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삭위인(七朔偉人)
일곱 달 만에 태어난 큰 인물이란 뜻으로, 한명회에게서 유래한다. 태어날 때에는 부족했어도 나중에 잘 되는 경우를 말한다.
七 : 일곱 칠(一/1)
朔 : 초하루 삭(月/6)
偉 : 클 위(亻/9)
人 : 사람 인(人/0)
출전 : 추강냉화(秋江冷話), 해동잡록(海東雜錄)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칠삭둥이라고 한다. 칠푼이와 같은 말이다. 매달 음력 초하루를 삭일(朔日)이라 하는데 삭이 지나야 한 달이 되기 때문에 개월을 나타내는 단위도 된다.
어머니 뱃속에 열 달을 채워야 정상인데 일곱 달 만에 세상에 나왔으니 모자란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산모나 뱃속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은 미숙아였을 뿐 출생 후 관리를 잘 하면 정상아와 똑 같다.
일곱 달 만에(七朔) 태어나서 더 훌륭하게 자라난 사람(偉人)도 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한명회(韓明澮)다. 이후 태어날 때에는 부족했어도 나중에 잘 되는 경우를 의미하게 됐다.
한명회라 하면 조선 단종(端宗)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세조(世祖) 즉위에 앞장선 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사육신(死六臣)의 복위운동도 좌절시켜 그들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으로 가담한 악명으로 이름났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추강냉화(秋江冷話) 등 여러 곳에 한명회의 일화가 기록되어 전한다. 몇 가지만 알아보자.
한명회는 일곱 달 만에 칠삭둥이로 태어났는데 사지가 갖추어지지 못해 안을 수도 없었다. 부모까지 일찍 여의어 늙은 여종이 흰 솜옷에 길렀는데 뜻밖에도 잘 자랐다. 등과 배에 검은 사마귀가 있어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자라서 영통사(靈通寺)라는 절에 들어가 공부할 때 한 노승도 머리 위에 광채가 난다며 귀한 징조라 일러줬다.
그 곳에서 권람(權擥)과 사귀며 막역지우로 지냈다. 권람이 먼저 벼슬을 하고 세조에게 한명회를 추천한 이후 거사를 계획하고 앞장서 행동하여 승승장구, 영의정까지 올랐다.
서울 압구정동(鴨鷗亭洞)의 이름은 그 곳에 있었던 한명회의 호를 딴 정자 이름에서 나왔다. 한강 남쪽에 터를 잡고 벼슬에는 뜻이 없이 갈매기와 벗할 것이라며 이름 지었는데 실제로는 그것과 멀었다.
일등공신 네 번, 두 임금의 장인 등 영화와 권세를 누리고 살았던 한명회는 사후 연산군(燕山君)의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윤비(尹妃) 폐위에 가담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됐다가 후일 복원되는 등 파란이 이어졌다.
칠삭위인(七朔偉人)
일곱 달 만에 태어난 큰 인물이란 뜻으로, 한명회에게서 유래함. 태어날 때에는 부족했어도 나중에 잘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조선 7대 세조(世祖)에서 제9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권세와 영화를 누렸던 한명회(韓明澮)는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이며,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그는 칠삭동(七朔童)으로 태어났으나 일등공신을 네 번, 영의정을 두 번, 국구(國舅; 왕의 장인)를 두 번이나 지내는 화려한 일생을 보냈다. 두 딸이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성종비)이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공으로 정난공신에, 사육신 사건 처리 뒤에는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이어 1468년(예종 1년)에 발생한 남이의 옥사 처리 뒤에는 익대공신에, 그리고 성종 즉위 후에는 좌리공신에 책록되는 등 채 20여 년도 안 되는 사이에 4번의 공신에 책록되었다.
한명회가 1487년(성종 18년) 사망한 직후 그에 대해 사관들의 기록한 졸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며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손님들이 문에 가득 하였으나,접대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한 때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정 관원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 때에 떨쳤다.
한명회가 권세와 영화를 걸머쥔 결정적인 계기는 수양대군(세조)을 만나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金宗瑞)등을 처벌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단종1년)이다.
그때까지의 그의 모습을 문헌으로 단편적으로 보자
○ 명회는 일곱 달 만에 낳았는데 처음에는 사지가 갖추어지지 못하여 늙은 여종이 떨어진 흰 솜옷에 싸 두었더니 몇 달이 지난 후에 점점 형체가 이루어졌는데 등과 배에 검은 사마귀가 있어 천태, 북두성의 형을 상징하여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 비서(碑序)
○ 일찍이 영통사(靈通寺)에서 놀 때 밤중에 한 노승이 있는데 모양이 괴상하였다.은밀히 말하기를, “공의 머리 위에 광채가 번쩍번쩍 하고 있으니 모두 귀한 징조이다.명년을 넘지 않아 반드시 뜻을 이루리라.”하였다. - 잡기(雜記)
○ 공의 종조(從祖) 한상덕(韓尙德)이 매양 말하기를, “이 아이는 우리 가문의 천리마 새끼야.” 하고 데려다 길렀다.
○ 공이 중추(中樞) 민대생(閔大生)의 사위가 되었다. 그가 미천할 때에 민대생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한서방이 큰 뜻이 있어 마침내는 크게 현달할 것이니 다른 사위와 같이 대우하지 마오.” 하였다. - 사가집, 묘비
○ 젊어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자 1452년(문종2년) 음보(蔭補)로 개성의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을 때, 명절을 당하여 부중(府中)에 있는 관원들이 만월대(滿月臺)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술이 취하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서울 친구들로서 이 고도(故都)에 와서 벼슬살이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계(契)를 만들어서 우정을 돈독히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참가하기를 원하오.” 하자, 모든 사람이 그를 멸시하여 비웃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에 그가 좌명(佐命)의 원훈(元勳)이 되매 당시 계원들이 비로소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겼다. 세속에서 세력을 끼고 남을 멸시하는 자를 그때 사람들이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 지목하였다. - 죽창한화(竹窓閑話)
○ 공이 권람과 더불어 사생의 우의를 맺어 서로 사이가 좋음이 비록 옛날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권람과 뜻이 일치되어 일찍이 권람에게 농담으로 이르기를, “문장과 도덕은 내가 그대에게 양보하겠지만 정사(政事)를 경륜함에 있어서는 내 어찌 많이 양보하리오.” 하였다.
임신년에 38세로 경덕궁 직(敬德宮直)이 되었다. 그때에 문종은 이미 승하하였고 어린 임금이 자리에 있을 때였다.
공이 어느 날 권람에게 말하기를, “시세가 이와 같고 안평(安平)이 임금이 자리를 엿보고 있어 화란이 일어남이 조석사이에 있는데, 그대 어찌 이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단 말인가.” 하니,
권람이 답하기를, “그대의 계획이 옳다. 꾀를 장차 어떻게 내어야 할고.”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화란을 평정함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난을 다스릴 임금이 아니면 안 된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활달하기가 한 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英武)는 당 태종(唐太宗)과 같으니 천명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그대가 필연(筆硯)으로 모시고 있으니 어찌 조용히 여쭈어, 용단을 내리지 않게 않는가.” 하였다.
권람이 그의 계책을 세조에게 고하고 또 아뢰기를, “한생(韓生)은 꾀와 수단에 있어서 따를 자 없는 국사(國士)이며 이 세상의 관중(管仲)이오, 악의(樂毅)입니다. 대군께서 연릉(延陵) 계자[季子= 춘추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오왕 수몽(壽夢)의 제 4자이다. 왕은 현명한 제4자 계찰(季札)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계속해서 왕을 4번이나 사양하였음. 계찰을 연릉에 봉하였기 때문에 연릉계자라함]와 같은 절조를 지키려면 모르거니와 만일 나라를 다스리려고 할진댄 한생이 아니고는 불가합니다.” 하였더니
세조가 급히 불러 보고는 이로부터 모든 비계와 밀모를 모두 그에게 맡겨서 기획하였다. - 사가집 묘비
○ 계유년(1453, 단종1)에 세조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김종서를 죽이고 그의 무리를 가려내어 일망타진하니, 영의정 황보인,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우찬성 이양(李穰) 등이 모두 죽었다. 이에 정난공(靖難功)을 녹훈(錄勳)하고 세조가 영의정이 되니, 군신(群臣)이 모두 들어가서 축하연을 벌였다. - 추강집(秋江集)
영화와 권세를 누리고 살았던 한명회는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연산군 어머니 윤비(尹妃)의 폐위에 가담했다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가 후일에 복원되었다. (기타 자세한 연보는 생략함)
⭕ 한명희 또 다른 일화
○ 공은 계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신숙주와 함께 궁중에서 세조를 모시고 잔치할 때, 술이 취하자 세조가 숙주의 팔을 잡고 많이 마시면서 이르기를, “경도 역시 나의 팔을 잡으렷다.” 하니 숙주가 심히 취해서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서 세조의 팔을 잡으니 세조가, “아파, 아파” 하였다.
그때, 예종(睿宗)이 곁에 있다가 얼굴빛이 변하였다. 세조가 예종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가하지만, 너는 불가하다.” 하고는 극히 흥겨워하며 헤어졌다.
공이 집에 돌아와서 청지기에게 이르기를, “범옹(泛翁 숙주의 자)이 평일에 많이 취했더라도 술이 조금 깨면 반드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글을 열람한 뒤에 취침하나 오늘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네가 가서 내 말을 전하여 중지하게 하라.” 하였다.
청지기가 가서 보니 과연 공의 말과 같았다. 밤중이 되자 세조가 술이 깨자 내시를 시켜 숙주의 집에 가서 살펴보게 하니 숙주가 취침하였더라 하였다. - 소문쇄록
○ 공이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압구(狎鷗)라 하였다. 정책(定策)한 공로를 송(宋) 나라의 한충헌(韓忠獻= 송(宋)나라 정승 한기(韓琦)의 시호가 충헌(忠獻)이다. 한기는 정책(定策)한 공(功)이 있는데, 정책은 새 임금을 들여세우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한명회(韓明澮)가 세조와 성종을 들여세운 것을 말한다)에게 비기고, 벼슬에 욕심없이 은퇴한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벼슬을 사양하고 강호(江湖)에서 늙겠다는 말은 하면서, 실은 벼슬과 녹에 매어 떠나지 못하였다. 성종(成宗)이 압구정(狎鷗亭)에 시를 지어 주었는데, 조정 문사들이 다투어 가면서 화답한 것이 몇 백 편에 이르렀다.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三接殷勤寵渥優
임금 은혜 은근하며 대접 또한 융숭하니
有亭無計得來遊
정자는 있어도 와서 노닐진 못했어라
胸中自有機心靜
가슴 속 서린 기심(機心) 가라앉아 고요해지면
宦海前頭可狎鷗
벼슬 바다[宦海] 위에서도 백구와 친하리라
하였더니, 공이 싫어하여 현판에 붙이지 않았다.
포의(布衣) 이윤종(李尹宗)이 그 아래를 지나다가 시를 읊기를,
有亭不歸去
정자가 있으나 돌아가지 않으니
人間眞沐猴
참으로 이 인간의 갓씌운 원숭일세
라고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이르기를 “최경지의 자는 계화(季和)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진년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제5권
▶ 七(일곱 칠)은 ❶지사문자로 柒(칠)과 통자(通字)이다.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두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일곱을 나타낸다. 아주 옛날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는 선(線)을 그 수만큼 한 줄로 늘어 놓고, 다섯 이상은 다른 기호를 사용했다. 그 중 五(오)와 七(칠)과 九(구)는 닮음꼴, 六(육)과 八(팔)과도 닮음꼴로 되어 있다. 일설에서는 七(칠)은 베다란 뜻의 글자를 빌어 쓴 것이며 후세의 切(절)이란 글자를 기원이라 한다. ❷상형문자로 七자는 ‘일곱’이나 ‘일곱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七자는 칼로 무언가를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과 금문에 나온 七자를 보면 十자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칼로 사물을 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十(열 십)자가 막대기를 세운 그려졌었기 때문에 十자와 七자는 혼동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두 글자의 구분이 어려워지면서 끝을 구부리는 방식으로 지금의 七자를 만들게 되었다. 七자는 본래 ‘자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숫자 ‘일곱’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刀(칼 도)자를 더한 切(끊을 절)자가 ‘자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七(칠)은 일곱의 뜻으로 ①일곱 ②일곱 번 ③칠재(七齋; 죽은 지 49일 되는 날에 지내는 재) ④문체(文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해의 열두 달 가운데 일곱째 달을 칠월(七月), 사람의 일곱 가지 심리 작용을 칠정(七情), 바르지 못한 일곱 가지 견해를 칠견(七見), 그 수량이 일곱이나 여덟임을 나타내는 말을 칠팔(七八), 나이 70세로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의 칠순(七旬), 일곱 걸음에 지은 시를 칠보시(七步詩), 한 줄이 일곱자로 된 한시를 칠언시(七言詩), 일곱 줄로 매어 만든 거문고를 칠현금(七絃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칠전팔기(七顚八起), 유교에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의 조건을 이르는 말을 칠거지악(七去之惡), 사물이 서로 연락되지 못하고 고르지도 못함을 칠령팔락(七零八落) 등에 쓰인다.
▶ 朔(초하루 삭)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 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屰(역, 삭)으로 이루어졌다. 달이 되살아난다는 뜻에서 초하루를 나타낸다. 그래서 朔(삭)은 (1)합삭(合朔) (2)삭일(朔日) (3)어떤 명사(名詞) 아래 쓰이어 달수를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초하루, 음력(陰曆) 매월 1일 ②정삭(正朔: 정월 초하루) ③처음, 시초(始初) ④아침, 새벽 ⑤달력 ⑥북녘 ⑦시작(始作)되다 ⑧생겨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그믐 회(晦)이다. 용례로는 삭일과 망일 곧 음력 초하루와 보름을 삭망(朔望), 음력 초하룻날의 달을 삭월(朔月), 음력으로 매월 초하룻날을 삭일(朔日),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북풍을 삭풍(朔風), 병적으로 느끼는 추운 기운을 삭기(朔氣), 초하루에 베풀던 큰 조회를 삭조(朔朝), 방향을 이를 때에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삭방(朔方), 한 달분의 급료를 삭료(朔料), 한 달 남짓함을 삭여(朔餘), 초하루날 아침을 삭단(朔旦), 음력의 윤달을 윤삭(閏朔), 해산할 달이 다참을 만삭(滿朔), 그 달의 초하룻날을 월삭(月朔), 해의 처음과 달의 처음 곧 정월 초하루를 정삭(正朔), 다달이 또는 달마다를 축삭(逐朔), 아이밴 여자가 해산할 달을 당함 또는 그 달을 당삭(當朔), 달이 해와 지구의 사이에 있어서 일직선을 이룬 때를 합삭(合朔), 달수를 셈을 계삭(計朔), 하나 하나의 모든 달을 매삭(每朔), 보름 동안을 반삭(半朔), 고삭告朔 때 바치는 희생양이라는 뜻으로 비록 형식 뿐인 예禮라 할지라도 없애는 것보다는 낫다는 비유를 고삭희양(告朔餼羊), 남녀 구별이 어렵거나 일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구분하기 힘든 경우를 이르는 말을 박삭미리(撲朔迷離) 등에 쓰인다.
▶ 偉(클 위)는 형성문자로 伟(위)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뜻을 가진 韋(위)로 이루어졌다. 보통(普通) 사람 이상으로 큰 사람에서, 전(轉)하여 뛰어난 인물(人物)을 뜻한다. 그래서 偉(위)는 ①크다 ②훌륭하다 ③위대(偉大)하다 ④기이(奇異)하다 ⑤성(盛)하다(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⑥크다고 하다 ⑦들(복수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대(大), 클 태(太), 클 굉(宏), 클 거(巨)이다. 용례로는 뛰어나고 훌륭함을 위대(偉大), 뛰어나고 위대한 사람을 위인(偉人), 위대한 힘이나 뛰어난 힘을 위력(偉力), 위대한 사업이나 업적을 위업(偉業), 훌륭하고 뛰어난 용모나 모양을 위용(偉容), 훌륭한 재지 또는 그런 인물을 위재(偉才), 큰 바람이나 큰 기대를 위망(偉望), 덩치가 매우 큼 또는 훤칠하게 큼을 위석(偉碩), 뛰어난 큰 공훈이나 훌륭한 업적을 위공(偉功), 위대한 명성이나 뛰어난 이름을 위명(偉名), 뛰어난 재주나 훌륭한 기술을 위예(偉藝), 뛰어난 큰 인재를 위기(偉器), 도량과 재간이 넓고 위대한 사람들 위언(偉彦), 교묘하게 속임을 교위(巧偉), 뛰어나게 훌륭함을 기위(奇偉), 뛰어나게 위대함을 수위(秀偉), 씩씩하고 뛰어남을 웅위(雄偉), 뛰어나게 훌륭함을 탁위(卓偉), 체격이나 인격이 훌륭한 남자를 위남자(偉男子), 영걸스러운 풍채와 넓은 도량을 영풍위도(英風偉度), 동서고금의 위인들의 일생의 업적 및 일화 등을 사실에 입각하여 적어 놓은 글을 위인전기(偉人傳記), 얼굴과 몸매가 뛰어나게 크고 씩씩하고 훌륭함을 용모괴위(容貌魁偉) 등에 쓰인다.
▶ 人(사람 인)은 ❶상형문자로 亻(인)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것을 옆에서 본 모양을 본뜬 글자. 옛날에는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썼으나 뜻의 구별은 없었다. ❷상형문자로 人자는 ‘사람’이나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人자는 한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이기도 하다. 상용한자에서 人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만 해도 88자가 있을 정도로 고대 중국인들은 人자를 응용해 다양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이전에는 人자가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을 했었지만, 갑골문에 나온 人자를 보면 팔을 지긋이 내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었다. 소전에서는 팔이 좀 더 늘어진 모습으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人자가 되었다. 이처럼 人자는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사람의 행동이나 신체의 모습, 성품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人(인)은 (1)사람 (2)어떤 명사(名詞) 아래 쓰이어, 그러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사람, 인간(人間) ②다른 사람, 타인(他人), 남 ③딴 사람 ④그 사람 ⑤남자(男子) ⑥어른, 성인(成人) ⑦백성(百姓) ⑧인격(人格) ⑨낯, 체면(體面), 명예(名譽) ⑩사람의 품성(稟性), 사람됨 ⑪몸, 건강(健康), 의식(意識) ⑫아랫사람, 부하(部下), 동류(同類)의 사람 ⑬어떤 특정한 일에 종사(從事)하는 사람 ⑭일손, 인재(人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진 사람 인(儿),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짐승 수(兽), 짐승 수(獣), 짐승 수(獸), 짐승 축(畜)이다. 용례로는 뛰어난 사람이나 인재를 인물(人物), 안부를 묻거나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일을 인사(人事),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권(人權), 한 나라 또는 일정 지역에 사는 사람의 총수를 인구(人口), 세상 사람의 좋은 평판을 인기(人氣),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을 인류(人類),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능력을 인력(人力),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인재(人材), 사람의 수효를 인원(人員),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나 사람의 품격을 인격(人格), 사람에 관한 것을 인적(人的), 사람을 가리어 뽑음을 인선(人選),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인위(人爲), 사람의 몸을 인체(人體), 사람의 얼굴의 생김새를 인상(人相), 한 사람 한 사람이나 각자를 개인(個人), 나이가 많은 사람을 노인(老人), 남의 아내의 높임말을 부인(夫人), 결혼한 여자를 부인(婦人), 죽은 사람을 고인(故人), 한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장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 다른 사람을 타인(他人),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음을 이르는 말을 인사유명(人死留名),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짧고 덧없다는 말을 인생조로(人生朝露),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인면수심(人面獸心), 정신을 잃고 의식을 모름이란 뜻으로 사람으로서의 예절을 차릴 줄 모름을 인사불성(人事不省), 사람의 죽음을 몹시 슬퍼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인금지탄(人琴之歎)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