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선의 시 명상]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다림'
기다리면서 발휘하는 상상력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 셔터스톡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얼핏 보면 모든 도로가 포장되어 흙 한번 밟을 수 없고 온통 빌라투성이라 삭막하기 짝이 없지요. 그렇지만 동네를 거닐다보면 때로 놀라운 풍경을 만납니다.
해가 지는 장엄한 모습이라던가, 빌라 앞에 내놓은 화분에 핀 꽃들, 공원에 핀 나무들은 물론이고 빌라 건물 사이, 좁은 틈에서 자라는 금식나무, 목련 나무, 향나무 등도 있지요. 게다가 옥상에서 한들거리는 장미꽃, 대문위 좁은 공간에 핀 파꽃 등이 오가는 이의 마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하는지요.
이러한 꽃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는 것들입니다. 누군가 애써 마련한 것도 있고 기다리면 저절로 찾아오는 것도 있지요. 가만히 보노라면 모두 무심히 지나갑니다. 서둘러 지나갑니다. 바쁘니까요. 둘러볼 여유가 없으니까요.
아마 누군가는 저 멀리 꽃을 구경하러 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오월, 사방에서 꽃 축제가 열리고 있으니까요.
축제장에 핀 꽃은 화려하고 아릅답지만, 쉽게 지칩니다. 일관된 강렬한 색채는 주의를 빼앗고 피로하게 하지요. 그 꽃들은 그 자리에 이미 완성되어 있기에 일순간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오래도록 기다려 보는 아름다움과는 달리 금세 무감해져 버리지요.
동네의 꽃들은 다릅니다. 조금 전 볏골 공원 관목 사이에 흰 꽃이 무더기로 핀 것을 보았습니다. 찔레꽃이었지요. 코를 킁킁 거리고 있노라니 운동하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찔레꽃 향이 제일 좋더라. 마스크 안에 꽃을 넣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다른꽃들도 물론 있지요. 지금 막 피기 시작하는 분홍빛 메꽃과 흰 철쭉, 그리고 노란 씀바귀도 피어 있습니다.
이런 꽃들은 기다려야 볼 수 있는 소박한 꽃들입니다. 기다림이 이 꽃들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나는 이 꽃들에 길들여진 걸까요. 기다림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들지요. 우리 삶은 이 상상력 위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기다리면서 발휘하는 상상력 덕분이 아닐까요.
기다림을 노래한 황지우의 시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대상은 다르지만 기다림의 속성은 동일하겠지요. 시인이 너를 기다리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는 지, 어떤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가만히 느껴보세요.
글 | 이강선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