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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소설가 ©문학사상사 제공 |
천국의 문
- 김경욱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을 고치는 것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바른 핑크색 아이새도와 볼터치를 지우고 비비크림을 꼼꼼히 덧발랐다. 입술은 핑크와 베이지색 립스틱을 섞어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냈다. 옷도 여러 벌 입어보았다. 고심 끝의 선택은 중요한 자리에 입고 가려고 사둔 까만 벨벳 원피스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조명부터 켜야 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자정 무렵이었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쓰
러져 잠든 것이다. 어린이집 일이 고단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으로 떠나고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여자는 싱크대로 가서 머그잔 가득 보리차를 따랐다. 북유럽 신화 속 상상의 동물이 그려진 커다란 찻잔은 여자가
북국의 오로라 여행을 꿈꾸며 산 것이었다. 여자는 시간을 들여 여러 모금 마셨지만 보리차를 절반이나 남겼다. 애당초 갈증을 달래
기 위해서는 반 잔이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아버지 몫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뭐든 여자부터 먹어보게 했는데 독을 탔을
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휴대폰 폴더를 열고 버튼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여자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가족에게 연락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
다. 임종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전화를 돌린 것만도 이미 두 차례였다. 엄마와 여동생. 고작 두 통이었지만 스무 통은 돌린 기분이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엄마는 남의 집 얘기처럼 데면데면 굴었고,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여동생은 남의 나라 얘기인 양 시큰둥했다.
고민 끝에 여자는 ‘2’버튼을 길게 눌렀다. 두 번째 단축번호가 호출한 곳은 콜택시 콜센터였다. 한밤중에 고통을 호소하는 아버지 때
문에 여자는 응급실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 무너지는 정신을 따라 아버지는 몸도 급격히 망가져 갔다. 폐가 먼저였고 그다음은
심장과 콩팥이었다.
주변에 차량이 없다는 문자가 온 것은 10분쯤 뒤였다. 빈 택시가 귀한 시각이기는 했지만 밀려나듯 이사 온 이 동네는 유난히 택시
가 드물었다. 여자는 외투와 숄더백을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한 시간 가까이 발을 동동 구르다 택시에 오른 여자를 맞은 것은 시끄러운 음악 소리였다. 라디오에서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등포요.”
여자가 차문을 닫으며 말했다.
“영등포 어디?”
운전수가 백미러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눌러쓴 야구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앴다.
여자는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 이름을 댔다.
“어디라고?”
운전수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죄송하지만, 볼륨 좀 줄여주세요.”
여자도 목소리를 높였다.
운전수가 라디오를 끄자 여자는 요양병원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거기가 어디야?”
운전수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주말마다 택시를 타고 면회를 다녔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던 여자는 이내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갈 때는 버
스를 탔다. 택시를 이용한 것은 집으로 돌아올 때만이었다. 양 볼 가득 알사탕을 문 채 병실 창가에 멍하니 앉은 아버지를 보고 나면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택시비가 아깝긴 했지만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탈 자신이 없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심란했다.
허물어진 벽 같은 얼굴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붉게 타오르는 나뭇잎을, 신의 정맥처럼 파란 하늘을, 기적 같은 새하얀 눈송이
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과연 생각이라는 걸 하기는 할까? 두서없는 상념은 언제나 영혼(사람에게 영혼이 있을까?)에 관한
아득한 물음으로 귀결돼서 여자는 무기력해진 채 택시에서 내려야 했다.
“죄송하지만, 내비게이션으로 찾아봐주실래요?”
“무슨 병원이라고요?”
“에버그린이요.”
“이름 참 희한하네.”
운전수가 궁시렁거리며 천천히 내비게이션을 만졌다. 여자가 보기에는 신중하다기보다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런 데는 없어.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운전수가 버럭 소리쳤다. 이름이 희한해서 출발이 지체되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도 그랬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싶으면 벌컥 분노를 터뜨렸다. 도화선은 숫자였고 뇌관은 단어였다. 중요한 순간임을 본능
적으로 감지했는지, 병원에서 인지능력을 테스트할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그래도 정상은 아니었다. 의사는 다시 물어볼 것임을 환기
한 뒤 아버지에게 세 개의 단어를 따라하게 했다.
구름, 나무, 강물.
매번 같았다. 그리고는 백에서 일곱씩 거듭 빼게 했다. 아버지의 망가진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셈은 두 번째까지가 고작이었다. 엉뚱
한 숫자가 거푸 나오면 의사는 셈을 중단시키고 좀 전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얼음, 나물, 강릉.”
아버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얼음 대신 기름이거나 나물 대신 녹두(음식에 대한 집착은 전형적인 치매 증상이라고 의사는 설명했
다)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강물은 언제나 강릉이었다. 여자가 알기로는 아버지의 인생과 무관한 지명이었다. 언젠가 여자는 아버지
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무슨 연구라도 있느냐고. 당혹스러워 하는 눈빛도 잠시, 아버지는 핏대를 세우
며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왜 밥 안 줘!” 방금 드시지 않았느냐고 하자 옆집 여편네가 훔쳐 먹었다며, 아비를 굶겨 죽일 작정이냐고
파랗게 역정을 냈다.
“잠깐만요.”
여자가 숄더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엊그제 한 달 치 입원비를 치르고 받은 영수증이 있을 텐데. 한참을 뒤져도 보이지 않던 영수증
은 여권 갈피에서 나왔다. 여자가 늘 지니고 다니는 여권은 유호기간이 몇 달 안 남았지만 도장 한 번 찍힌 적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영수증을 들여다보며 병원 주소를 댔다.
운전수가 내비게이션에 병원 주소를 입력했다.
“에버그린이 아니라 그레이스네. 그레이스 요양병원.”
운전수가 거 보라는 듯 소리쳤다.
여자는 아차, 싶었다. ‘에버그린’은 요양병원에 딸린 장례식장 이름이었다. 이상하게도 병원과 장례식장 이름이 달랐다.
부고를 알릴 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유족의 처지를 감안해서 그런 거라고, 부모가 요양병원에서 사망한 것을 감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해준 사람은 치매 병동의 남자 간호사였다. 해가 두 번 바뀌도록 가벼운 눈인사나 주고받던 사내와 단둘이 마주
앉게 된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사과를 깍던 여자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든 아버지가 여자의 목을 겨누고 복도로 끌고 나가며 소리
쳤다. 나가게 해달라고, 내보내주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그때 사내가 없었다면……. 여자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모두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사내만 뭔가를 했고, 아버지가 돌연 사지를 늘어뜨리며 고꾸라졌지만, 뭐가 어찌된 노릇인지 누구도 정
확히 알지 못했다.
무슨 혈인가를 찔렀다고, 왕년에 침 좀 놨다고 사내가 귀뜸해준 것은 어느 빈소에서였다. 그랬다. “이럴 때일수록 뭘 좀 먹어야한
다”며 사내는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여자를 요양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으로 데려갔다. 사내가 영정에 절을 하는 동안 여자는 상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주눅 든 모습이 교무실에 불려온 학생들 같았다. 반면 흰 종이가 덮인 상 앞에 자리를 잡는 사내
의 태도는 예약석이라도 찾아가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여자가 자석에 이끌리듯 맞은편에 앉은 것도 그 당당함 때문이었다.
“아는 분이세요?”
육개장에 밥을 말고 있던 사내에게 여자가 물었다.
“아니오.”
무슨 상관이냐는 듯,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후로 여자는 면회갈 때마다 사내와 따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그냥 오기
서운해서였고 세 번째부터는 응당 밟아야 할 절차처럼 되어버렸다. 데이트는 아니었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몇 마디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모종의 채무감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낸 것도 아니었다. 자판기에서 꺼낸 뜨거운 커피를 사내에게 건
넬 때, 여자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여자는 궁금했다. 말총머리만 아니면 특별히 눈길 끌만한 구석을 찾기 힘든
사람인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되짚어 보니 병실에서도 사내는 남다른 데가 없지 않았다. 주사를 놓거나 소변줄을 갈아끼
우는 모습이 섬세하고도 자연스러웠다.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 태도는 분명 능숙함과는 달랐다.
길에는 불빛이 많았고 운전수는 말이 많았다. 여자로서는 뭐라 대꾸하기 난감한 말이 대부분이었다. 여자가 얌전해 보이지 않았다
면 차를 세우지 않았을 거라고 운을 떼더니 심야운행 중 겪은 진상 승객들의 만행을 늘어놓았다. 개중에는 화투짝을 신용카드라고 내
밀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걸로 계산하라고 끝까지 우기는데 환장하겠더라고. 달광도 아니고 흑싸리 껍데기를……. 멀쩡하게 생긴 놈이.”
운전수가 혀를 찼다.
치매에 효과가 있다는 말을 주워듣고 여자는 부러 아버지와 화투를 치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아버지가 예전 모습을 되찾는 듯했다.
패에 맞춰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짜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가 알던 아버지였다. 운전대를 잡기 전에 지도부터 찬찬히 살피던 아버지.
운전수가 라디오를 다시 켰을 대 여자는 누구누구에게 부고를 전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출근을 못할 테니 어린이집에는 당연히 알
려야 했다. 문제는 친구들이었다. 알릴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신 연락을 돌려줄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검고 긴 구름이 몰려와요.
천국의 문을 두, 두, 두드려요.
학창 시절, 여자가 곧잘 흥얼거리던 팝송이었다. 차창 밖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여자는 검고 긴 구름의 끝, 죽음 뒤에는 무엇이 기다
리고 있을까 생각했다.
죽음이란 빛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사내였다.
“흐르는 강물은 바다를 만나는 순간 가장 고요하죠. 근원으로 돌아가니까. 아니, 근원의 일부가 되니까. 죽는 순간 우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에 휩싸여 깃털처럼 날아올라 거대한 빛의 일부가 돼요. 무한한 빛의 입자들이 먼지처럼 떠 있는 그 거대한 빛은 시시각
각 색깔을 바꾸며 아름답게 물결치죠.”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지만 마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오로라처럼요?”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젠가 보았던 여행 다큐멘터리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네.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바다가 햇살에 반짝이는 것처럼.”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자신할 수 있죠?”
여자가 물었다.
눈을 뜬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직접 본 것이라고, 트럭에 치어 심장이 멎었던 반나절 동안 겪은 일이라고. 이런 말
도 덧붙였다.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먼지를 닦아낼까요? 먼지는 우리가 결국 먼지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환기하기 때문이죠. 먼지에서 먼지로,
빛에서 빛으로. 사실 별이란 우주먼지 덩어리죠. 별과 사람은 구성 성분이 같다는 거 알아요? 우리가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빛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일깨우기 때문이에요. 어둠을 두려워할 때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빛인 셈이죠.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
요는 없어요.”
아름다운 이미지 때문일까. 확신에 찬 말투 때문일까. 사내의 말을 떠올리면 여자는 마음의 갈피마다 꾸깃꾸깃 접힌 자리가 말끔히
펴지는 듯했다. 고통과 억울함과 죄의식 속에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남몰래 상상하던 순간 접혔던 자리까지도.
여자는 숄더백에서 콤팩트를 꺼내 다시 화장을 고쳤다.
병원의 공기는 낮에 면회 올 때와는 사뭇 달랐다. 죽음처럼 무거운 고요 속에서 묵은 기침 소리, 코 고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디선가 물 내리는 소리도 났다. 어렴풋한 그 소리들은 딴 세상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데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활기와도 거리가 멀었다. 여자는 시멘트로 짠 거대한 관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 여자의 주의를 끈 것은 익숙한 냄새였다. 젖내, 지린내,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야릇하게 비린 냄새. 놀랍게도 어린
이집에서 날마다 맡던 냄새였다. 수액주머니나 오줌주머니를 옆구리에 낀 노인들의 거처에서 어린이집 냄새가 나다니. 여자는 의아
했다. 둘 중 하나였다. 요양병원에서 생명의 냄새를 맡았거나, 어린이 집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거나. 어쩌면 두 냄새가 본디 하나인
지도 몰랐다.
여자는 어두운 복도와 침침한 계단을 지나 아버지의 병실로 향했다. 빛은 비상구 표시등과 화장실에서만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집
에 있을 때도 화장실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다. 전립선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아버지 때문이었다. 문도 닫지 않고 변기 옆에 쭈그려 앉
아 볼 일을 보던 아버지는 영락없이 주위를 경계하는 짐승 같았다. 동생이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이튿날 손등에 화상을 입
은 채 나타났을 때처럼.
엄마한테 그 얘기를 자세히 들은 것은 이제 와서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였다.
“시장 입구에서 울고 있더라며 야쿠르트 아줌마가 데려왔잖니. 그런데 아줌마가 돌아서자마자 네 아빠가 귓속말로 이러는 거야. ‘저
여자,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히더라.”
엄마가 이혼을 마음에 품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고 했다. 당시 여자는 열 살, 동생은 여덟 살이었다. 엄마는 동생이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기다린 셈이었다.
부모가 갈라설 때 여자는 아버지 곁에 남았다. 동생이 독립하겠다고 선수를 쳤고 엄마에게는 새 남자가 있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
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독립의 뜻을 내비쳤던 사람은 여자였다. 일본 유학을 원했던 쪽도, 오로라의 나라를 동경한 쪽도 여
자였던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고, 그곳에서 만난 일본 남자와 결혼하고, 일본에 놀러온 핀란드 남자와 재혼해 헬싱
키행 비행길에 몸을 실은 쪽은 동생이었다. 우울이 수챗구멍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면, 여자는 자신의 삶
을 도둑맞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실감은 동생이 일부러 그랬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의심
에 이르기도 했다. 미친 생각이었다. 동생이 무엇 때문에? 격렬한 의심 끝에는 원하던 삶을 움켜쥐지 못한 게 자신의 나약함 탓이 아
니라는 쓸쓸한 위안이 찾아오기도 했다.
잠들어 있는 아버지는 멀쩡해 보였다. 쇠잔의 기미가 확연했지만 금방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색색거리는 얕은 숨소리, 못마
땅하다는 듯 찌푸린 표정, 고장난 신진대사를 돕는 의료기구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상했다. 뭔가를 찾아내려 애쓰는 사람처럼
여자는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는 듯 차가운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불빛 아래서도 아
버지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천장이 낮아진 기분이었다. 만약 어린이집에서 돌보던 아이가 그리 말했다면 여자는 “네 키가 그만큼 자란 거야”라고 일축
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세상에 애매하거나 불가해한 구석은 없었다. 답이 뻔한 문제 같다고 할까. 적어도 여자에게는 그랬다. 말문이
채 트이지 않은 애들의 울음은 졸아든 위장이나 축축해진 기저귀를, 머리꼭지가 여문 애들의 울음은 빼앗긴 장난감이나 빼앗지 못한
장난감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곳은 요양병원이고 저기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여자의 성장판이 닫힌 지도 오래
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자는 간호사실로 향했다.
당직 간호사는 팔짱을 낀 채 꾸벅거리고 있었다. 남자였다. 치매 병동에는 남자 간호사가 적지 않았다. 아버지의 위독을 알린 것도
남자 목소리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간호사가 눈을 뜨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여자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여자는 병원에 달려오게 된 경위를 설
명했다.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는 벌떡 일어나 병실로 뛰어갔다. 와 보니 별 탈 없어 보인다는 말을 덧붙일 틈도 주지 않고.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한 간호사는 전화를 받은 게 확실하냐고 따지듯 물었다. 여자는 황당했다. 하지만 여자가 쥐어짤 수 있는 최대
치의 항변은 혹시 전화하지 않았느냐는 자신 없는 물음이 고작이었다.
“제가요?”
간호사가 펄쩍 뛰었다.
“정말로 전화가 왔었다고요.”
여자가 호소하듯 말했다.
“거, 참!”
간호사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 번번이 “확실하죠?”라고 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간호사가 미심쩍다
는 얼굴로 말했다.
“다 확인해봤는데 그런 전화를 한 사람은 없어요.”
“제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가요? 이 시간에 택시까지 타고 와서?”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꼬리를 높이며 휴대폰을 꺼내 통화목록을 뒤졌다. 뒤질 것도 없이 금방 찾았다. 최근통화목록에서 콜택시
콜센터 바로 다음이었다.
“보세요. 여기…….”
여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목록에는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고 찍혀 있었다.
“병원이라고 한 게 확실합니까?”
간호사가 휴대폰을 낚아채 확인하더니 다그쳐 물었다.
“분명히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어요.”
여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어쨌든 별일 없으니 다행이죠.”
“형광등 좀 갈아주세요.”
대뜸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
간호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형광등에서 소리나는 거 안 들려요?”
여자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무엇 때문인지 여자는 억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보세요, 저는 환자돌보는 사람이지 형광등 가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간호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쳐 건강이 악화될 수도 있잖아요. 그분이라면 군말 없이 갈아줬을 텐데.”
“누구요?”
“됐어요.”
여자의 얼굴에 괜한 말을 했다 싶은 빛이 스쳤다.
“이젠 돌아가세요.”
“기왕 왔으니 좀 있다 갈게요.”
“면회시간 끝났어요.”
간호사가 냉담하게 말했다.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쪽은 여자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갑자기 여자가 애원조로 말했다.
여자의 볼이 빨개졌다. 여자는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데 소극적이고 서툴러서 그런 순간이면 얼굴을 붉혔는데 그래서 되레 남
자들의 눈길을 끌곤 했다.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둔감했다. 둔감하다기 보다는 죄의식을 느꼈다. 대개는 불필요한 죄의식이었다. 불필
요한 죄의식 속에서 여자는 평온을 얻었다. 그것은 여자가 몇 안 되는 구애자들을 조금씩 멀어지게 한 방식이기도 했다. 결혼이라는
청춘의 빛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에도, 그러니까 일몰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카페에서 반지 케이스를 앞에 두
고도 여자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끼니, 아버지의 불면, 아버지의 발작. 말하자면 아버지라는 어둠.
“그래도 곤란한데…….”
간호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병실을 나갔다.
여자는 아버지 곁에 앉았다. 대체 누가, 왜 그런 전화를 걸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장난 전화였을까? 아버지의 입원 사실을 아는
사람 중 그런 몹쓸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신종 피싱인가?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니, 그럼 혹시 집을 비운 사이 털려고? 여자
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나간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자니 좀 으스스하기도 했다.
이제 보니 아버지는 집에 있을 때보다 살이 오른 듯했다. 순간, 여자는 마음 한구석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관심을 끌려고 온
종일 안달이던 아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마에게 안기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심정이랄까.
정작 살이 빠진 쪽은 여자였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여자는 버스를 기다리다, 생선을 고르다, 화분에 물을 주다 몽유
에서 깬 사람처럼 화들짝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괜찮냐는 말을 듣는 날이 잦아졌다. 혼자 챙겨 먹는 저녁은 점점 부실해지더니 급기
야 찐 감자 한 알로 굳어졌다. 동쪽으로 쪽창이 난 반지하의 부엌에서 감자를 꾸역꾸역 먹는 저녁이면 한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 속에
들어앉은 듯했다. 아버지만 떼어내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리라 기대했는데.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바꾸고, 영어 회화 학원에도 등록
하고, 오로라를 보러 떠날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만 없다면.
여자는 감자를 삼키다 가끔 사례가 들렸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아버지를 퇴원시킬까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
에 들어갈 때마다 시 외곽으로, 작은 평수로 산동네로 세간을 옮기고도 요양병원 입원비 때문에 다시 반지하로 내려앉은 여자였다.
더 물러나야 한다면 이제는 땅속이나 하늘뿐이었다. 하지만 무시로 얼굴을 내미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망치나
식칼을 휘두를 때면 동료 교사들에게 ‘샌님’이라 불리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아버지가 처음 망치를 휘둘러 거울을 깼던 날, 여자는 깜짝 놀라 맨발로 집을 뛰쳐나갔고 공중전화 부스에 뛰어들어가 수신자 부담
으로 동생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동생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해서 여자를 더 놀라게 했다.
“언니는 한 번도 안 맞았으니 그렇지. 난 어릴 때 걸핏하면 맞았는데.”
여자는 동생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실종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처럼.
무엇 때문인지 여자의 부모는 그 일을 쉬쉬했다. 부부싸움 와중에 어쩌다 한 번씩 입에 오르는 게 다였다. 그럴 때면 불똥이 여자에
게 튀기도 했다. 하나뿐인 동생을 건사하지 못했다고(여자는 친구들과의 놀이에 정신이 팔려 동생이 사라진 것도 몰랐다) 윽박지른
쪽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엄마는 여자의 역성을 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인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여자는 억울했다. 동생에게
직접 그 얘기를 꺼낸 것은 당사자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면 “집에 있던 나도 죽
을 만큼 무서웠는데 넌 오죽했겠니”라는 식으로 운을 떼지는 않았으리라.
“무슨 소리야?”
동생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퉁명스레 물었다.
그날의 날씨부터 옷차림까지, 여자는 있는 기억 없는 기억 다 끄집어냈지만 동생은 끝까지 아무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다. 여자는 말
문이 막혔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고 나중에는 서운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얼마나 잊고 싶으면 저럴까,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
만 서운함을 누그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동생의 반응을 곱씹을수록 서운함은 동생의 손등에 남은 흉터만큼이나 확연해졌다. 결국
여자는 동생이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동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데없
이 울분을 터뜨리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낯선 영혼의 불꽃을, 생경한 삶의 알맹이를 발견했을 때 여자는 동생의 말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정말이지 궁금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내가 알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왠지 날이 밝을 때까지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입관을 기다리는 시신처럼 누워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푸르스름했다. 창 너머에서 반짝이는 네온사인 때문인지도 몰랐다. 수시로 색
깔을 바꾸는 불빛 속에서 여자는 문득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다. 당장 화장을 지우고 훈김 가득한 욕조에 눕고 싶었다.
“한밤의 무지개를 봤어. 언니도 봤어야 했는데.”
오로라를 보고 흥분에 들떠 전화한 여동생의 말을 떠올리자 피로감은 극심해졌다. 네온사인은 한밤에 뜬 무지개처럼 눈부셨다. 캄
캄한 이쪽에 비하면 요란한 발광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는 아버지의 침대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모았다. 둔중한 피로감 속에는 날카로운 통증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랫배
가 뜨겁고 묵직했다. 생리의 기미라면 열흘이나 일렀다. 여자가 생리 주기에 예민해진 것은 출산 경험이 없을수록 폐경이 빠르다는
것을 본 뒤부터였다. 여자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었다. 뭔가에, 누군가에 쫓겨 다급히 문을 두드리지만 아무도 열어주지 않는
외진 골목.
여자는 합장한 손 위에 이마를 얹었다. 뭔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여자에게는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여자의 볼에 눈
물이 흘러내렸다. 힘들 때마다 떠올리면 마법처럼 마음을 다독여주던 전생 얘기(사내에 따르면, 여자는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고려
의 공주였고 아버지는 호위무사였다)도 소용없었다.
아버지가 깰까 봐 숨죽여 울다 여자는 까무룩 잠들었다.
여자가 흠칫 눈을 뜬 것은 섬뜩한 한기 때문이었다.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몸을 으슬으슬했다. 차가운 기
운의 발원지는 아버지였다. 손과 발이 찼다. 아버지의 손발을 주무르다 여자는 어떤 강렬한 의심에 휩싸여 아버지의 이마를 짚어 보
았다. 싸늘했다. 이번에는 코밑에 손을 대봤다. 숨 쉬는 기미가 없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여자는 복도로 뛰어나가 간호사실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요!”
“무슨 일이죠?”
간호사가 물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이상해요.”
간호사는 병실로 뛰어가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간호사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모, 모르겠어요. 깜박 졸다 깨보니…….”
여자는 당황해서 말을 맺지 못했다.
간호사는 당직 의사를 호출했고 아버지의 가슴을 두 손으로 힘껏 눌렀다 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의사가 가운의 단추도 채우지 못한 채 헐레벌떡 달려왔다. 의사는 아버지의 맥을 짚어본 뒤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손전등
을 비췄다.
“씨피알은?”
의사가 물었다.
“효과가 없습니다.”
간호사가 대답했다.
“에이이디!”
의사가 소리쳤다.
간호사가 전기충격기를 가져왔고 여자 간호사가 한 명 더 뛰어왔다. 여자 간호사가 아버지의 상의 단추를 끄르고 마른 수건으로 가
슴을 닦았다.
“이백줄!”
의사가 양손에 끼운 마사지기를 비비며 소리쳤다.
남자 간호사가 전기충격기의 전압조절 다이얼을 돌렸다. 삐, 소리가 나자 의사가 마사지기를 아버지의 가슴에 댔다. 아버지의 몸통
이 덜컹거리는 화물차의 짐작처럼 튀어 올랐다. 여자는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했다.
“맥박!”
의사가 외쳤다.
“반응 없습니다.”
“삼백줄!”
더 강한 전기가 두드렸지만 아버지의 심장은 여전히 잠잠했다.
“삼백육십줄!”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싸늘하고도 무거운 적막이 병실을 짓눌렀다. 간호사들은 자기들끼리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 끝
났다고. 물 건너갔다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여자뿐이었다. 의사가 마사지기를 맥없이 내려놓을 때도,
굳은 얼굴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볼 때도, 사무적인 말투로 사망선언을 할 때조차도.
여자가 죽음을 실감한 것은 아버지의 미소를 본 순간이었다. 처진 눈초리, 살짝 올라간 입꼬리. 미소 짓는 얼굴이 틀림없었다. 아버
지가 웃고 있다니. 원치 않은 역을 떠맡은 배우처럼 평생 뚱한 얼굴로 살아온 아버지가. 당혹스러웠다. 여자는 하마터면 “아버지가 웃
고 있어요”라고 소리칠 뻔했다.
여자는 불의의 일격을 받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이 죽음에는 밝혀야 할 무엇이 있다. 저 웃음에는 어딘지 공평하
지 못한 구석이 있다. 가까이 있던 여자 간호사가 부축하려 했지만 여자는 손을 내저으며 병실을 뼈져나갔다. 아버지의 미소를 더 보
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미소에서 벗어난 뒤에도 여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저 행복한 표정이라니. 천
국의 문이라도 열어젖힌 사람 같지 않은가. 순간, 여자의 뇌리에 박혀 있던 어떤 이야기 하나가 섬광처럼 떠올랐다. 사내가 들려준 얘
기였다.
“용한 침쟁이들은 도살장에도 출장을 가요. 귀한 상에 올릴 돼지 머리를 위해. 정수리 깊이 침을 찌르면 돼지가 보기 좋게 미소 짓
죠. 실은 근육의 기계적인 반응일 뿐, 돼지들은 진짜 웃는 게 아니에요. 인간만이 웃을 수 있어요. 웃음이야말로 영혼이 있다는 증거
죠. 인간에게는 그 영혼을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혈이 있어요.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혈 깊숙이 침을 찔러 넣으면 단잠에 빠져
미소를 지으며 저세상으로 가죠.”
여자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발신번호를 감춘 목소리는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어요”라고 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거나,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가 아니었다.
비상구를 열고 계단참으로 나간 여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휴대폰을 꺼냈다. 일단 사내와 통화해야 할 것 같았다. 신
호음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어떤 말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거는지 분명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오히려 안도하며 서둘러 휴대폰을 닫았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의심의 근거는 빈약했다. 확신에 찬 말투만으로 사내의 전화였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남자 간호사 말대로 단순
한 착오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가 중환자실을 전전한 병원만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미소? 그것만으
로 사내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여자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사내가 왜?’라는 질문을 여자가 떠올린 것은 아버지가 미소 지은게 확실한지, 충격 때문에 헛것을 본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여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지난 주말, 면회가 끝난 뒤 술이나 한잔 하자고 청한 쪽은 여자였다. 이달 치 병원비를 치르기 위해 매달 3만 원씩 붓던 연금저축보
험마저 깼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서,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느껴져 다리가 완전히 풀리고 만 것이다. 집까지
가려면 술기운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사내는 당직을 서야 하니 장례식장에서 마시자고 했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구죠? 아버지는 어디로 간 거죠?”
여자가 몇 모금의 소주를 억지로 삼킨 뒤 항의하듯 물었다.
사내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죽으면 정말로 빛이 되나요?”
여자가 재우쳐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빛이 돼요? 누구든, 어떻게든 살았든?”
사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고통도 없이 말이죠?”
여자가 뭔가를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또 물었다.
“그래요. 육신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환희를 느끼면서.”
“그러니까 말하자면…….”
“네, 천국의 문을 연 것처럼.”
사내가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여자는 사내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다였다.
설마. 여자는 제 그림자에 놀란 아이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싹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호했다. 모호해서 더 오싹했다. 두려워
하는 그 무언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돼버릴 것 같았다.
여자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사내의 말을,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반박을 듣고 싶었다. 특유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면 예전처럼
이 마음의 소요도 잦아들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얘기를 듣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신호음이 멎고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안내음이 들렸을 때 여자는 병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자의 눈에 장례식장의 불빛이 들어왔다. 혹시? 여자는 장례식장 쪽으로 걸었다. 연고도 없는 빈소에 앉아 있으면 편해진다
던,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무거워서 찾아가면 거짓말처럼 홀가분해진다던 사내의 말을 떠올리면서.
정작 장례식장에 당도했을 때 여자는 동전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면이면 들어가고 뒷면이면……. 반반이었다. 사내가
거기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러니까 얼굴을 마주한 채 물어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전
의 결정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자와는 무관한 결과일 테니까. 하지만 여자가 장례식장 입구 전광판에서 상주
의 명단이 가장 긴 빈소를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불청객임이 탄로난 적 없느냐고 물었을 때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상주가 제일 많은 곳을 골라요. 낯선 사람을 봐도 다른 형제의 문상객이겠거니 할 테니까.”
여자는 아들 셋, 딸 둘, 사위 둘을 거느린 죽음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3층 특실은 빈소와 접객실이 복도 양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문상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접객실은 영업이 끝나가는 식당처럼 한산
했다.
여자는 접객실 입구에서 신발을 벗다 멈칫했다. 저기 구석 자리에서 사내가 벽을 마주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자는 비
틀거리며 신발장을 짚었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메스꺼움이 배 속 깊은 곳에서 다시 꿈틀댔다. 메스꺼움은 다른 것들의 전조에 불과
했다. 한기가 몸을 훑는가 싶더니 뜨겁고 맹렬한 것이 몸 깊은 곳을 휘저었다. 토할 것 같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십수 년 전의 어떤
기억 때문이었다.
여자가 대학생 때였고 현대시의 이해인지 감상인지 하는 제목의 교양 수업시간이었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던 젊은 강사가 여자에게 어떤 영시를 낭송하게 했다. 가스오븐에 머리
를 들이밀어 자살했다는 한 여자 시인의 작품이었다. 맨 앞에 앉은 학생부터 한 연씩 읽고 해석하도
록 했으니 특별히 여자를 지목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차례가 다가올수록 여자는 얼굴이 달아
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강사를 흠모해서만은 아니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일어난 여자
의 몫은 마지막 연이었다.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지.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 사람들은 당신인 줄 언제나 알고 있었어.
문제는 마지막 행이었다. 원문은 읽었지만 여자는 더 이상 입을 떼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입
을 꾹 다문 채 얼어붙은 여자에게는 누군가의 일생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스무 살 즈음의 여학생
들로 가득 찬 극장식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고 여겼는지 강사가 짓궂
은 얼굴로 농담을 건넸다.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는 비밀로 할 테니.”
아이를 안심시키는 듯한 말투였다.
여학생들은 강사의 재치에 찬사를 보내듯 과장스레 웃었다. 온 세상이 웃는 듯했던 그 순간,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어떤 끔찍한 감정이 벼락처럼 여자를 때렸다. 여자가 끝내 내뱉지 못한 구절은 이랬
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그 일이 있은 후 여자는 한동안 아버지를 못 본 척했는데 미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발길을 돌렸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휴대폰을 꺼내 ‘1’버튼을 눌렀다. 손이 떨렸
다. 너무 길게 눌렀는지 첫 번째 단축번호로 연결되고 말았다. 사내의 번호였다. 여자는 황망히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숫자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난생처음 느꼈던 그 끔찍
한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이 끝장나버린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여자의 남은 생을
걷어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가 다시 전화를 건 곳은 경찰서였다.
첫댓글 이 열린 소설에서 마지막 문장 여자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서 무어라고 말했을까가 독자의 몫입니다.
말 한 내용이 무엇일까요 ?
목현선생님 질문이 무척 궁금하기는 하나^^
나중 시간내서 진중히 읽고 제 생각도 밝힐께요
생각하여라 ..죠
그대여 이 날을 헛되이 보내려나"
글 잘보았습니다
여자가 경찰서로 전화를 건 이유는 무엇일까? 전화를 걸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사내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으니(죽인 것
같으니) 잡아가라고? 이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이 전화의
목적은 고소보다는 '고해'에 있다. 어떤 고해?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고해. 유준. 문학평론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을 잡아가라고 말한다고?
소설이 도덕적 교과서가 아니다. "제가 잘못 걸었어요."
이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려 성당이나 절로 가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적 죽임이 정당화된다.
좋은 글 읽게 해 주심에 우선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이 작가가 고맙습니다.
부모가 해 준 게 뭐있느냐며 삿대질에 불만천지인 자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영 등 돌리고 해체되고...
반인륜적 행위가 사회를 장악해 가는 현실을 향해 작가는
한 마디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간절한 소망을 저는 마지막 연에서 전율로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