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507.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얼마나 좋을까,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하면!. 등 )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7 04:11
- 얼마나 좋을까,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하면!
구약의 율법과 하느님 계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 초대교회가 율법 준수 문제로 위기를 맞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계명으로 믿고 있는데
이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계명도 율법과 다른 것 같습니다.
율법은 속박이지만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이고 자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도 아니고 하느님의 계명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인 율법을 자기들의 소유로 바꾸었으며
그것으로 율법을 잘 모르는 이들 위에 군림하며 억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과정에서 율법을 소유한 자들이 보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이들 손에 있는 율법은 사랑의 계명의 아니라
이처럼 깔보고 군림하고 억압하며 오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갈라치고 차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칼로 비유하면 의사에 손에 있는 칼이 아니라 깡패의 손에 들린 칼입니다.
이에 비해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하느님 계명과 당신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이고,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주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는 계명이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이니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분노하시거나 내치시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당신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아간다고 해서
자식에게 분노하고 부모 자식의 관계를 끊자거나
당신의 사랑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엇보다 사랑의 기쁨 안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쁨 안에 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곧 나도 또 너도 하느님 사랑 안에 같이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되 하느님 사랑 밖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고 다른 이는 밖에 있어도 무관심한 것이 아니며
너와 나 우리가 모두 같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묾으로써 기쁜 그런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사랑의 기쁨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오늘 사도행전의 유대주의자들처럼 하지 않고 사도들처럼
모두 같이 하느님 사랑의 계명 안으로 들자고 하고 들게도 할 것입니다.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영적 헌신(devotion)의 책!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두 영혼이 사랑 안에서 펼지는 성스러운 대화에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영적 헌신(devotion)의 책
2026년 5월 6일 수요일
신학자 스테파니 폴셀(Stephanie Paulsell)은 아가서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발견하도록 이끌 수 있음을 성찰합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그러했듯, 우리가 이 시를 펼쳐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오래 전 오리게네스가 권고한 것처럼, 아가서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듣게 될까요?
아가서와 함께 기도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 지닌 영광에 대한 기쁜 소식이며,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나누는 상호성의 기쁨에 대한 소식이고,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는 세상이 응답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소식이며, 알기를 갈망하고 또한 알려지기를 바라는 깊은 그리움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것들은 아가서가 본래 품고 있는 주제들이며, 아가서가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관심사들입니다. 아가서를 우리의 기도 안으로 가져올 때, 우리의 몸과 관계, 땅과 그리움 또한 기도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이러한 관심사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곧 우리의 삶과 하느님의 삶이 맞닿는 자리, 우리인 바인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 자리입니다. [1]
폴셀은 우리가 아가서를 읽을 때 서두르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고 권장합니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읽는 방식이 곧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기도로 이끄는 길입니다. 두 연인의 대화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아가서는 우리가 마치 사랑을 하듯 읽으라고 권합니다—사랑하는 이의 현존 안에 머물고, 그 아름다움과 은총을 찬미하며, 눈으로 보고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시야와 이해와 언어를 넘어서는 것까지도 흠모하도록 이끕니다. 속도와 정보의 홍수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아가서는 소나무와 백향목 가지 아래에서 천천히, 찬미하며, 묵상하며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아가서는 우리를 서두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읽고 또 읽으며, 예상치 못한 울림에 귀 기울이고, 다양한 의미가 차곡차곡 쌓이도록 초대합니다. 아가서는 잔치의 집이자, 정원이요, 포도원이며, 들판입니다. 곧 모든 계절마다 탐구할 수 있는 자리, 우리가 그 안을 거닐 때마다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성경 한가운데 보석처럼 감추어져 있는 아가서는, 우리가 다시금 그것을 펼쳐 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신실한 이들과 함께 끝나지 않는 노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
폴셀은 아가서를 기도와 삶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가서와 함께 우리 몸의 생명(삶), 서로와 함께하는 삶, 창조 안에서의 삶,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하여 사색하고 기도하십시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영적이고,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하며, 자비롭고, 어떤 차원에서는 온전히 알 수 없는 깊이로 열려 있는 하나의 삶입니다. 수세기 동안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되어 온 그 입맞춤에 의해 만져지고 축복받은 하나의 삶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 저는 삶이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억압감 속에, 우울로 흘러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이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이끌어 준 것은 하느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신뢰심을 가졌습니다. 그분의 은총을 깨닫게 하시며, 결국 나를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격려하여,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는 없지만, 과거의 경험을 통해 길이 열려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길을 이루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Don M.
References
[1] Harvey Cox and Stephanie Paulsell, Lamentations and Song of Songs: A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21), 275.
[2] Cox and Paulsell, Lamentations and Song of Songs, 276.
[3] Cox and Paulsell, Lamentations and Song of Songs, 18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im MacKinn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Canad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사랑의 시선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
숨영성 묵상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삶을 저어 올려라!"라고요...
"사랑"과 "명령"(계명)이라는 단어가 같은 문장 안에 놓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낯섦은 우리가 살아온 경험 속에서 이 둘이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명령, 즉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멀리 다른 전통의 예를 들자면, 바하이 경전에서 하느님께서 "나의 계명은 나의 종들 가운데서 사랑의 섭리의 등불이며, 나의 피조물들을 위한 자비의 열쇠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시편 118편의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라는 말씀과 비슷합니다. 이는 강제적으로 밀어붙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말에서 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누구나 사랑 없이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 밑에 있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독은 바로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4:16).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의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사랑으로 무언가를 가르쳐 주셨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저 역시 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자주 기억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책상 앞에 놓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렇게 기억하는 순간이 저에게는 부모님의 사랑에 머무르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20여 년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순간들은 여전히 제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치유의 힘을 지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이었을 겁니다.
우리 안에서 가장 상처 입은 부분은 "의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가장 깊은 상처는 다른 이들의 상처 입은 의지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사랑은 의지의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이고 집중된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상처 입은 의지를 위한 가장 좋은 집중 치료실입니다.
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삶은 커피 한 잔과 같습니다. 창가에 앉아 무심코 한 모금 마셨을 때, 설탕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탕을 찾아 넣는 것마저 귀찮아 그냥 마셨습니다.... 다 마시고 나니 잔 밑에 가라앉은 설탕 알갱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ㅎㅎ"
우리의 영적 삶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삶은 때때로 무미건조하고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삶을 저어 올려라!"라고요.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깊이 머물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분 안에서 삶의 활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만나려 하고 또 그분 안에서 활기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설탕, 즉 사랑의 활기를 건네 주시기 위해 손을 내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ㅎ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사랑받은 존재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밝히십니다. 결국,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받은 당신의 그 사랑에 머무름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됨에 동참하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는 ‘당신의 사랑’은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밝히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그러니 지금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기쁨”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중의 기쁨, 곧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 입니다.
<첫 번째> 기쁨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 대해서는 이 <고별사>의 뒷부분에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또한,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두 번째> 기쁨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얻어지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곧 우리가 당신과 아버지의 ‘사랑의 기쁨’에 동참하는 기쁨입니다.
이토록, ‘기쁨’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미 ‘기쁨’입니다.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1항)
그러니 지금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기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쁨”은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종말론적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하오니, 주님! 제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머물러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만이 오롯이 저의 기쁨이오니,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요즘 뉴스를 통해 전쟁의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부딪히고, 서로의 질서를 내세우며 상대를 압박합니다. 각 나라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보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질서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어린 생명이 희생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인간이 만든 질서는 때로 이렇게 생명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세상의 질서는 힘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쪽이 자신의 기준을 관철하려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왕도,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윗도 결국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야 했습니다. 인간의 힘과 논리는 결국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무엇이 참된 질서인가?” 신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유다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전통과 율법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유다인의 기준만을 강요했다면 교회는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기도하고 식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합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질서를 선택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랑과 포용, 생명의 질서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걸어온 길이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사목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먼저 듣고, 먼저 이해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 기준을 앞세우기보다, 공동체의 삶과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급한 변화는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단순한 권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질서입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 지배가 아니라 섬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 하느님의 질서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서는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질서는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만, 하느님의 질서는 상대를 살리려 합니다.
교부이신 성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은 태어나고 자라며 완성되어 갑니다. 우리는 세례로 태어나고, 말씀과 성사로 자라며,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향하는 곳은 경쟁과 승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서를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입니까, 하느님의 기준입니까? 전쟁은 죽음을 낳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낳습니다. 힘은 두려움을 남기지만, 사랑은 기쁨을 완성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선택합시다. 그 선택이 우리를 참된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기쁨은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던 아이들 앞에 설 때 마다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존재 자체로 제 기쁨입니다. 제게 있어 유일한 소망 한 가지는 여러분이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항상 기쁘게 지내는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아이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흠결 투성이인 우리가 하느님께는 존재 자체로 기쁨이라니 이 얼마나 과분하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 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이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솔로몬의 찬미가) |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9–11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이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계명, 머무름과 기쁨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은 단지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 안에 끝까지 머무르는 충실함입니다.
계명도 차가운 법이 아니라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거운 짐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지키는 생명의 길로 주어졌다고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억누르기 위해 계명을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을 잃지 않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두려움의 굴복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억지로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뜻 안에서 자기 삶의 참자리를 찾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은
“머무름”입니다.
사랑은 한순간의 열정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머물러야 하고,
지켜야 하고,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셨고
그 머무름 안에서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분이 좋을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치고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랑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회복이 있습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의 깊이를 보여 줍니다.
돌봄은
잠깐 관심을 보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상대가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있어 주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흔들릴 때
곧바로 판단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가 다시 중심을 찾을 때까지
곁을 지켜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의 돌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기쁨은
쉽게 들뜨는 기분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쁨은
편안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충실할 때,
헌신 안에서 자신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더 깊은 기쁨이 자랍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님은 사랑 안에 머무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다 이해한 뒤에만 따르신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길 앞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머무르셨습니다.
그 머무름 안에서
성모님은 가장 깊은 헌신과 가장 깊은 기쁨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청합니다.
주님,
제가 쉽게 흔들리고 쉽게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는가?
아니면 감정과 상황에만 휘둘리고 있는가?
나는 계명을 사랑의 길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부담으로만 여기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돌본다고 하면서
실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충실한 사랑과 충만한 기쁨을 함께 주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시고
상황보다 사랑을,
조급함보다 충실함을 선택하게 하소서.
당신의 계명을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랑의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헌신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살게 하소서.
아멘.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21:55 추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1) 여기서 ‘기쁨’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행복을 뜻하기도 하고, 구원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일인데, 사실은 구원받은 나 자신의 기쁨이 가장 큽니다.
신앙생활은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고, 구원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나에게 큰 기쁨을 주기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한 다음에 얻게 되는 성취감과 만족감 등도 좋은 것이긴 한데, 그래도 그것은 지상의 것일 뿐이고, 그냥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구원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기뻐하라고 강요해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명령’이 아니라 ‘권고’이고, ‘호소’입니다.
사랑의 호소.... 따라서 신앙생활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의무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이 될 뿐이고, 예수님의 부르심과 은총을 스스로 ‘멍에’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은 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가르쳐서 은총을 멍에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할례 문제로 논쟁이 일어난 일이 그 예입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그 논쟁은, 할례를 비롯해서 유대인들의 관습과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는데,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관습과 율법이 ‘멍에’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것들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 논쟁은 유대인들의 관습과 율법을 폐지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는데(사도 15,19),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법과 규칙만 강조하면서 신앙생활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신앙생활을 힘들고
부담스러운 생활로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항상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언제나 변함없이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이유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그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를 구원하려고 일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너희는 내 사랑을 받아들여라.”인데,
뜻으로는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은,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함으로써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입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에서 ‘내 계명’은 뒤의 12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말씀의 ‘사랑’은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노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은, “너희가 자기 자신의 구원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면”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기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필리 2,16-17).
이 말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낸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이고, 그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기쁨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우리가) 탈락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내가(우리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21:50 추가.
요한 15,9-11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주님의 마음 안에 머무르지 않고 글자 그대로만 들으면 우리에게 굉장히 무겁고 힘든 의무를 지우는 부담스러운 명령으로 들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부족한 인간인 우리로서는 제대로 가늠조차 되지 않아 막막하기만 한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의 계명들, 즉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차별없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니 부담스럽고 싫은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그저 우리 어깨에 무거운 멍에를 지우시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도록, 그리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사랑의 일치 안에 깊이 참여하도록, 그렇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초대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본질이자 근원은 사랑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완전한 사랑을 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커지는 겁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 방법으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랑을 ‘볼모’로 하여 우리에게 당신 뜻을 강요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사랑의 본질은 내가 바라는 것을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임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지요. 즉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가 싫어하는 것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그가 좋아하고 바라는 것을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그런 서로의 노력을 통해 그와 나 사이의 사랑이 더 깊어지고 완전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그분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바라신 겁니다.
그렇게 주님과 우리의 사랑이 점점 깊어져 완전해지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사랑이 완전해지면, 그렇게 주님과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면 주님께서 누리시는 참된 기쁨이 곧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다채롭지요. 그래서 우리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망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루 하루를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가며 참된 행복을 맘껏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담스럽다고 미루지 말고, 손해볼 것 같다고 망설이지 말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해야겠습니다.
----------------------------------------------------
260507. 부활 제5주간 목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 22:00 추가.
■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를 생각하며...
**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를 생각하며...
---------------------------------------------------------------
* 마가복음 12:41 ~ 44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성경 마가복음에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는 장면 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과부들에 대해 특별한 자비심을
가지고 계신듯 합니다.
과부, 고아, 노인 등등 사회의 약자에 대한 자선은
하느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천천히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중에서
과연 얼마나 헌금할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도저히 그 여인을 따라갈수 없을것 같습니다
아직도 나의 믿음은 가난한 과부 보다 못하구나 느낍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새로운 궁금점이 있습니다
헌금을 한 그녀의 일상생활은 어떠할까 하는 점 입니다
일상 생활, 그녀는 평소 어떻게 살아갈까요?
우리들 이웃들의 생활, 현실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쉽지 않고 어찌보면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넉넉치않은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또한 그들의 삶의 희노애락을 들어보면 눈물겹고 정겹습니다
이런 말들도 있습니다
"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 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 삶은 부자에게는 희극, 빈자에게는 비극이다 "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며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어렵고 또한 고귀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자신의 하루 생활비의 전부 헌금한 그녀의 삶은 어떠할까요?
주님, 현실의 무게에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을 살피소서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무겁습니다
주님, 세상에 살고있는 저희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
** 은전 한닢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들이여..
너는 나를 위한 삶의 지향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였다.
모든 것을 나에게 봉헌한 너에게는 은전 한닢 마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마음.. 나에게 봉헌하는 너의 마음을
마지막 은전 한닢으로 나에게 봉헌하라
그리고 슬퍼하지 마라
아버지께 순명하기 위해 나의 생명까지 봉헌하고
마지막 속옷까지 빼앗긴 나와 함께 슬퍼하라
세상은 철저히 나를 거부한다 오히려 반대한다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고통을 겪을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힘을 내라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