동안 주남마을에 주둔하여 외곽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전부 대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5. 23 07:00경 광주에서 화순방향으로 향하던 미니버스 1대가 도로차단 및 매복지역인 녹동마을 입구에 이르자 도로변 야산과 화약고 건물에 매복해 있던 특전부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미니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미니버스 탑승객 11명 전원이 학살되었으며 인근지역인 월남동, 소태동, 지원동 주민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동일 13시경 동일지점을 통과하던 미니버스 1대에도 무차별 사격을 가해 미니버스 탑승객 중 15명이 학살되었으며 홍금숙 등 3명과 인근지역 주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당한 채 특전부대에게 생포된 홍금숙과 교련복을 입은 학생 청년 3명의 탑승객은 강제로 주남마을 뒷산 특전부대 주둔지로 끌려가 홍금숙만 헬기로 후송되고 2명의 남자부상자들은 특전부대소령의 지시에 의해 현장에서 즉결 사살되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 의해서 입증된다.
당시 7공수 3대대 요원으로 있던 최영신 중사는 심한 부상을 당해 공수부대 주둔지인 주남계곡으로 끌려온 부상자 2명을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소령의 "없애버려"라는 지시에 의하여 3명의 공수부대 부대원이 이들을 대검과 총으로 사살했다고 증언하였다. 주남마을 주민 전홍근, 이상기씨는 5월 23일 오후에 마을입구 당산마을 앞에서 경운기에 실려 마을 뒤 계곡으로 부상자를 옮겨가던 상황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그 날 오후 모 소령이 먹다 남은 술병을 들고 마을로 내려와 마을 주민과 술을 마시면서 "오늘 마음이 괴롭다. 2명의 부상자가 살아날 가망이 없어 사살했다."는 말을 했고 주민 3명이 모 소령의 이 말을 직접 들은 바 있다고 증언하였다. 위에서 밝힌 5. 23 오전 오후 2차례에 걸쳐 계엄군이 주남마을에서 양민을 학살한 예 외에도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례는 허다하고 그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1989년 1월 5일 주남마을 계곡에서 암매장된 시신 2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리 고 1989년 1월 15일 특전부대가 매복작전을 전개, 무차별 양민학살을 전개하였던 녹동마을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 부엉산에서 머리 뒷부분이 손실된 시신 1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송암동(광주 - 목포간 도로 일원)
80년 5월 21일 오후 5시 이후 계엄군이 외곽지역으로 철수할 때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는 광주 - 나주간 도로를 봉쇄하기 위해서 송암동 지역에 매복하고 있었다. 동일 저녁 11시경 나주 방면에서 버스 3대가 오고 있었다. 계엄군은 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제일 먼저 온 버스 2대는 송암동 지역을 통과했고 3번째 온 버스 한 대는 계엄군에 의해 집중사격을 받아 완전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다음 날 주민인 김복동씨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시체9구가 널려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80년 5월 22일 - 5월 24일 기간동안 주남마을에 주둔하면서 외곽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던 7특전여단의 33대대, 35대대와 11특전 여단의 61대
대, 62대대, 63대대는 80년 5월 24일 01:30 전교사로부터 현 주둔지에서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전교사 예비로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받았다. 이에 7특전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동일 08:00주둔지에 설치한 헬기장에 집결 09:10 33대대를 출발로 헬기로 이동하여 16:56 보병학교에 도착해 다시 차량으로 17:15 비행장으로 이동을 완료하였다.
11특전여단은 동일 11:00 전교사에서 출발하여 주답마을 주둔지에 임무 인수를 위 해 도착한 제20사단 61연대에게 임무인계를 완료하고 63대대, 61대대, 7특전여단 치중대, 62대 순으로 군용트럭 56대에 분승하여 주답마을을 출발하였다. 장갑차를 선두로 이동하던 제11특전여단의 63대대는 효덕국민학교 앞 삼거리 지점부근에 모여있던 시민군 5-6명과 10여명의 마을 주민을 발견 캐리버 50기관총 을 난사하며 사격을 하였다.
이동대열 선두에서 총격이 발생하자 일제히 이동중인 제11특전여단은 주변에 보이는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일 12시 30분경 마을 어린이 15명과 원제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당시 전남중 1학견생인 방광범군은 11특전여단이 쏜 총에 즉사하였다. 동일 13시경 진제마을을 지나던 11특전여단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국민학교 4학년생인 전재수군은 계엄군이 쏜 총을 맞아 죽었다.
그리고 11특전여단은 진월도 야산에 있는 칠면조 250마리와 젖소 3마리를 집중사격해 죽었다. 동일 14시경 63대대가 효천역 앞에 이르고 62대대가 효덕국민학교 부근 집으로 피신한 시민군을 수색하기 위해 총격을 계속 가하자 효천역 부근에 서 매복중인 전교사 교도대 병력은 11특전여단의 이동대열을 시민군의 대열로 오인 90mm 무반동총을 비롯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사용하여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집중사격을 받은 11특전여단은 매복지역과 부근지역을 수색 강한 공격을 실시하였다.
14시 50분경 매복 공격부대가 전교사 병력임을 확인한 제11특전여단은 공격을 중지하고 부근 지역을 수색하여 시신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암동에 사는 박연옥 여인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시장을 보러 갔다 오다가 11특전여단이 총을 쏘는 것을 목격하고 하수구에 숨었는데 11특전여단은 박연옥 여인을 찾아내 사살하였다.
이를 지켜본 권근립, 임병철, 김승후씨는 송암동 효천역 부근 마을에 숨었으나 11특전여단이 가택수색을 하여 끌어내 데리고 가다가 마을 어귀에서 M16을 난사해 사살하였다. 또한 11특전여단은 부근 논에서 일하는 주민과 마을 부녀자들을 학살하였다. 11특전여단과 전교사 교도대 병력과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은 장교 1명 사병 7명이 사망하였으며 장교 7명 사병 29명이 부상을 입는 등 광주진압작전 기간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압 공로로 큰 포상을 수여받아 연금을 받고 있다.
== 항쟁의 역사적 의의 ==
1. 지칠 줄 모르는 민주화운동의 에너지
매년 5월이 오면 망월동 5·18묘역에는 전국 경향각지에서 몰려드는 추모와 애도의 인파로 인산인해이다.
광주는 열사들에 대한 애도의 흐느낌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끄러움과 분노로 역사 앞에서 정의롭게 살 것을 다짐하는 민주주의 산 교육장으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로 가는 횃불이자 지칠 줄 모르고 흐르는 강물처럼 민주주의 발전에 정신적 에너지가 되고 있다.
2. 기층민중 중심의 항쟁
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대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일부 종교인들이 나섰다.
그러나, 5·18은 노동자와 하층민들이 주도하면서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한계를 뛰어넘어 민중중심의 운동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항쟁에 불기둥이 된 운수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말로 위대한 드라마였다.
희생자의 직업을 보면 노동자가 72명으로 가장 많고 학생 32명, 상업 13명, 농업 4명, 주부 4명, 기타 39명이다. 그리고 도청 희생자도 26명인데 노동자 12명, 대학생 6명, 고등학생과 재수생이 8명이다.
이처럼 가장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은 노동자와 빈민 등 기층민중들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마침내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일궈냈고 노동자와 민중이 세상의 주인임을 역사앞에 입증하게 되었다.
3. 아름다운 나라, 美國의 가면을 벗기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 은혜로운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5·18을 계기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충격적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미국이 전두환의 학살을 막고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25일 부산에 미국의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도청 궐기대회에서 발표되자 순진한 시민들은 드디어 미국이 군부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온 줄로 알고 함성을 질렀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들만의 순진한 환상이었다는 것을 이틀 뒤에 알았다.
항공모함은 왜 왔을까?
미국은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해 무장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질 경우 주한미군을 직접 동원하려는 생각이었고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믿는 도끼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광주시민들이 죽어가며 깨달은 “이제야 알았다. 우리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이 것은 35년만에 죽음으로 깨달은 ‘피의 교훈’이었다.
2000년 4월 22일 미국에서 “20년 뒤 광주” 라는 5.18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당시 한미연합사의 미군사령관은 특전사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이 병력이 야만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군 이동은 전두환이 결정했고 최규하가 형식적으로 승인했다.”
96년 한국 관련 극비 문서 1,749건을 공개해 미국이 광주학살에 어떻게 개입했는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팀 셔록 기자는 “미국과 광주 - 20년 뒤”라는 논문에서
“미국이 광주항쟁진압 과정을 알고 있었고 87년 민중항쟁 때 전두환 정권의 군대 동원을 막은 점으로 볼 때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아직 5.18 항쟁 관련 중요 문건 20여 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들 자료가 공개되면 미국의 개입 사실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
아마 여기에는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했을 때 직접 미군을 동원하려 했던 22일 백악관 회의 문건도 있을 것이다.
셔록(46) 기자는 9살 때 교회 일을 보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4.19를 직접 목격하고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논문도 한국 경제에 대해서였다.
그는 89년 미 국무부가 한국 국회에 제출한 거짓말투성이 백서를 보고 당시 비밀전문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앞으로 80년대 한미관계를 담은 책을 쓸 생각이란다.
비밀 전문과 그들이 자랑삼아 내뱉은 말에서 그들이 광주학살에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증거가 엄청나게 있는데도 그들은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런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홀보루크의 말은 미국의 정확한 입장이다.
“광주학살에 미국이 한국 장성들과 적극적으로 공모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솔직히 기상천외의 엉뚱한 생각이다.
이러한 공모행위는 우리 미국이 추구해왔던 모든 정치적 가치에 벗어날 뿐 아니라 역겨운 것이다. 전두환이 특전사를 광주에 투입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미국은 그 사태를 중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우리는 특전사에 대한 관할권도 이동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다. 학생데모에 군대를 사용한다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경악했다. 미국은 이 사태의 처음부터 끝까지 뒤에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법적, 외교적, 도덕적 책임도 없다.”
그러나, 셔록 기자가 밝혀낸 비밀전문을 보면 이 말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80년 1월 19일 전문
“12.12 이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전환기에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되어버렸다.”
2) 80년 5월 29일 전두환이 편집국장들에게 한 말
“미국은 12.12,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 5.17 조치 등 모두 사전에 통보 받았다.”
3) 80년 8월 27일 워컴이 AP통신과 회견에서
“10월 사태이후 미국이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 보람도 크다.”
이날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이다.
4) 뉴욕 타임즈
“12.12 때 새로운 장성들이 정승화보다 오히려 온건하다.
역쿠테타를 해서는 안된다고 정승화 직속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5) 80년 5월 8일 전문 : 한국 정부, 특수부대를 이동시키다.
“모든 특전사 부대가 비상 대기중이며 13공수는 5월 6일 이미 서울로 이동했고 7일 11공수도 서울지역으로 이동했다. 11공수는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부대로 이동 직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사태 때문에 원주지역에서 대기상태에 있었다. 서울 외곽에 남아 있는 부대는 7공수 뿐으로 이 부대는 아마 전주와 광주 지역 대학생들의 소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7공수는 5월 18일 새벽 1시에 전대와 조대에 자리잡았다.
6) 5월 7일 전문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미국은 공수부대만이 아니라 귀신 잡는다는 해병대까지 동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죽고 10일 뒤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로키’라는 최고위 비밀 정책팀을 만들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 국무장관, 홀보루크, 국가안보회의 고위 정보 담당자와 글라이스틴 대사만 보도록 되어 있다.
7) 워싱턴 전문
17일 비상계엄확대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글라이스틴이 5월 8일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 전한다. 이에 앞서 7일 다음과 같은 전문을 워싱턴에 보낸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답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미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0일전에 미국은 병력이동을 승인했다.
8) 광주진압 지지한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가. 시간과 장소 : 80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 오후 4시 - 5시 15분
나. 주제 : 한국
다. 참가자 : 머스키 국무장관(사회자), 크리스토퍼 차관, 홀보루크, 리치 한국과장(이상 국무부) / 터너 국장, 홀드리지 중국 및 동아 담당관(이상 중앙정보국) 존스 대장, 베시 대장 푸스테이 중장(이상 합참본부) /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아론(이상 백악관) / 그레그(국가안보회의) / 브라운 장관, 맥기퍼드 국제안보담당관 차관보, 플랫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이상 국방부)
라. 주요 내용
- 20사단 추가투입
- 폭력사태가 광주 외곽으로 번질 양상을 보일 때 국방부 입장
9) 5월 22일 전문
“우리는 미국이 계엄당국과 은밀히 결탁했다는 협의가 두렵고 광주지역에서 반미감정을 부추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처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10) 22일 오후 10시 전문
“광주 폭도 수는 15만 명으로 증가했고 그들은 자동차 수백대와 화기 수천대를 탈취했다. 광주는 완전히 공포의 현장으로 변했다. 한국 정부는 전남지역에 20사단과 공군 그리고 특수부대를 비상 대기시키고 있다.”
11) 80년 5월 26일 전문
“류병헌 합참의장이 워컴 장군에게 계엄군이 27일 자정 광주에 투입될 것이라고 통보해왔다.”
12) 80년 5월 27일 전문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13) 그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82년 7월 23일자 전문에 있었다.
“광주항쟁 2주기인 82년 광주, 전남 지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극에 이르자 정치적으로 폭발성이 강한 이 곳에 잘 훈련되고 80년 당시 진압경험이 있는 11공수를 광주 비행장에 배치했다.”
4. 오월에서 통일로 !
5.18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에게 있어 미국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려준 것과 함께 이 땅의 비극이 중단되기 위해서는 민족의 자주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알려주었다.
26일 제 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5.18 비극의 뿌리는 분단이다.
분단은 군부독재자들에게는 정권유지의 튼튼한 자양분이 되었고, 국민들의 조그마한 저항도 친북 불순세력으로 몰아 민주주의의 요구를 억압했다. 그들은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고정간첩의 선동으로 폭동을 일으킨 폭도로 몰아 세웠다.
분단과 남북대결은 정치군인을 양성하는 재료가 되고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또다시 독재로의 퇴보의 길을 걷지 않으려 한다면 민족의 비극인 분단의 철조망은 걷어내야 하고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져야만 5·18과 같은 비극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오월정신은 민족이 하나 될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
5. 아시아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다.
필리핀,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중국, 스리랑카 등 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5·18민중항쟁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필리핀의 경우 마르쿠스 일인 장기독재를 붕괴시키고 아키노 민간정부를 세우는 민주화 운동의 5·18민중항쟁은 그 표본이 되었고, 중국, 미얀마, 태국 등 5월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또한 광주 5·18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아시아 민주화 운동을 점화시키고 아시아 각 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광주 5·18은 빼놓을 수 없는 교과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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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얼은 부활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정신으로
세계인에게는
인권과 평화 정신으로 온 누리에 타 오르고 있다.
== 5.18 광주민중항쟁 사적지 ==
전남대학교 정문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면서 항쟁의 불씨는 뿌려졌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렸다.
계엄군은 항쟁 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온 시민들을 여기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주검은 학교 안에 매장되었다가 그후 발굴되었다.
당시 정문 앞에는 용봉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감금했던 이학부 건물도 철거되었으며 교문도 모양이 바뀌었다.
광주역광장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시위가 더욱 가열된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은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항의하며 나아가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21일 아침 이곳에서 주검 2구가 발견되었다.
이들 주검이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옮겨지자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명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항쟁은 절정으로 치닫았다.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여기는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전남 일원을 잇는 교통 중심지였다.
5월 19일 오후 이곳에서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계엄군은 대합실과 지하도에까지 난입, 총검을 휘둘러 이곳은 일시에 피비린내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통해 시외로 나간 사람들에 의해 곳곳으로 전파돼 항쟁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은 한때 공수부대 숙영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금남로
이곳 금남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5․18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광주민중
항쟁을 상 징하는 거리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5․18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센터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도 청
이곳 전남도청은 5․18광주민중항쟁 본부가 있던 곳이며,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수많은 시민군이 이곳에서 산화했다.
항쟁 초기 이곳 도청은 군부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를 표출하는 표적이었다. 그것은 "가자, 도청으로!"라는 짧은 구호 속에 잘 응축되어 있다.
계엄이 불법 확대되면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광주시민들의 결사항전에 쫓겨 5월 21일 오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이곳에서는 항쟁지도부가 활동하였고,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수습책을 논의하는 등 시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또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 최후의 결사항전지로, 마지막 항전에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산화하였다.
5․18 민주광장
이곳 5․18민주광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다.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여기 분수대를 연단으로 하여 각종 집회를 열어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이 집회에는 광주시내 고등학생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 끊임없이 민주화 투쟁 결의를 다지는 각종 궐기대회가 열렸던 이곳은 바로 5․18광주민중항쟁 정신을 낳은 산실이다.
항쟁 후에도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산화한 민주 열사들의 영혼이 이곳에 들러 시민들 분향을 받으며 전국민의 투쟁 의지를 일깨웠다.
상무관
이곳 상무관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집단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주검이 이곳에 안치되자 시민들은 다시 한번 계엄군의 행위에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5․18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줄지어 분향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면서 민주화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광주 YMCA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5월 26일에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기위해 자위적 수단으로 시민군에게 총기훈련을 실시했으며, 항쟁 이후에도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 반유신운동의 거점이었다.
광주 YWCA 옛터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YWCA 건물이 있던 자리다.
항쟁 기간인 5월 24일부터 그 건물 안에 있던 신용협동조합 관계자들과 들불야학 청년들은 ‘민주시민회보’를 제작, 광주항쟁 소식을 전국에 전했으며, 민주인사들은 이곳에서 시민의 희생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수시로 가졌다.
이곳은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공략하던 계엄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어, 이곳 최후의 항전에서도 많은 시민군이 희생 되었다.
광주 MBC 옛터
여기에는 5․18광중민중항쟁 당시 광주문화방송국(MBC)이 있었다. 계엄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아 시민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MBC, 다음날 새벽 광주 KBS 건물이 불탔으며 광주세무서 건물에도 불길이 올랐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에 대한 항의요, 응징이었다.
녹두서점 옛터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산실 가운데 한곳인 녹두서점이 있던 자리다.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던 사랑방이었던 이곳은, 5월 17일 밤 전국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되자 청년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격문과 현수막을 제작하는 등 민주화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책을 논의한 항쟁의 산실이다.
항쟁 기간 중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강학들과 노동자들도 이곳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이 발행하던 ‘투사회보’를 제작해 광주시내에 살포,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시시각각 시민들에게 알렸다.
전남대학교 병원
이 병원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하여 의료인의 참모습을 보인, 광주항쟁의 야전병원이었다.
복도에까지 밀려든 부상자, 치명상을 입고 신음하는 중환자들 속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밤낮을 잊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자발적인 시민 헌혈 행렬은 광장에까지 이어졌다.
시민군은 이 병원 옥상에 무기를 갖추고 계엄군과 치열한 저항전을 펴기도 했다.
광주기독병원
이 병원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민주의료 현장이다.
병원에 있던 의료진은 일시에 밀려든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식을 잊었으며,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시민들,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해 민주시민의 뜨거운 열정을 보였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 노소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이 병원은 항쟁 뒤에도 항쟁 부상자들을 가족처럼 치료하고 돌봄으로써 기독교 정신을 빛냈다.
구 광주적십자병원
이 병원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에는 ‘광주적십자병원’으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부상자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을 폈다. 피가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뿐만이 아니라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 뜨거운 시민정신을 발휘했다. 항쟁 후에도 계속 부상자들을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등 적십자 정신을 빛낸 곳이다.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5․18광주민중항쟁 이전부터 이 지역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항쟁 기간에는 시민군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따라서 이 대학에도 계엄군이 즉시 진주했으며,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연행되어 온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체육관, 야전막사 등에 수용되어 계엄군으로부터 잔혹한 폭행을 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배고픈다리 일대
여기 있던 배고픈다리(현 홍림교) 일대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치열하던 5월 21일, 시민군이 시내 중심가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후 모범적으로 지역방위를 했던 곳이다.
조선대학교 뒷산으로 퇴각한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출할 것에 대비, 그날 해질 무렵부터 이 지역 예비군 등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군을 편성하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여 물샐틈 없는 경계를 폈다.
22일 자정 무렵에는 인근 숙실 마을에서 내려오던 계엄군과 30여분간 총격전을 벌려 그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주민들은 밥을 지어 오고 담배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등 시민군과 한 덩어리가 되어 이곳을 지켰다.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인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퇴각, 이곳 주남마을에 주둔하던 계엄군은 광주―화순간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자행하였다.
특히 5월 23일경에는 승객 18명을 실은 미니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승객 가운데 단 1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때 계엄군은 부상을 당한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살해하였으며, 그후 이곳에 묻혀있던 시신은 5․18직후 주민의 신고로 발굴되었다.
광목간 양민 학살지(진월동, 송암동)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인 1980년 5월 24일, 계엄군간의 오인사격 여파로 무고한 양민이 무참히 희생당한 곳이다.
5월 24일 오후 1시경 광주시내에서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퇴각한 계엄군과, 이곳에 잠복해 있던 다른 계엄군 사이에 오인 사격전이 벌어져 계엄군 다수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때 계엄군은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던 이웃 원제.진월부락 주민들에게, 심지어 저수지에서 목욕하던 어린이들에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계엄군은 오인사격 화풀이로 광목간 도로변 주택을 수색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살상하였으며, 항쟁기간 중 이곳을 지나던 민간차량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이곳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농성광장 격전지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5월 22일 광주시내에서 쫓겨온 계엄군이 통제선을 설치하고 농성광장의 시민군 방어선과 대치하면서 인근 주택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이곳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이곳 사선을 넘나들며 상무대에 있던 계엄사를 방문해 중재와 협상을 시도했고, 5월 26일 아침에는 계엄군이 시내로 다시 진입하려 하자 시민수습위원들이 이곳 농성광장에 맨몸으로 누워 저항하는, ‘죽음의 행진’을 했던 현장이다.
상무대 옛터
이곳은 상무대(육군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로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여기에 계엄사령부 전남북계엄분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계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이곳에서 자주 열렸고, 시민수습위원들이 몇 차례 드나들며 군 수뇌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항쟁 뒤에는 시민 3천여명이 붙잡혀와 이곳 헌병대 영창에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으며, 이곳 군사법정에서는 시민들에게 내란죄를 씌워 사형과 무기 등 중형을 선고했다.
그때의 영창과 군사법정 건물은 상무대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인근에 옮겨져 복원되어 있다.
무등경기장 정문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인 5월 21일,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격분한 운전기사들이 모여 항쟁 참가를 선언하고 차량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운전기사들은 대형버스를 앞세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비추며 금남로로 향하였다. 시내버스와 택시 등 100대 이상의 차량이 참가한 이 시위는 실로 장엄한 드라마였으며, 시민들에게 강한 연대의식과 항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 차량시위 정신을 기리기 위해 5월 21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양동시장
이곳 광주 양동시장은 대인시장과 함께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상인들이 시민군들에게 주먹밥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모든 시민이 하나가 되는 대동정신을 앞장서 발휘했던 곳이다.
상인들 모두가 털고 일어나 김밥과 떡, 음료수, 약품 등을 모아 시민군을 지원하고 시민군을 뜨겁게 격려했던 모습은 지금도 시민들 가슴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광주공원광장―시민군 편성지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이 치열하던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자, 자위수단으로 인근 시군지역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술 훈련을 실시했던 곳이다.
시민군은 처음에는 일정한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지도부가 결성되어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광주시내 순찰과 차량 등록 등 일시적으로 치안 관련 업무를 보았다.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해 올 때 이곳에서도 시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5․18 최초발포지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때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곳이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다. 이 발포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극도로 격분하게 되었고, 시위가 한층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교도소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담양, 순천방면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양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계엄군의 이런 행위를 항의하기 위해 달려간 시민에게도 중화기로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이 곳에서도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항쟁기간 중 무고한 시민들이 이 곳 광주교도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 시신은 인근 야산에 매장되었다가 5․18직후 발굴되었다.
국군광주병원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끌려와 강제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광주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시민들은 상무대에 설치 되었던 계엄사령부로 끌려가 갖은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 심문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부상당한 시민들은 이곳 국군광주병원으로 실려와 엄중한 감시 아래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하면서도 계엄사 수사관들이 이곳에까지 파견되어 취조를 해, 시민들은 치료 과정에서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5․18 구묘지
이곳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으로 ‘망월동 묘지’라 불려왔다.
당시 가족과 친지들은 항쟁 와중에서 공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와 이곳에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그 뒤 이곳이 ‘민주성지’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자 군부독재세력들은 묘를 파내게 하는 등 묘지자체를 없애려 획책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자 이곳에 묻혔던 영령들은 치욕의 17년을 뒤로하고 새 묘역으로 이장되어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게 되었다.
여기 구묘역은 당시의 참상을 처절하게 안고 있는 곳인 데다 그 동안 수많은 국내외 참배객들이 수없이 다녀간 곳이므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 항쟁 열사 ==
박금희 (18세-전남여상3)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4남4녀중 막내딸인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인 춘태여상(현 전남여상)에 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교통비가 없어 1시간 이상을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했고 도시락을 가져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박금희는 몸과 마음이 대단히 건강하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하였고 선도부장을 맡을 정도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음악을 좋아하여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낭만적인 성격이기도 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인 그는 시민들의 애틋한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박금희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87년까지 매년 5월 21일이 되면 친구들은 금희가 누워있는 묘지 가까운 산 속에서 경찰들 눈을 피해 숨어서 생일파티를 해주었다고 한다.
박성룡 (18세-조대부고3)
“공수부대는 이 나라 군인이고 국민인데 왜 부모형제 같은 광주시민을 이렇게 무참히 죽이는 것인가”
19일 파출소가 불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21일 저녁에 어머니께서 걱정하고 계실까봐 집에 들어와 토한 울분이었다. 그는 3일 만에 집에 들어와 광주역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고 광주공원에서는 자기 친구가 공수부대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분노를 누르지 못했다.
그는 “광주시민을 이렇게 다 죽이고 있는데 젊은 놈이 어떻게 집에만 있을 수 있겠는냐”며 26일에 다시 집을 나가 27일 도청으로 들어가 27일 새벽 최후항쟁에 참여하여 숨졌다.
그는 ‘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시민을 죽이는가 ?’ 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총을 들고 불의에 맞섰던 것이다. 그는 27일 도청에서 배와 허벅지에 총을 맞고 숨졌다.
박현숙 (17-신의여고3)
신의여고 3학년이던 박현숙양은 21일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 도청으로 들어가 지하실에 안치된 시신을 깨끗하게 닦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여고생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하였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숨지자 광주에서는 관이 동났다.
그래서 21일 화순으로 가는 소형버스에 몸을 실었다가 주남마을에서 공수부대가 쏜 총에 맞아 몸이 벌집이 되어 숨졌다.
양창근 (16세-숭의실고1)
숭의실고 1학년이던 양창근군은 휴교령이 내리는 19일 오후부터 거리를 돌아다녔다.
다칠 것을 염려한 가족들이 ‘꼭 집에만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그는 집에 있는 것조차 죄로 생각되어 시위대열을 따라 다녔다. 공수부대가 물러간 21일이 지나도 양군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가족들은 그를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하고 나중에 망월동에 묻혀 있는 양군의 시신을 찾게 되었다.
김완봉 (15세-무등중3)
무등중학교 3학년인 김완봉군은 부처님 오신날 어머니 송영도씨와 함께 절에 가던 중 구시청 사거리에서 젊은 여자들이 모금된 돈 10만원을 주며 ‘금남로 청년들에게 빵과 우유를 사다 주라’는 부탁을 받고 도청에 갔다 숨졌다.
안종필 (17세-광주상고1)
광주상고 1학년인 안종필군은 18일부터 항쟁에 참여했다. 22일 저녁에 집에 들어오자 가족들이 ‘그러다 개죽음 당하면 너만 손해다’며 참여를 막자 ‘이번 죽음은 절대로 개죽음이 아니다’고 가족들을 설득하며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25일 저녁에 다시 집에 와 “나는 도청에서 지하실에 안치된 시신을 가족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며 “시체를 보면 무섭지 않더냐”는 가족들 말에 “그들의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고 대답했다. 26일 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을 찾아간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한 채 그는 다음날 새벽 짧지만 굵은 삶을 마감했다.
그는 새벽에 친구 대신 신문배달을 해주고 구두닦이 아이들이 있으면 어머니가 하는 식당에 데리고 와 고기를 먹이곤 하였다. 6살 때부터 시작된 신앙생활은 그에게 확고한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비록 나이는 어린 고등학생이었지만 역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도청에서 선배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문재학 (17세-광주상고1)
광주상고 1학년이던 문재학군은 21일부터 시위에 참여하여 27일 도청에서 숨진다. 26일 밤 도청으로 찾아온 부모님에게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었는데, 집에 돌아가 편히 잠잘 수 있겠어요? 도청에 남아 심부름이라도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부모의 간곡한 요구를 뿌리쳤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아 시민군들과 함께 했던 문재학군의 정신은 우리 청소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김종철 (18세-노동자)
집안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한 채 장롱을 만드는 자개공으로 근무하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외삼촌댁으로 가다 손수레에 싣고 도청으로 가던 시신 2구를 본 다음 아버지에게 “더 이상 못 참겠다”며 그 길로 항쟁에 참여했다.
25일 아버지가 도청으로 가서 집에 가자고 할 때 “지금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끝맺어야 될 것 아닙니까”며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이것이 아버지와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맞아 뒷머리가 없는 모습으로 도청에서 숨졌다.
그는 광주민중항쟁에 불을 지른 손수레 시신을 보고 항쟁에 뛰어 들었고 결사항전으로 아름다운 청년의 생을 마친 진짜배기 노동자였다.
전재수 (11세-효덕 초등학교4)
효덕초등학교 4학년이던 재수는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형과 누나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상장 타오는 자식은 재수밖에 없었다. 봄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자 학교는 임시 휴계령이 내려졌다.
24일 재수는 밖에서 놀다 들어와 점심을 먹고 여동생과 장난하며 놀았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애들 노는 소리에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며 야단쳤다. 재수는 마음이 착해 “밖에서 친구들과 놀겠다”며 나갔다. 내가 그때 “조용히 해라는 말만 안했어도 그 놈이 나가서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다.
오후 1시 15분쯤 집에 있던 아버지는 폭죽 터지듯ꡐ따다다다…ꡑ하는 총소리를 듣고ꡐ무슨 일인가ꡑ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시 후 마을 아이가 와서 “재수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하는 청천병력 같은 말을 했다. 바로 밖으로 나갔으나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못 보게 했다. 안보는 것이 속편할거라고 했다. 시신 주위에는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황을 말해 주었다. 아이들이 마을 앞 선산에서 도로로 이어진 비탈길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놀고 있었다. 애들은 느닷없는 총소리를 듣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선산 위쪽에 있던 아이들은 총소리를 듣고 재빨리 숨었는데, 선산 아래에 있던 재수는 선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다가 고무신이 벗겨졌다. 9일전 어머니가 생일선물로 사준 그 신발을 주우려고 돌아선 순간 총탄이 옆구리와 허벅지에 6·7발 날아와 어린 생명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식이 죽고 나서 아버지는 술이라도 먹고 잊어버리려 했지만 엄마는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다가 4년 후, 화병으로 아들 곁으로 가고 말았다.
손옥례 (19세)
손옥례양은 희생자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은 사람이며 가정파괴도 가장 비극적으로 이루어졌다.
21일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손옥례씨는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70센티 박달나무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온 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아랫배에는 수십 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숨졌다.
동생도 공수부대에게 얻어맞은 휴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남동생 손병석씨는 이상현 외과병원에 일반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8일은 일요일이라 평소부터 다니던 은광교회를 가다가 서석병원 앞에서 공수부대원한테 두들겨 맞았다. 그 자리에서 실신한 후 깨어보니 통합병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받기는커녕 계엄분소로 끌려가 왼쪽 허벅지를 대검에 찔려 10센티미터 이상 상처가 났으며 오른쪽 무릎관절을 비롯한 온몸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통 멍들어 있었다.
손병석씨는 풀려나고서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하였다. 현재 간질 비슷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뿐 아니라 군인들만 보면 덤벼들어 싸우려 한다.
아들이 병원에 누어 있는데다 딸마저 끔찍하게 죽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술로 아픔을 달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자주 호소하더니 1981년 9월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딸 때문에 충격으로 사지마비를 일으켰다.
남편이 죽자 가슴앓이가 심해져 1986년 12월에 54세에 딸과 남편 곁으로 갔다.
방광범 (14세-중1)
24일 오전 11시 지원동에 주둔했던 공수부대는 27일 작전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일부는 차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었다. 주민들은 공수부대에게 물을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월동을 지나면서 주택가에 총격을 했다.
12시 40분쯤에 광범이는 10여명 친구들과 원제부락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던 그는 친구들이 “광범아 엎드려”하고 소리치는 순간 총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버지 방두형씨는 머리가 날아가고 없다는 말에 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후에 동네 청년들이 야산에다 아버지도 모르게 묻어줬다.
이틀 후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저수지를 지나서 정신 없이 야산으로 갔다.
야산에서 방광범씨의 묘를 찾으러 돌아다니는데 공수부대가 총을 겨누었다.
아내가 “아들이 죽어 묘 찾으러 왔다, 총 쏘지 마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밥도 못 먹고 술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결국 정신분열증까지 생겨 부인과 이혼하고 말았다. 공수부대는 광범이의 머리와 행복했던 가정을 이렇게 깨뜨리고 말았다.
김부열 (18세-조대부고3)
조대부고 3학년인 그는 19일 학교에 다녀와 “조선대 앞에서 군인들이 여대생을 붙잡아 속옷만 입혀놓고 토끼뜀을 시키더라”는 얘기를 하며 몹시 열을 냈다. 20일부터는 고등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렸고 이때부터 그는 항쟁에 참여했다.
시민군이 된 그는 지원동 야산에서 주택가에 총격을 하고 있던 공수부대를 쫓아가다 죽었다. 그는 주남마을에서 머리와 왼팔이 잘린 채 발견되었다.
전영진 (19세-대동고3)
대동고 3학년이던 전영진군은 5월 18일 참고서를 사기 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공수부대에게 얻어맞고 돌아와 치솟는 울분을 참느라 밥도 먹지 않았다. 21일 그는 도청 옥상에서 정조준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박기현 (16세-동신중3)
동신중학교 3학년이던 박기현군은 책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 가다 공수부대에게 붙잡혔다.
자전거에서 내리게 한 공수부대원은 “너 지금 어디 연락하러 가는 길이냐”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중학생이라고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이 자식이 폭도 연락병이다”며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는 앞머리가 깨지고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어머니는 그 때 충격으로 심장병을 얻었다.
김명숙 (16세-서광여중3)
27일 오후 8시쯤에 친구에게 참고서를 빌리려 가다 전대 앞 천변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숨졌다.
오빠와 언니가 중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여 참고서를 사지 못해 친구에게 빌리러 가다 김명숙양은 희생된 것이다.
함광수(18세-미장공)
80년 5월 22일 함광수군은 오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오후 4시경 갑자기 총성이 들려 옥상으로 올라간 그는 송정리 방향에서 탱크를 앞세운 수백 명의 군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군인들은 도로 양편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전진해 오고 있었다. 군인들의 총구엣 뿜어진 총탄은 주택가에도 날아들었고 도로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쓰러뜨렸다. 이 광경을 옥상에서 구경하다가 함광수는 계엄군의 총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이성자(15세-가정형편으로 미취학)
고아원에서 자라 당시 부모에게 입양되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를 마친 후 포목상을 하는 부모 밑에서 일을 돕던 이성자양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시내 데모를 구경한다며 5월 21일 오후에 집을 나갔다가 동구청 뒤에서 공수부대의 총탄에 가슴을 관통 당해 바로 사망했다.
김춘례(18세-일신방직 여공)
일신방직 여공이었던 김춘례양은 80년 5월 23일이 할아버지 제사여서 고향인 화순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 동료인 고영자양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이미 시외전화까지 끊겨 있고 화순 가는 시외버스도 없어 도청으로 가서 시민군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화순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시민군 9명이 차량 한 대에 두여공을 태우고 화순으로 가는 도중 공수부대의 주둔지인 지원동 주남마을을 1Km 남짓 지났을 때 갑자기 양쪽 산에서 공수부대의 빗발치는 총탄에 김춘례양과 함께 차에 탔던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려 손을 들고 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계속 쏟아지는 총탄에 맞고 숨졌다.
김종연(17세-고입 재수생)
장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김종연군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광주에서 자취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김종연군은 80년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따라 다니거나 구경만 하다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만행을 보고 직접 시위에 참여하여 마지막 27일 새벽 도청에서 사망했다.
80년 5월 30일 아버지는 망월동에서 이미 입관된 아들의 시신을 확인했다. 가슴과 어깨, 좌측 무릎과 골반에 관통상을 당한 아들의 시신은 부패되고 있었다. 관 위에는 도청에서 시위하다가 사망했다고 쓰여져 있었다.
김재형(18세-구두닦이)
광주학살의 참상을 왜곡 보도하는 언론에 대한 응징으로 시민들이 광주 MBC를 불태웠을 때도 김재형군은 함께 행동했다. 그러나 곧 이어 공수부대의 반격이 있자 피하는 과정에서 김재형군은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를 목에 맞고 쓰러졌다. 광주 고등학교 앞길에서 김재형군은 젊은 나이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염행렬(17세-검정고시 수험생)
중학교때 부터 공부를 썩 잘했던 염행렬군은 대학에 갈 수 없는 집안 형편 때문에 아예 포항제철 부설 직업학교에 가야했다. 그러나 남달리 대학에 대한 집념이 강했던 염행렬군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올라와 학원에 다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 후문에서 공수부대의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여 숨졌다.
최미애 (25세-주부)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남편이 부인을 떠나보내며 비석에 피눈물로 새긴 이별가다.
임신 8개월이던 최미애씨는 5월 21일 오후 1시 30분쯤 남편을 기다리다 전남대 정문 쪽 도로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친정 어머니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갔는데 딸이 뇌 속의 골과 피를 길바닥에 쏟아 놓은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딸을 집으로 옮겨 놓고 배를 만져보니 몸은 차가운데 태아는 아직도 살아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이라도 살려보려고 여러 병원에 연락을 했으나 아무도 와주질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딸을 싣고 병원을 찾아다닐 수가 없었는데 20분쯤이 지나자 아이도 엄마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족들이 손수레에 관을 싣고 장례식을 하였다.
최미애씨 아들 진홍이도 벌써 군대에 갈 나이로 자랐다. 최미애씨 어머니는 혼자 된 사위를 자신이 나서 중매결혼을 시켰다. 재혼한 사위는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윤상원 (31. 노동운동가)
윤상원 열사는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리가 강했다.
임곡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 그는 71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 75년 복학했다. 민청세대인 학교선배 김상윤씨와 만남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77년 9월 김상윤씨가 사회과학 서적판매와 광주 운동권 인사들의 모임터인 녹두서점을 열자 이곳에서 운동권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다졌다.
그는 광천동 빈민촌의 셋방에서 남동생과 함께 자취하면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다 7형제의 장남으로 돈 잘 버는 직장을 잡아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기로 마음먹고 78년 1월 서울 봉천동 주택은행에 입사했다. 이 때 은행은 최고 직장이었다.
그는 봉천동 빈민촌에서 살았다. 학생운동을 하는 후배들이 경찰에 쫓기는 몸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는 아버지의 바램 때문에 은행에 들어갔으나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학력을 속이고 광천공단 한남 플라스틱에 들어갔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장래가 보장된 은행을 버리고 생산직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노동자 생활을 하며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노동야학을 이끈다. 들불야학과 박기순씨와 만남은 그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인연이었다. 그는 야학을 통해 성숙한 운동가로 자라났다. 6.29 교육지표 사건으로 강제휴학 당한 뒤 노동운동에 헌신해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씨는 78년 겨울에 연탄가스로 숨진다. 82년 두 사람은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5.18묘역에 함께 누워있다.
이 두사람을 위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 . . . .
그들은 노동자를 위해 정열을 쏟았고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79년에 전민노련과 전학노련 두 조직에 가입하여 이태복씨와 가까운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한국계 미국인이 사장인 YH무역 파업사태에도 관여했다.
그는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민중항쟁을 지휘한 전사였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군인가족이 일러주었다. 그때 도청에는 300여명정도 사람들이 있었는데 윤상원 열사는 여자들과 고등학생들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말을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결사항전을 다짐한 150명은 총을 들고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27일 새벽 무장전사들은 대부분 건물 앞에 배치되었으나 계엄군 특공대는 뒤에서 기습공격을 하였다. 윤상원 열사는 대항하기 위해 복도로 나오다 총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피는 흘리고 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바로 밑에서 시민군 기획부장인 들불야학 동지 김영철씨가 그를 커튼에 싸서 옮기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커튼에 불이 붙어 윤상원 열사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모난데 없이 원만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면서도 원칙을 양보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고 말한다.
김명철 (65세-상업)
김명철 노인은 대문에서 공수부대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얼굴 한 쪽이 완전히 짓뭉개진 아버지 시신을 본 큰아들은 그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박연옥 (51세-농업)
송암동에서 농사를 짓던 박연옥씨는 전남중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걱정이 되어서 24일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가 도로에서 공수부대가 총을 쏘아대자 청년과 함께 광주대 입구 하수구로 몸을 숨겼으나 이를 발견하고 쫓아온 공수부대의 총탄에 아랫배를 맞고 쪼그린 채 하수구에서 숨졌다. 이날 공수부대는 계엄군과 총격전이 벌어져 군인이 죽자 전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송암동 주민들에게 분풀이를 저지른 것이다.
다행히 공수부대에게 발견되지 않아 살아남은 아주머니 증언에 따르면 박연옥씨는 피를 흘리면서 갈증을 느낀 듯 하수구 물을 손으로 마셨다고 한다.
부인을 잃은 남편은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다 2년 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남도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다 마흔 둘에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갔다.
조사천 (35세-건축노동자)
조사천씨는 전남대 후문에서 집을 짓고 있었다.
18일 학생들이 맞는 것을 보고 항쟁에 참여해 21일 도청에서 목에 총을 맞고 눈을 뜬 채 숨졌다.
부인 정동순씨는 화병으로 뱃속에 멍울이 생겨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근무 도중 피를 토하며 쓰러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조사천씨 어머니는 87년 대통령선거 유세가 조선대 운동장에서 있었을 때 김대중씨의 연설을 듣다가 5․18 사진전에 손자가 아들 영정을 안고 있는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3일간 식사 한번 못하시고 숨졌다.
김경철(29세-장애인노동자)
어릴 때 사고와 약물 후유증으로 농아가 된 김경철은 5·18 최초 희생자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공수부대에 붙들린 그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할 수 도 없어 그저 두 손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들겨 패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갔으나 19일 숨졌다.
화려한 작전의 첫 희생자는 불행하게도 장애인 노동자였다.
그는 4살 때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사지가 마비되면서 3개월이나 병원생활을 하였다. 농아학교에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그는 서울에서 구두기술을 착실하게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80년에는 광주에 내려와 국제양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농아처녀와 결혼해 80년 1월에 혜정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5월 18일 그날도 온 가족이 모였다. 첫딸 혜정이 백일을 지낸지 스무날이 된 날이다. 김경철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이 영암에 간다 해서 버스터미널에 배웅을 나간 후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날 오후 금남로 제일극장 들어가는 골목에서 공수부대에게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농아신분증을 보여주고 악쓰며 몸부림치는 경철이를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을 친구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다고 한다.
그는 말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온 몸이 두부처럼 으깨진 것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으면 편히라도 갈 것인데, 온 몸이 터질 때 꺼정 맞아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아 죽다니…….”
어머니 임금단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들이 죽은 후 어린 혜정이를 버려둔 채 부인은 친정으로 가버리고 혜정이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컸다.
민병렬 (32세. 운수노동자)
택시시운전을 하던 그는 20일에도 여느날과 같이 출근했다가 계엄군이 도로를 막아 차량운행이 불가능하자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가족과 마지막이었다.
98년 이영희씨는 뜻하지 않게 민병렬씨의 사망경위를 듣게 되었다.
5․18 부상자 이영희씨가 민병렬씨의 아내임을 알고 같이 구금됐던 그 때 상황을 말해주었다. 80년 5월 21 새벽 광주역에서 시민들의 결사항전에 밀린 공수부대는 전남대로 도망가 잡혀온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공수부대 한 명이 대검을 들고 “이 대검은 월남여자 유방를 40개나 자른 것이다.”며 한 사람을 불러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그리고 민병렬씨 뒤로 돌아가 대검으로 정수리를 찔렀다.
순간 피 분수가 솟았고 골이 나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시체를 두 명의 공수부대원이 끌고 나갔다.
한영길 (31. 노동자)
화천기공사에 다니던 그는 친구가 공수부대에게 죽자 항쟁에 적극 참여한다. 아시아 자동차에서 가지고 나온 군용차량에 타고 항쟁을 하다 21일 도청에서 숨진다.
황호걸 (21. 노동자)
조선말 항일 의병활동을 한 할아버지를 모신 자긍심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황호걸씨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남이 싸우기만 해도 꼭 나서서 말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형의 대학진학을 위해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자격증을 따서 화천기공사에 근무하며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에 다니고 있었다.
21일 도청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항쟁에 참여했다. 며칠 후 그는 총을 들고 집에 들렀다. 가족들은 깜짝 놀라 총을 빼앗아 농 속에다 숨겨뒀다. 22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버지가 ‘총을 돌려주고 오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섰으나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고 말았다. 그는 주남마을에서 김춘례씨가 탄 차에서 함께 숨졌다.
김동수 (23. 대학생)
조선대 공대 3학년에 다니던 그는 불교연합 전남지부장으로 불교운동을 하고 있었다. 18일 오전 목포에 내려가 있던 그는 21일 오후 광주에서 소식을 전하러온 차에 탔다.
4남2녀중 장남이었던 그는 27일 도청에서 결사항전하다 목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고영자 (24. 일신방직 노동자)
고영자씨는 화순에서 태어나 많은 농촌누이들이 그러했듯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을 마치고 일신방직에 다니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집으로 보내며 어렵게 생활하면서 주말에 한번 정도 집으로 와 잠만 자고 가곤 했다.
18일 공장이 문을 닫자 같은 회사 동료이자 동생인 김춘례씨 집에서 5일 동안 함께 있다가 23일 춘례의 할아버지 제삿날에 영자에게 같이 가자고 졸라 집을 나섰다가 김춘례씨와 함께 주남마을에서 사망한다.
어머니는 가슴앓이와 고혈압으로 고생하다 84년에 세상을 떠났다.
83년에 김윤수씨(화순 능주에 있는 누나집에 가다 23일 지원동에서 총에 맞아 사망)와 영혼 결혼식을 시켜 나란히 묻어 주었다.
나홍수 (34. 목수)
월남전에서 군복무를 마친 나홍수씨는 21일 도청에서 숨졌다. 부인 이금자씨는 화병(가슴앓이)으로 87년에 남편 뒤를 따랐고 갑자기 고아가 되버린 3남매는 동생 이경숙씨가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길렀다.
김남석 (20. 학원생)
4남매중 막내인 김남석씨는 평소 의리있고 인정이 많았다.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포기하고 삼촌이 운영하는 인천기술학원에 서 용접을 배우 있었다.
계엄령이 내려 학원이 쉬게 되자 18일 고향에 왔다. 어머니는 시위가 불안하고 언제 끝날지 몰라 아들을 못나가게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21일 집을 나섰다. 22일 새벽에 그는 친구인 백대환과 총을 메고 집에 왔다 못나가게 하자 총을 반납하고 온다면서 나갔는데, 그날이 어머니와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는 주남마을에서 김춘례씨가 탄 버스에서 희생되어 암매장되었을 것이다. 김남석씨는 친구인 백대환, 황호걸씨와 늘 함께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도 주남마을에서 희생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뼈라도 찾기 위해 3년간 돌아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한을 풀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지는 봉분이 없이 행방불명자 자리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앞으로 아르헨티나 유골 감식반과 함께 주남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암매장 발굴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김복만 (29. 운수노동자)
현대교통 시내버스 운전기사인 김복만씨는 18일부터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며 항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광주민중항쟁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20일 저녁 차량시위에 참여하고 21일 도청에서 집단 발포때 숨진다.
그는 3살 먹은 아이와 1개월 된 갓난아이의 아버지였다.
문용동 (28. 대학생)
문용동씨는 목사를 꿈꾸며 호남신학대학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상무대에 있는 상무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으며 야학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8남매 중 여섯째인 문용동씨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착한 성품을 지녔는데, 거리의 부랑아까지 집에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밥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80년에는 개인적으로도 일이 많았다. 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19일 도청에 갔다가 잘 아는 목사가 공수부대에 붙들려 얻어맞자 이를 말리다 자신도 얻어맞고 말았다. 그리고 항쟁에 적극 참여한다.
5월 24일 집에 들어와서 도청에서 지하실에 있는 무기고 관리를 한다고 했다. 5월 26일 문용동씨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형과 형수가 도청으로 찾아갔는데, 완강히 거부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동생친구의 전화를 받고 상무관으로 갔는데, 군인들이 출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반 강제로 밀치고 들어가 한참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동생의 시신이 있었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 부분을 보니 많이 부어 올라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로 말문이 막혀 술로 세월을 보내다 10년 후 돌아가시고 형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었다.
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관속에서 27일로 멈춰진 손목시계와 M16총탄이 나왔다.
목사의 꿈과 달콤한 신혼의 꿈을 뒤로 접은 채 그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목숨을 바쳤다.
임균수 (22. 대학생)
한의사인 할아버지 가업을 잇기 위해 원광대 한의학과 본과 2학년에 다니던 그는 토요일인 17일 집에 내려와 항쟁에 참여했다.
그는 원광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쟁 참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1일 전일빌딩 앞에서 저격병이 쏜 총알이 왼쪽 머리에서부터 턱을 뚫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원광대에는 87년 9월에 그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박병규 (21. 대학생)
2남4녀 가운데 넷째였던 박병규씨는 평소 깔끔한 성격에 학업성적도 우수한 편이어서 부모님이 많은 기대를 하고 계셨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많아, 동생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서울에서 자취하며 동국대학교 1학년에 다니다 5월 19일 저녁 무렵에 광주로 내려왔다. 그 날 저녁 집에서 자고 20일 오전 집을 나가, 27일 사망하기 전까지 두 번 집에 들어와 자기활동과 목격담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시위를 하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어떤 아저씨가 분노하면서 하얀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며 각목을 쥐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 “젊은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겠느냐? 가정이 있고 자식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나서면 안된다”는 말을 동생에게 했다.
박병규씨는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주로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찾으러 나온 가족을 도와주거나 도청 지하와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을 확인하여 가족들에게 안내해주고, 무기를 회수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5월 26일 밤 8시경 집에 여유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까지도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7일 새벽, 어머니는 총소리를 듣고 상무관으로 가서 보니 사망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 관을 열고 시신을 확인했는데, 왼쪽가슴과 오른쪽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슴에 쌓인 울분을 삭히며 살다 84년에 돌아가셨다.
동생 박경순씨는 오빠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안두환 (28. 노동자)
보일러 수리기사인 안두환씨는 전남대 정문에 있는 집에서 공수부대에게 학교로 끌려가 30일 교도소에서 발견되었다.
조일기 (33. 주방장)
27일 새벽 광주공원을 방어하던 그는 총상이 아니라 온 몸을 얻어맞아 머리가 깨진 채 숨졌다. 아마 공수부대에 붙들려 맞아 죽었을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본 아버지는 충격으로 혀와 오른쪽 얼굴이 굳어버렸다.
유영선 (29. 대학생)
전남대 공대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18일 전남대 정문 투쟁부터 27일 도청 결사항전까지 모든 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형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있었는 데 신군부는 유영선씨가 형을 구하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라고 하면서 가족들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통일되는 날 그는 얼굴에 흠뻑 웃음을 머금고 우리를 반길 것이다.
박용준 (25. 사무직 노동자)
고아로 자라 YWCA 신협에 근무하던 박용준씨는 78년에 생긴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함께 활동했던 후배의 이야기로는 학동 영신영아원에서 유아시절을 보내고, 무등 육아원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숭의실고를 졸업하고 YWCA 신협 준 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김영철씨를 만나고 부터 남은 인생을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이웃을 위해 바치겠다며 주민운동에 뛰어 들었다
18일 투쟁이 시작되면서 야학에서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어 광천동과 시내에 뿌렸다. 박용준씨는 글쓰기에 소질이 있어 동료들과 도청 집행부가 준 소식을 정리해 투사회보를 만들었다.
25일 시민 궐기대회때는 사회인 대표로 연설도 하였다. 그러다 26일에는 투사회보 제작을 중단하고 총을 들고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고아로 자란 그는 윤상원, 박관현등 동료들 속에서 진한 애정을 느끼며 민주화운동을 했고 해방광주의 아들이 된 그는 마침내 YWCA에서 생을 마치며 민족의 아들로 영생하고 있다.
류동운 (20. 대학생)
목사인 아버지의 길을 따라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다니던 그는 18일 항쟁에 참여해 붙들려 상무대로 끌려갔다 22일 풀려났다. 그리고 25일 도청으로 들어가 마지막까지 항쟁에 참여하다 생을 마쳤다.
동생 동인군은 광주민중항쟁과 미문화원 점거농성의 진실을 왜곡 보도한 KBS방송국에 화염병을 던져 구속되었다.
이정연 (21. 대학생)
2남3녀 중 장남인 그는 전남대 상업교육학과 2학년에 다니다 18일 정문에서 공수부대의 진인한 공격을 보고 피가 끓어 항쟁에 참여하다 27일 도청에서 숨진다. 어머니는 도청에서 울리는 총성을 들으며 새벽까지 애를 태우며 아들이 죽지만 않길 빌었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빗나가고 말았다.
장재철 (24. 이발사)
의료반에 들어가 차를 운전하며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던 그는 지원동 벽돌공장에 부상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구하러 갔다가 그와 함께 총을 맞아 숨졌다.
김인태 (48. 농업)
해남에서 농사를 짓던 김인태씨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숙비를 주기 위해 19일 광주에 왔다가 농사일이 바빠서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터미널에서 공수부대에게 붙잡힌 그는 전남대로 끌려가 21일 교도소 근처에서 시민군들에게 발견되었다.
김만두 (46. 운전 )
20일 밤 전남대에 다니는 조카를 찾아다니다 광주역 집단발포 때 숨진다.
강복원 (22. 운수노동자)
대한통운 트럭 기사인 그는 21일 오후 6시 광주시민이 다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버스를 운전하며 친구들과 가다 송암동 남선연탄공장 앞 도로에서 총격을 받고 어깨에 총을 맞아 버스가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숨졌다.
형 승원씨는 동생 시신을 보고서 헛소리를 하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83년에 숨졌다. 두 아들을 잃어버린 강씨 집안은 이제 대가 끊기고 말았다.
임정식 (20. 실업자)
22일 집 근처 잿등에서 시민들과 함께 항쟁에 참여한 그는 총탄에 외삼촌이 다리를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달려나가려 하자 어머니를 가로막고 자기가 뛰어나가다 가슴에 총을 맞고 외삼촌 곁에 쓰러졌다.
그는 어머니를 살리고 대신 세상을 떠났다.
김영선 (27. 노동자)
한진공업사에서 일하며 착실하게 살아가던 그는 22일, 밤새 끙끙 앓으시던 어머니가 애처러워 약국이 문을 열기도 전인 아침 6시에 약을 사러 나갔다가 어디서 날아 온지도 모르는 총탄에 숨졌다.
노동 열사
홍기일 (25세)
5.18민중항쟁 때 시민군으로 싸우다 총상을 입었으며, 건축노동자로 일하면서 살아남은 사람의 부끄러움을 승화시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성실하게 살던 그는 85년 8월 15일 도청 앞에서 몸에 불을 붙인 후 "8 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와 자유가 뜨거운 이름으로 5년이 흐른 지금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침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착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광주 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 민주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뭉칩시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에게 "절대 비굴해지지 마세요, 경찰과 타협해서는 안되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오월영령들 곁으로 떠났다.
신호수 (23세)
86년 6월 11일 오후 1시 30분 인천시에 있는 도화가스 충전소에 파견되어 가스통 밸브작업을 하다 서울시경 대공수사과 형사라고 신분을 밝힌 3명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가 8일 뒤에 고향집으로부터 4km 떨어진 전남 여천군 대미산 중턱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방위로 근무할 때 장판 밑에 모아둔 북한의 삐라를 문제삼아 대간첩작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장흥공작"이라고 명명하고 동지를 연행한 것이 국회에 제출된 국정감사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사건 당시 여수경찰서는 가족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형사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변사사건으로 서둘러 처리하고 여천군 돌산읍 평사리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6월 27일 가족에게 알렸다.
장용훈 ( 29세)
현대교통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던 그는 88년 2월28일 자전거와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하여 자비로 합의, 해결하였다. 이 일을 핑계로 3월 5일 회사 과장은 불리한 경위서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자 일방적으로 승무 정지시키고 집단폭행하였다.
원통한 마음으로 검찰과 노동부에 고소와 탄원을 했으나 이들은 합의만을 들먹이며 그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리고 회사는 고소에 대한 보복으로 노사협의회도 거치지 않고 부당해고를 통보하자 88년 5월24일 회사 사무실에서 신나를 끼얹고 "뒤를 잘 부탁한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무시당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 이놈의 세상 비통해서 살 수 없다"고 외치며 숨졌다.
이상남 (30세)
87년 9월 12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현대 중공업 민주노동조합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노동자들에게 발표할 성명서를 복사하려고 노동조합 사무실에 왔다. 이때 정체 불명의 남자 30여명이 노동조합사무실에 무력으로 집단 난입하여 김형권씨를 두들겨 패며 봉고차에 밀어 넣었다. 이 때 사무실에 있던 간부들이 봉고차를 막고 나섯고 휴식 중이던 노동자들도 달려들었다.
그러나 봉고차는 그냥 돌진했으며 이 때 이상남 열사는 차 앞바퀴에 머리와 허벅지가 끼어 끌려가다 중상을 입었고 1년 8개월의 투병생활을 하다 숨졌다.
박진석, 이상모 (20세)
대우조선은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상록회'라는 구사대를 만들어 강제가입을 요구했다.
박진석열사는 반장이 나눠준 가입 신청서를 찢어 버리고, "더이상 노동자끼리 싸움을 부추기지 말라", "회사는 더 이상 노동자를 분열시키지 말라... 회사에서는 임금동결을 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 데 임금동결을 하면 어떤가를 보여주겠다.."며 분신하였고, 투병 중에도 "사용자는 각성해라 나는 죽지 않는다. 승리의 그날까지.."를 외치며 물러섬이 없었지만 89년 6월 숨졌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던 이상모 동지도 이날 밤 10시 40분 기숙사 옥상에서 분신,투신하였다.
최동 (30세)
89년 인천지역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안기부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자신을 자해하는 등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벌이다 수감 중 구치소 의무과에서 준 신경안정제를 먹고나서 발작과 실어증세가 나타났다.
집행유예로 출소되었으나 구치소 수감 중 얻은 병으로 심리적 불안상태가 계속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다 한양대에서 "미제와 적들의 탄압을 고발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여 오후 10시에 숨졌다.
윤용하 (22세)
가난한 집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중국집 배달원을 하다 가방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89년 대학 출신 현장활동가를 만나 서울 민주화직장청년연합의 풍물강습반에 등록해 활동하였다. 동지는 평소에 망월동 참배를 원했으며 91년 5월에 광주로 갔고 10일 '조국의 참된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노태우 정권의 사냥감이 되고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해 이틀 뒤 "노동해방을 위해 분신을 생각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졌다.
재야 열사
김길호 (34세)
광주항쟁 뒤 기독교 농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특히 86년 7월 4일부터 87년까지 무안에서 지속된 '농산물(마늘, 양파) 제값받기 투쟁'에서 선봉대로서 열심히 투쟁에 참가하였다.
87년 12월 20일. 무안에서의 대통령선거 무효투쟁을 할 때 오후 5시 광주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이 논두렁에 처박고 두들겨 팼다.
이 후유증으로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했으나 88년 3월 25일 "나는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김남주 (48세)
80년대 저항시인, 김남주는 고등학교 때 입시중심 교육에 반대하여 자퇴 하고 대학에서도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제적되고, 고향 해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써 등단했다.
79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80년대를 감옥에서 보내면서 우유갑이나, 밑씻개용 휴지 등에 쓴 시들을 묶은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을 통해 민중에게는 각성과 투쟁을 독재자에게는 두려움을 주었다.
88년 12월 석방된 뒤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및 한국민족 예술인 총연합 이사를 맡아 민족문화운동에 힘을 쏟다 감옥생활과 석방 뒤 과로가 겹쳐 췌장암으로 숨졌다.
이정순 (39세)
이정순 열사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면서 예수의 희생정신에 대해 깊이 감화받았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살았다. 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 강경대 동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앞 철교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불덩어리가 되어 투신, 4남매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정상순 (25세)
김철수 열사의 고교 선배인 그는 91년 이어지는 분신에 괴로워하다 후배 김철수가 분신하여 누워있는 전남대 병원에 찾아와 울고 갔다. 5월 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하여 29일 전남대 병원에서 숨졌다.
김양무 (50세)
통일전사 김양무 선생은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 직장암에 걸린 악조건에서도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본부장을 책임지고 조국통일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거족적인 대회로 성사 시켰다.
대회를 마치고 수배 가 내려 졌음에도 명동성당의 차디찬 아스팔트에서 국가보안법 철폐와 조국통일을 위해 74일간의 천막 농성을 진행하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4번의 옥고를 치르고 얻은 직장암치료를 위해 방북신청을 하였으나 정권의 무성의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0년 1월 26일 새벽 1시 5분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양에서 치료 받고 싶다, 백두산 바람만 마셔도 일어선다." 며 통일의지를 불태우다 영롱한 통일의 별로 잠들었다.
학생 열사
기 혁 (20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통혁당 재건사건으로 복역을 하는 일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자라 전남대 의대에 입학 한 그는 아버지가 복역 중이므로 운동을 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말렸으나, 그런 것이 운동을 기피할 이유가 되지 못하고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고, 당시 전남대 의대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단 한 과목이라도 낙제 점수가 나오면 재시험의 기회를 주지 않고 무조건 낙제시키는 부당유급제 반대 투쟁 중 85년 1월초 행방불명되었다가 1월 15일 무등산 바람재에서 얼음덩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재호 (21세)
86년 4월 28일 아침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400명 서울대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하였다.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 열사와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 열사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지도하다 예식장 옆 3층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며 강제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으나 경찰이 무시하자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이 투쟁을 계기로 반미투쟁은 빠르게 확산되어 반미열풍을 불러왔다.
박선영 (21세)
85년 서울교대 수학과 편집부에서 활동하였다. 교대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다른 학교보다도 더 악질적인 교육관료들의 횡포로 인해 학내에 지하 취조실이 있을 정도였고, 동지 또한 문제학생으로 지목을 받았다. 이런 현실에 맞선 그는 자신의 마지막 투쟁을 자결로 표현하였으나, 학교당국은 그의 죽음을 이성관계에 의한 자살로 왜곡하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표정두 (24세)
87년 3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몸에 불을 붙힌 뒤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며 주한미대사관 앞으로 30미터 가량 달리다 쓰러졌다.
그러나 경찰은 고인의 유해를 폭력으로 빼앗아 화장하고 금강에 뿌렸다.
이한열 (21세)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그는 연세대학에 입학하여 광주학살 사진 전시회와 비디오를 보면서 대학생으로서 가야하길을 선택하였다. 86년 2학기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烈'자가 매울 열이라면서 자신과 최루탄은 불과분의 관계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 이름의 끝 글자가 같은 김주열군과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어쩌면 동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9일, '6 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투쟁 속에서 SY-44 직격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마침내 전국적인 민중항쟁을 불러왔다.
성난 민중은 "호헌철페, 독재타도,미국반대"를 외치며 전두환의 계엄령위협에도 물서섬 없이 싸워 마침내 민중이 처음으로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였다. 7월 9일 100만의 민중이 시청에 모여 그를 떠나 보내며 또 다른 승리를 다짐하였다.
그 날은 해방 뒤 김구 선생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모인 커다란 장례식이었다.
박태영 (20세)
박태영 동지는 대학신문 수습기자로 일하면서 87년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12월 9일 "이 땅의 민족 지성인에겐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억눌림도, 갈라짐도, 분노도, 저항도, 시행착오도, 피흘림도, 여기서 끝냅시다. 民主人本" 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분신 직전 학내에서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 정부 수립하자', '제도교육 철폐하고 민주교육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42일간 단독시위를 하였고 6월 항쟁의 성과가 민주세력과 야당분열로 물거품이 되려하자 민족민주세력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조성만 (24세)
서울대 화학과에 다니던 그는 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 투신했다.
당시 명동 천주교회 청년단체 연합회(명청연) 소속 가톨릭 민속연구회장이던 그는'양심수 전원 석방 과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뿌리고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했고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두개골 손상으로 숨졌다.
그의 죽음은 통일운동에 큰 불바람을 놓았다.
최덕수 (20세)
88년 5월 18일 오전11시 그는 "광주항쟁진상규명"을 외치며 시계탑 앞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병원에서도 "광주는 아직도 살아있다", "나는 괜찮으니 돌아가서 투쟁하라"고 동료에게 당부하며 분신 9일만에 숨졌다.
87년 민중의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12월)와 국회의원 선거(88년 4월)를 거치면서 정국은 여소야대로 치달으며 각 당의 당리당략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권의 기회주의와 당리당략적인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고통속에서도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양영진 (21세)
그는 88년 10월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이땅의 올바른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며, 8월15일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지역 선전부 활동을 열심히 하다 88년 10월10일 부산대 재료관 옥상에서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 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외친 뒤 투신하였다.
이철규 (24)
89년 5월 10일 무등산 자락 4수원지에서 눈이 튀어나오고 온몸이 얻어맞아 검붉게 멍든 참혹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조선대 교지인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이 교지에 '북한의 혁명과 건설''미제침략 100년사' 논문을 실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명수배된 조선대생 이철규였다.
5월 3일 행방불명될 때 잠복근무하던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수사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시민들은 제 2의 광주학살이라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항쟁에 나섰다.
열사의 뜻을 이어 조선대 학생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그는 아름다운 반미청년으로 되살아나 해마다 5.18민중항쟁투쟁의 포문을 열고 있다.
이내창 (27세)
중앙대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 열사는 89년 8월 14일 오전에 학교로 찾아온 도연주, 백승희 와 나간 뒤 남해안 거문도 앞바다에서 다음날 변사체로 떠올랐다.
도연주는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임이 밝혀졌고 매우 바쁜 일정에 쫒기던 그가 거문도까지 간 점이나 단순 익사에서는 보기 힘든 7군데의 피하출혈의 흔적으로 보아 유인타살이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신장호 (21세)
90년, 광주 항쟁 10주년을 맞아 노태우 정권은 망월동 묘역 참배 및 항쟁 계승 국민대회, 제4기 전대협 출범식 등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광주로 향하는 시민, 노동자, 학생들을 7천명이나 연행하면서 광주로 통하는 길목을 막았다.
이에, 신장호 열사는 후배들과 함께 이 봉쇄를 뚫고 광주로 들어가려 검문을 피하기 위해 열차에서 뛰어내려 광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열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고, 과다출혈로 인해 안타깝게도 숨지고 말았다.
강경대 (20세)
명지대 새내기인 그는 총학생회장이 연행되자 4월 26일 '학원 자주화 완전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하여 경찰과 대치하다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해 교내로 들어와 진압을 하는 무자비한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뇌출혈로 병원으로 옮기다 숨졌다.
그는 아침에 학교에 오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일찍 돌아오겠습니다.
경대올림" 이라는 글을 가족들에게 남겼다.
박승희 (20세)
전남대 가정대 2학년인 그는 91년 4월 29일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때 분신하였다. 그는 새내기인 강경대가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죽는 것을 보고 괴로워 하다 죽음을 결심하고 주변정리를 하였다.
"노태우 처단, 미국반대"를 외치면서 유서에 "코스모스로 피어나고 싶다며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묻어 달라. 항상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전대병원에서 투병 중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광주에 들어올 때인 5월 19일 아침 10시에 숨졌다.
5월 25일 도청을 가득 메운 10만의 시민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망월동 묘지에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밧승희는 잠들었다. 열사는 가을이면 맑은 하늘과 함께 외세가 없는 나라, 통일조국을 그리며 우리 곁에 나타난다.
김철수 (19세)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 18 기념행사를 하던 중 그는 건물뒤에서 몸에 불을 붙인 채 행사장으로 달려오자 친구들이 옷으로 불을 끄는 동안 서있다가 친구들이 "왜 분신을 했냐?"라고 묻자 그는 "야! 이새끼들아 너희들은 이런 교육 계속 받을래?"라고 외쳤다.
그는 쓰러지지도 않고 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도 "'우리의 소원'을 불러 달라. 선생님 전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22일 간의 투병끝에 6월 1일 "나는 친구 여러분을 믿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문승필 (19세)
그는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경찰서에서 프락치 활동을 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10월 14일 밤 12시 선배를 만나고 행방불명된 그는 11월 2일 단순 열차 사고로 처리되어 시신을 광주보훈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계속 경찰의 협박전화에 시달린 점이나, 현장에서 발견된 유품들이 너무 깨끗한 점, 기차에 치어 죽었는데 시신의 외상이 너무 적고 안경이 왼쪽알만 금이 간 채 별 손상이 없는 점., 유서가 없는 점,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자살할 기미를 전혀 못 느낀 점들로 볼 때 자살이라는 경찰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이경동 (24세)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고민해왔던 그는 내성적이면서도 때로는 누구 못지 않게 활발하게 생활했으며, 자치공간의 청소를 도맡아 할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하였다.
분신하기 일주일 전 그는 이미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동기와 후배들이 갖고 싶어하는 책들을 나누어 주었고, 부모님과 할머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는가 하면 5일 일요일 오전에는 망월동에 참배를 다녀왔다.
오후에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할머님께 선물을 드리고, 6일 아침 일찍 광주에 올라와서 동기와 후배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7일 저녁에는 10여명의 동기들에게 안부전화와 더불어 열심히 생활해 나가라며 격려하였다.
8일 12시 45분 음악관 뒷편에서 "임용고시철폐, 주한미군 철수와 기만적인 김영삼 정권을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한상용 (23세)
그는 우리들의 삶은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려 노력했다. 참된 삶과 주인된 삶을 늘 고민하며 참교육을 갈망하는 예비교사로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초등교육을 바로 잡기 위해 앞장서 투쟁했다.
93년 11월10일 10시에 분신하여 전대병원에서 숨졌다.
노수석 (20세)
그는 96년 3월 29일 종로 5가에서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결의대회'에 참가하다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 5가 인쇄골목에 있는 대현문화사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었다.
이날 시위는 초반부터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다녔다. 특히 대열 안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두들겨 패고, 3백 52명이 연행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노수석 열사도 폭력진압을 피하다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에서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류재을 (20세)
97년 3월 20일 오후 2시에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개강선포식에 참가한 그는 전경과 대치 중 사수대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후배에게 넘기고 맨 앞에서 투석전을 하다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물러서다 쓰러졌다. 곧 조대병원으로 옮겼으나 3시에 숨졌다.
한총련 학생들은 2달여 동안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투쟁을 벌였고 그는 망월동에 잠들었다.
김준배 (27세)
광주대 재학시절인 93년부터 수배생활을 하며 97년 한총련 투쟁국장을 맡고 있다 경찰의 과잉검거 작전으로 9월 15일 밤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졌다.
15일 밤 11시 50분 그를 연행하려고 형사 24여명이 들이닥치자 13층 높이에서 케이블선을 타고 탈출하다 떨어져 다음날 새벽 숨졌다. 이날은 보름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던 추석날이었다.
그의 죽음은 96년부터 계속된 한총련 죽이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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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요
美 통상전문지인 「저널 오브 코머스」의 톱셔록 기자는 미국 정보공개법에 의해 입수한 80.5.8 美국무부 비밀문서 전문을 통해 미국이 광주에 직접 軍개입을 검토한 사실 등을 밝혔다. 이 비밀문서는 89년 미국이 한국국회에 보낸 美「광주백서」 내용과 정면 배치되고 있으며, 그동안 추론과 풍문으로만 떠돌던 미국의 5.18개입여부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주요 내용은
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계획을 카터 행정부가 승인한 것과
② 80.5.22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군을 더 투입할 것을 승인한 것
③ 상황이 악화될 경우 미국이 직접 간여하는 계획을 백악관 모임에서 협의한 것 등이다.
이에 대해 위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美 대사는 "과장 해석일뿐"이라고 일축하고 있으나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고 있다.
광주 진압을 지시한 미국의 주역들과 회의록
■ 79년 10․26사태가 터진직후 당시 카터 美 대통령은 한국사태를 추적하기 위해 극비의 비상대책반을 운영
- '노디스'란 이름의 극비전문(암호명은 '체로키')에 비상대책회의 내용이 기록됨
- 카터 대통령과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차관, 리처드 홀브루크 동아태담당 차관보, 국가안보회의 고위담당자 등 극소수 주요인사가 주도
■ 광주진압을 지시한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 시간-장소 : 80.5.22 백악관 상황실(오후 4시~5시15분)
○ 주제 : 한국
○ 참가자 : 에드먼드머스키 국무장관(사회자), 워런 크리스토퍼 차관, 리처드 홀브루크 동․아태 담당차관보, 로버트리치 한국과장(이상 국무부), 스탠즈필즈 터너 국장, 존 홀드리지 중국 및 동아담당 (이상중앙정보국), 데이비드 존스 대장, 존 베시 대장, 존 푸스 테이 중장(이상 합참본부), 쥬비그뉴 브렌진스키 안보보좌관, 데이비드 아론(이상 백악관), 도널드 그레그(국가안보회의), 해럴드 브라운 장관, 데이비드 맥기퍼드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닉플랫 국제 안보담당 부차관보(이상 국방부)
○ 토론내용
- 한국의 우선적 과제는 한국당국이 훗날 큰 불안정을 배태할 씨를 뿌리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소한의 병력을 이용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대체적인 의견을 모음
- 안보보좌관인 브렌진스키 박사는 '한국 정부에 대해 단기적으로 지지를 보내되 장기적으로 정치적 진전을 이룩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할것'이라는 말로 대책을 요약
○ 각 항에 대한 의사 결정 내용
각 항의 주제
논의된 내용
공개성명
- 5.22 미국의 광주진압 관련 성명이 현 시점에서 충분하다는 데 의견일치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
- 지금까지 미국이 취해온 태도 이상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데 의견 일치
- 미국은 자제를 촉구했으나 질서회복에 필요하다면 병력사용을 배제치 않음
미국당국의 추가 조처
- 현 시점에서 필요치 않다는데 의견일치
광주에 질서가 회복된 뒤
후속 조치
- 미국의 대책은 광주상황이 어떤식으로 해결되느냐에 달려있음
- 만일 인명 손실없이 사태가 원만히 해결될 경우 미국은 한국에 정치적 진전을 가속화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음
- 그러나 광주사태가 많은 인명손실을 가져온 채 수습된다면 다시 정책검토위원 회를 소집해 추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함
광주사태 이후 미국의 목표
- 머스키 국무장관은 한국에 미국이 바라는 목표가 무엇이며, 장기적인 목표를 성 취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
- 글라이스틴 대사를 현 시점에서 본국으로 소환해서는 안되며, 또한 워싱턴에서 도 굳이 특사를 파견할 필요가 없다는 데 의견일치를 봄
「코머스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새로운 사실들
■ 美, 글라이스틴을 통해 신군부의 비상계획을 승인
○ 글라이스틴 대사가 전두환씨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고위 비서진과 중대한 회동을 하기 바로 전날인 80.5.7 워싱턴에 보낸 비밀 전문내용
「우리는 대화하면서 어느 구석에서도 법질서 회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한국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경찰력을 강화하려는 비상계획을 미국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 전씨의 비상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보증은 80.5.8 글라이스틴 대사에 의해 통고됨
- 크리스토퍼 국무차관과 홀브루크 차관보가 사전 승인
「우리(미국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정부의 비상 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되다는 데 동의한다」
■ 카터 행정부 80.5.22 광주를 (한국정부가) 재장악할 수 있도록 병력 추가 이동 승인
○ 5.27 위컴, 20사단의 광주 추가투입을 승인
- 백악관 회의에서 미국이 직접 무력개입하는 방안 논의
- 비상계획에 공수부대 투입이 포함돼있음을 사전에 미국이 알고 있었다고 보도
「5월17일 조처가 우리(미국)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강력한 조처가 필요했다는 데 동의했다」 (5.23 글라이스틴이 박중훈 국무총리 권한대행에게 미국입장 전달)
○ 체로키 전문에 따르면, 한국군부는 이미 군사행동을 美에 승인 받았던 것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남
「만약 그 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평화적인 방법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한국정부는 전남지역에 제20 보병사단, 공군, 그리고 특수부대를 비상 대기시키고 있다」 (체로키 전문 마지막 부분)
※ 이러한 미군의 지원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공개되기를 원치않음
「우리는 우리(미국)가 계엄당국과 은밀히 결탁했다는 혐의가 두렵고 광주지역에서 반미감정을 부추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처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 카터 정부, 전두환의 '12․12 야욕' 간과
○ 카터 행정부는 12․12쿠데타가 주한미군의 작전통제권을 무시했다는데 화를 냈지만, 곧바로 추후 승인
「12․12에 대한 한국측 설명에 맞서지는 말되,또다시 사령관이 바뀌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라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문제삼지 않겠다」 (홀브루크)
○ 80년 4월까지 전씨가 군권을 접수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지속적인 징후가 있었음에도 카터 행정부는 한국내 상황에 만족
「당시 미국 행정부내 일반적인 느낌을 기억한다. 미국은 서울에서 소동이 일자 매우 불안하게 생각했다. 전씨는 대단히 거친 사람이다. 그런데 시위대를 온건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안도했던 것이다」 (그레그)
■ 주한 미국대사, 광주문제 중재 요청 거절
○ 글라이스틴은 광주현장에 있었던 한 미국기자로부터 광주문제를 중재하라는 막바지 요청을 받았을 때, 20사단은 이미 작전을 개시한 뒤였다고 밝힘
「나는 그것이 논쟁할 여지가 있는 결정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느냐? 천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89 美백서와 코머스지」의 보도내용 비교
'89 美 「광주백서」
저널오브코머스 보도
12․12사태
- 12.13 글라이스틴 주한美대사는 최규하 정부가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 도달
- 12.14 글라이스틴은 전두환 소장과 만나 한국육군의 분열은 북한침공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
-美 관리들은 전두환의 쿠데타에 대해 불쾌하게 여김
-'이란 위기'와 같은 혼란이 오게 될 것을 우려,신군부측에 미국과의 자유화에 대한 약속을 반드시 이행할 것을 다짐받고 추후 승인
시위진압 비상계획
美관리들은 학생시위를 다루는데 있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군부대를 사용하려는 계획에 경악을 금치 못함
美 관리들은 전두환의 비상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음
특전사 투입
美는 특전사 부대에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그부대들이 광주로 이동한데 대해 알지 못함. 특전사 부대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음
한국군 특전사의 7여단이 광주지역의 대학들에서의 소요에 대비하고 있음.이들은 최루탄을 사용토록 훈련되어 있음(DIA보고서)
글라이스틴- 전두환의
만남에서 글라이스틴의 발언
한국의 진정한 안정은 정치적 자유화를 향한 질서있는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
미국은 한국군의 비상 계획의 발전을 막지 않을 것으로 보고
백악관회의
5.22회의는 광주에서 광범한 혼란의 씨를 뿌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화와 최소한도의 무력사용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도록 한국정부에 조언
카터행정부는 도시재탈환을 위해 군대의 추가사용을 승인했으며, 전씨측이 장기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 동의한다면 단기적 지지를 제공한다는 데 동의. 만약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경우 미군의 직접개입에 관해 토의
20사단투입
5.16 한국 군당국은 연합관계관들에게 한국군 제20사단 포병대와 제 60연대를 연합사 작전 통제권으로부터 철수시키겠다고 통고
5.20에 이르러 美관리들은 한국군 당국이 광주에 20사단 부대들을 투입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마지못해 받아 들임
글라이스틴은 한국 외무장관에게 미군은 광주지역에서의 질서를 회복하고,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상황발생을 막으려는 한국군의 노력을 돕게다고 함/ 이어 이런내용이 바깥에 공개되기를 꺼려한다고 말함. 한국군은 5.27 위컴에게 허가를 얻어 20사단을 광주에 보냄
당시 미국의 상황
○ 한국에 위기상황이 벌어진 80년은 미국이 이란 인질 사건에 휩쓸려 있었고 소련과의 긴장이 심해지던 해
「우리는 또 다른 이란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
○ 79년 가을에 터진 정치적 혼란과 그해 10월 박대통령 피살은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이 제3의 위기지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심어줌
- 미국으로서는 한반도가 또다른 위기지역으로 돠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한반도를 또 다른 위기지역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전두환 집권 기간의 중요한 정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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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묻는 5․18 시민법정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2002년 5월 19일 06:31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80년 5월 27일 새벽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이 역사를 향해 남긴 마지막 말이다.
22년이 지난 지금, 광주학살 진짜 주범을 밝히는 5․18 시민법정이 18일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5.18 시민법정 재판장 최병모, 검사 심재환 외 2명, 변호사 장경욱, 권정호, 배심원 단장 문정현 외 20명으로 구성됐다.
오늘 법정은 신군부와 광주학살을 공모 지원한 미국정부와 군의 고위책임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광주학살 당시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 연합사령관,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 머스키 미 국무장관, 홀부르크 미국무성 아태담당차관보, 또 책임자로서 카터 미국 대통령. 이들은 80년 당시 광주학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집단살인죄, 인도에 반한 죄, 피고인으로 제소됐다. 이에 5․18 시민법정 추진위원은 주한미대사관에 기소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심재환 검사는 이들의 범죄를 기소하기 시작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신군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 진압하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파괴할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했다. 이에 학생들은 '비상계엄 철회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군은 학생들을 총과 칼로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광주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광주시민들도 사살했다.
이를 전후하여 미국은 한미연합사 통제하의 한국군 해병 제1사단, 보병 20, 26, 30, 33, 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대한민국 육국참모총장에게 이양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내정을 직접적으로 간섭했다. 미국은 또한 항공모함과 조기경보기를 파견, 5.27 도청진압작전을 신군부와 공모했다.
신군부를 지지함으로써 미 공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국민주권의 원리를 유린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파괴했다. 이에 헌장 제2조 제4항에 정한 내정간섭행위, 헌장 제3조 제2항 제1호에 의하여 불법행위 책임이 있다." 이에 반해 피고 미국을 변호한 변호인 측은 "미국과 광주학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12,12, 5.18 등의 일은 미국과는 무관한 일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광주학살 피해자 홍금숙, 홍란, 이광정, 김효석, 최정기씨가 증인으로 나섰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홍금숙씨는 광주 시내에서 오빠를 찾고 주남마을로 들어가던 중 공수부대에 무차별적인 사격을 당하고 유일하게 생존한 피해자이다.
홍금숙씨의 몸에는 그때 당시의 총사격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증인 홍란은 32세 나이로 80년 5월 27일 7살짜리 아들을 찾던 중 공수부대를 만나 총을 맞고 아직도 5월이 되면 그 후유증으로 심한 고통을 호소한다고. 광주학살 당시 광주에 머물렀던 알로 파트는 "광주사태가 일어났으니 주한미군은 24시간 대기하라", "광주 폭도들의 행동을 하루빨리 진압해야 한다"며 진압교육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검사측의 최후 논문이 시작됐다. "광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학생들, 남편을 마중나왔다 죽은 임신 8개월의 임산부, 총소리에 놀라 피하던 중 고무신이 벗겨져 다시 싣던 중 죽은 중학교 1학년...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습니다. 이에 광주의 어머
니들은 기뻐도 기쁘지 않고 먹어도 맛이 나지 않고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주학살의 주범이 미국이라는 것은 이제 너무나도 확실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분단된 우리민족을 하나로 묶는데 민중들의 의지를 높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본질을 밝히는 첫걸음을 80년 광주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한국현대사를 바로 세우는 첫 시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변호인측은 "지금까지 검사측의 발언 내용은 잘못된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미국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남한에 막대한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은 최대한 남한을 도와주려 했을 뿐입니다. 거짓으로 일관되는 말들이 많습니다. 미국과 대한민국은 동맹관계임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배심원의 최후 판결만이 남은체 법정은 끝났다. "80년 당시 미국대통령 피고인 제임스 얼 카터 외 7명의 피곤인 유죄판결" 배심원 단장 문정현 신부는 "만장일치로 피고인들을 유죄 판결했다. 미국은 광주학살에 대한 사죄와 피해자 유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야 한다. 이후 피고인을 미국에 공개 제소할 것이다."고 말했다. 시민법정을 지켜본 연세대 한 학생은 "시민법정으로 미국의 광주학살 진상이 밝혀졌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5월 정신을 계승해야 겠다."며 "피고인들을 다시 제소하는 법정이 열린다면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시민법정은 끝이 났다. 그리고 시민의 힘과 지혜로 미국은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했다. 이제 다시 시작의 마음으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더 이상 미국이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간섭할 수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 한목소리 '미국은 유죄'
5․18 시민법정 지상중계
전남대 이국현 기자 2002년 5월 19일 17:26
광주 항쟁 미국 직접개입 증거 공개 이뤄져
내란목적 살인죄,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등 유죄
지난 18일 2시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5․18시민법정(수석판사 최병모, 판사 오종렬․김윤자)이 도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날 법정은 미국의 광주 학살 관여 증거와 증인을 일일이 제시한 검사단과 참석하지 않는 피고인측 이익 보장을 위해 선임된 변호인단 사이의 상반되는 사실주장과 법리적 공방으로 이뤄졌다. 더불어 이번 법정에서는 엘렌 발드레드의 "당시 주한미군은 높은 수준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다"는 증언에 따라 사태가 심각해지면 미국이 직접 개입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법정이기도 했다.
법정 구성
재판장 : 최병모, 오종렬, 김윤자
검 사 : 심재환, 김승교, 손미희
변호사 : 장경욱, 권정호
서 기 : 이정희, 전김명훈
배심원 : 단장 문정현 신부 외 20명
피 고 : 제임스 얼 카터(당시 미국대통령), 윌리엄 글라이스틴(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아담스 위컴(당시 주한미군사령관), 헤럴드 브라운(당시 미 국방장관), 스탠스필드 터너(당시 미 대통련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위렌 크리스토퍼(당시 미국무부 차관), 리처드 홀부르크(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기소 - 광주 유혈사태 미국 관여
이날 심재환 검사는 미국과 당시 미대통령 제임스 얼 카터, 주한미국대하 윌리엄 글라이스틴, 한미연합사령관 존 아담스 위컴 등 5명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기소했다.
"광주 유혈사태에 대해 관여한바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80년 학살의 배후인 미국을 법정에 기소함으로써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주권을 세워 민족 앞날을 우리 힘으로 여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또 피고인들은 광주학살 직후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시민이 희생당하고 날이 갈수록 신군부의 진압이 더욱 대규모로 잔혹하게 진행되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상황에서 병력을 추가투입시켜 광주시민의 희생이 더 증가시켰다. 또 이들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하여 군대를 동원한 폭력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에 만행이 확산되던 5.20에 이미 4일전 수도권 질서유지 명분으로 한국측 작전통제권을 이양한 보병 20사단을 광주에 추가 투입하도록 승인하였다"
△피고인 변론 - "북침 우려, 한미상호방위조약 충실 시행"
이에 장경욱 변호인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해 우리도 적절한 통보 없이 군사를 사용한 데 대해 불만이다. 한미연합사작전에서 통제권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해서는 여러 번 항의를 하기도 했다. 또 12․12 군사반란 이후 남한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북측이 이를 남한 공격의 기회로 삼고 민주화의 전망을 저해할 것을 우려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충실히 시행한 것 뿐이다. 더불어 5월 당시 광주에 투입된 어떤 군대도 미군의 지휘아래 없었고, 한미연합사와도 상관이 없었다. 또 자국군의 군대 이동의 경우 상대방의 동의없이 이동이 가능하다"고 미국측의 입장을 대변했다.
△증거 - "계엄군과 미국 결탁 입증 공문서 공개"
검사단은 미국의 광주 학살 관여를 보여주는 증거로 얼마 전 미국에서 발견된 공문서 일부와 언론보도 자료를 제출했다. 이 중 '5월 22일 국무부에서 보낸 문서'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공개하지 않았고, 공개할 의사도 없었다. 계엄당국과 은근히 결탁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광주지역에서 반미 감정의 확산을 우려한다"고 제시되어있다.
△피고측 증거 제시 - "당시 주한미국대사 위컴의 회고록 제시"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의혹은 의혹일 뿐 은폐할 의도는 없다"며 글라이스트 주한미국대사의 회고록과 80년 당시 위컴의 회고록을 증거로 제시했다. 변호인단에 따르면 회고록 중 "작전 지휘권 관련 이같은 검사던의 발언에 공수부대는 작전 지휘권 내에 있지 않았다. 물론 통보는 해주었지만 이동사실만 밝히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미국은 단지 폭동 진압을 위한 훈련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라는 부분에서 '미국의 개입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반박했다.
다음으로 홍금숙, 홍난, 이광영, 김효석, 최정기 씨의 증언과 박순원 박사, 당시 주한미군에 근무한 엘렌 발드레드 의 영상증언이 이어졌다.
△증언1 - 홍금숙 "주남마을 근처, 계엄군 공격에 혼자 살아남아"
"1980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나는 시민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오빠를 찾으려고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혼자 시민군 차량에 탑승하게 됐다. 차 안에는 나를 포함해 18명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화순군 주남마을 근처에 가서 계엄군이 나타났다. 이들은 차를 멈추게 하고 손을 들고 창가로 가도록 말했다. 그리고는 무차별 총격으로 15명을 죽였다. 세명이 살아남아 산으로 끌려갔는데 대학생 두 명은 사살되고 고등학생인 나만 혼자 살아남았다. 그 이후 3개월간 밤에는 광산 경찰서에 유치되어 있고, 밤에는 상무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감금되어 있었다. 면회도 안됐다. 그 당시 후유증으로 여름이면 팔에 흉터가 있어 파스를 붙이고 다니는 등 정신적인 피해를 많이 입었고, 보상을 받긴 했지만 모두 병원비로 쓴 상태다"
△증언2 - 이광석 "적십자 대원 활동 중 척추 총맞고 하반신 불수"
"고등학교 졸업 후 출가해 승려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검으로 사람들을 찌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적십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부상당한 환자를 기독병원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구시청 사거리에 부상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잠복해 있는 공수부대원들 때문에 적십자대원들이 접근을 못하고 있었고, 난 과감히 2명의 대원과 적십자 옷을 입고 그곳으로 갔다. 아무일이 없자 3명의 대원이 더 뛰어왔다. 부상자를 옮겨 차로 실으려는 순간 총소리가 들리고 나도 척추를 맞았다. 적십자 대원은 4명이 죽었다. 난 그 이후로 하반신 불수가 되서 22년간 마약을 맞고 하루에 4번, 한번에 20알이나 되는 약을 먹고 있다"
△증언3 - 엘렌 발드레드 "당시 주한미군은 높은 수준 비상 경계령"
그 밖에도 광주항쟁을 연구한 정해구 씨와 브루스 커밍스의 영산증언도 이어졌다,
이 날 제출된 영상 증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엘렌 발드레드의 증언이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오산에서 근무했는데, 5․18 광주 항쟁 당시 주한미군은 비상경계 태세였다. 이것은 주한미군의 입장에서 상당히 높은 차원의 비상근무로 일상 업무를 금지하고, 전화통화를 금지할 정도였다. 24시간 대기상태였고, 폭도들의 진압방식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광주의 경우를 '폭동'이라 했고, 광주 사람들을 '폭도'라 표현했다. 이 비상경계태세는 2,3일간 지속됐다"
이에 심재환 검사는 "이것은 실질적으로 미국이 최악의 경우 직접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여주는 증언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밝혔다.
△논고 - "내란목적살인조,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선고해야"
마지막으로 검사의 논고가 이어졌다.
심재환 검사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인정하고 한국군을 동원해 학살을 저지른 실질적인 책임자는 미국이다. 미국이 연출자가 되어 저지른 광주학살을 세계 앞에 밝히는 바이며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은 미국에게 사죄르 권고한다. 미국은 12․12 이후 기존 군사독재 체제에 민권정부의 외양을 입혀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하려고 했다. 또 미국이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에게 요청해 24단의 투입을 승인받고, 21일 새벽 집단 발포했다는 점을 시인해야 한다. 이에 미국 및 당시 미국인 8명에 대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론 - "악의와 왜곡에 찬 뒤짚어 씌우기"
이에 피고측 변호인단에서는 "검사측의 논고는 악의와 왜곡에 찬 뒤짚어 씌우기이다. 모든 책임을 미국에 물으려는 모략일 뿐이다. 국제 질서를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비착취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제국주의적이고 좌경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질타하면 안된다. 배심원들의 판단 착오가 없었으며한다"고 밝혔다.
△배심원 평결 - "만장일치, 미국 유죄 선언"
법정은 배심원들의 평결을 하는 동안 휴정됐다가 다시 속개했다.
배심원 단장 문정현 신부는 "21명의 배심원들이 제시된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한 후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다"며 "이번 법정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발 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권고 조치와 미국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한다. 또 비공개 자료의 공개와 유엔사법인권위원회에 피고인 제소를 공고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최병모 판사는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5․18 시민법정에서 미국이 유죄 판결을 내린다. 또 피고인들에게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에 관하여 모두 유죄임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판결문 요약>
■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5․18 시민법정 판결문
1. 피고인들은 기소된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에 관하여 모두 유죄이다.
2. 이 법정은 피고인들에 대하여, 이 판결에서 유죄로 인정된 사실에 관하여, 피해자들 및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공개적으로 사죄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3. 이 법정은 미국에 대하여
△미국이 행한 행위에 관해 대한민국 국민과 피해자들에게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공개적으로 사과 할 것
△이 판결에서 유죄로 인정된 사실에 관해 피해자들에게 충분하고 적절한 손해배상을 할 것
△ 이 사건과 같은 사태의 재발방지를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4. 이 법정은 대한민국정부에 대하여 즉시 1979. 10. 26.부터 비상계엄이 해제된 1981. 1. 24.까지의 기간에 미국의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 등 영향력의 행사에 관련된 것으로 평가되는 일체의 자료를 공개하고 1980년 5월에 계엄군에 의하여 광주에서 행해진 민간인 집단살해행위에 관한 미국의 책임에 대한 진상규명작업에 착수할 것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