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1978)
[작품해설]
이 시는 민중시가 나아가야 할 하나의 모범 답안이라고 할 정도로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정희성은 첫 시집 『답청』에서 전통적인 것, 신화적인 것에 대한 현대적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점검하기도 하고, 언어의 압축을 꾀하면서 서정성의 진폭을 시험하기도 하다가, 두 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이르러 그간의 절제된 형식에서 벗어나 형식의 자유로움과 감수성의 역동적 요건을 확보하며 마침내 현실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이 시집에서 그의 시 세계는 두 가지의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시적 진실성에 대한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민중적인 삶에 대한 애착이다. 이 두 가지 지향은 그의 시를 일상적인 삶의 문제와 현실의 국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 원동력이 된다.
이 시는 중년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통해 인생의 궁극적 가치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노동자의 처지에 밀착시킨으로써, 민중 시 계열의 많은 시들이 지닌 결함-지식인 화자를 통해 목소리만 높이는 시적 어조의 불균형 문제를 말끔히 해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샛강’ 취로 사업장에서 날품을 파는 중년 노동자인 시적 화자는 하루분의 노동을 끝내 저녁 무렵,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바라보며 ‘흐르는 것이 물뿐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그롸 같다고 생각한다. 쉼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건강하고 활기찬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삶은 그러하지 못함을 깨닫는다. 보잘 것 없는 노동의 대가인 줄 알면서도, 또한 천대받는 일인 줄 알면서도 부양가족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날품을 팔 수밖에 없는 자신의 기막힌 삶을 돌아다보면서 그는 실의에 빠진다. 이렇듯 적극적인 현실 극복의 의지가 없는 그는 자신을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라고 자학하며, 작업이 끝나면 그저 강가에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돌아가는 일이 전부이다.
그러나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떠오른 달을 새삼 발견하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절망적인 자아 인식 태도를 버리게 될 뿐 아니라, 비록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이지만, 왜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썩은 강물 속에 떠오른 달이지만, 그 달빛의 휘황함에서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게 된 것이며, 나아가 건강성을 회복하고 결연한 의지를 가슴에 담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이 단순히 ‘돌아간다’ 가 아닌, ‘돌아가야 한다’라는 당위적 종지형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삽’을 ‘씻는다’는 것은 노동자인 화자 자신의 생계 수단인 삽을 날카롭게 하여 밝은 미래를 앞당기겠단는 의지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와 같은 맥락으로 ‘돌아갈 뿐이다’와 ‘돌아가야 한다’는 구절 역시 모순된 현실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겠다는 현실 극복의 의지의 적극적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 또 한 가지 덧붙일 점은, 이 시가 환경 파괴의 위험성을 이미 20년이나 앞질러 통찰함으로써 ‘생태시’ 또는 ‘환경시’로서의 전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1970년의 왜곡된 근대화 과정에서 말미암은 자연과 인간의 괴리감 내지 환경 파괴의 위험성을 ‘저물어서 /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떠올라 물결에 흔들리는 쓸쓸한 달의 모습을 통해 극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정희성(鄭喜成)
194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1981년 제1회 감수영문학상 수상
1997년 제2회 시와시학상 수상
1999년 제16회 만해문학상 수상
시집 :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시를 찾아서』(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