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113]
2020.03.19.(목)
욕 좀 할 줄 아는 사회
사람들의 입이 험해졌습니다. 욕이 아이들의 일상 언어가 된 것 같아 개탄했는데, 지금은 애들 탓할 입장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발동만 걸리면 다들 욕보가 되니까요. 아이들은 버스 안이나 지하철, 거리를 가리지 않고 말끝마다 ‘씨불’ ‘X됐다’를 입에 달고 다니고, 어른까지 거친 상말을 낯설어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욕은 특정 대상이 없는 보통명사지만, 어른들 상말은 대상이 분명하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
‘욕하는 사람들’ 대열이 길어지는 건 왤까요? 마음에 분노, 스트레스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서 대리만족을 찾는 욕구가 자극받아 생기는 현상은 아닐까. 선거철이 되면 욕쟁이 할머니가 뉴스로 뜨고, 욕하는 유튜브가 박수를 받고, “시발아저씨 우한짜요 중국 짜요.” 같은 패러디가 속출합니다. 여기에 TV드라마까지 가세해 욕을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욕이란 무엇인가? 주로 역기능이 떠오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심리치료기법에 이용되는 게 그런 것이죠. 심리치료는 우선 마음속에 재놓고 있는 말들을 몽땅 쏟아놓게 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이 하고픈 말을 하지 못할 때, 분노의 에너지가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게슈탈트의 ‘빈의자’ 치료법은 나를 분하게 만든 사람을 의자에 앉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분을 욕으로 쏟아내라고 해요. 욕이란 표현기법이 내담자의 거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발설 못하는 이발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그냥 두면 화병이 날 것 같으니 갈대숲에다 토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라인 서점을 훑다가 동화책 제목에 흠칫했습니다. ‘욕 좀 하는 이유나’ 란 책에는 욕을 한 친구에게 복수하려고 다른 친구에게 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씨발 같은 거 말고 좀 더 창의적인 욕으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똥통에 빠질 녀석, 치석 틈에 똬리를 튼 충치 같은 놈, 넓적다리 송장벌레 같은 놈” 따위입니다.
한 엄마가 우연하게 딸의 학습노트를 보다가 가슴이 섬뜩합니다. “노트에 써놓은 이글 뭐야? 친구에게 욕하는 거 아냐?” 그러자 딸이 “우리 샘이 된다고 했어.” “뭐야?” “샘이 말하기 어렵고 힘든 건 글로 써도 된다고 했어.” 그래? 그제서 엄마는 친구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를 욕이라도 혼자말로 써 풀라고? 엄마는 선생님에게 한 수 배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럼 이 빼곡히 써놓은 것은 뭐지? 욕 아냐?”
오래전 방영된 KBS2TV 드라마 가족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탤런트 김영옥의 명대사로 유명합니다. 1분 넘게 이어진 독설이 감칠맛 나 대본을 빌려 발췌해 놓았지요. 이 드라마는 한 때 거침없이 쏟아놓는 욕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 ‘욕쟁이할머니신드롬’ 이 만든 가짜 욕쟁이 할머니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김영옥, 김혜숙, 김영숙 세 자매가 욕쟁이 할머니 음식점에 와 순댓국을 시켰는데 맛이 없어 두 술 만에 수저를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러자 종업원이 다가와 시비를 걸자 세 자매가 나이순으로 종업원을 털어내는데, 이때 김영옥 명대사가 탄생하지요.
종업원: 이놈의 할멍구들아! 음식 앞에 놓고 뭐하는 짓거리들여!
김영옥: 야-! 니눈엔 내가 그리도 천진난만하게 뵈냐?
김혜옥: (당황한 종업원에게) 야, 너 민증까봐 몇 살이냐? 엉? 울 언니 29년생 뱀띠시다.
종업원: 아니 이것들이 노,노, 노망이 났나?
김영옥(주위를 진정시키며) 욕이란 말이다. 옘병 땀병에 갈아버릴 쑥병에 걸려가지고 땀통이 끊어지면 끝나는 거고, 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얼어 죽을 십장생 같은 년! 옘병 땀병에 그냥 땀통 끊어지면 그냥 죽는 거야. 이년아 이런 개나리 봤나? 이 시베리아 벌판서 똥병에 귤이나 까라!
욕설 투성이 같지만, 명사를 나열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은 웃음보가 터지고 속이 시원한 건 왤까? 요즘 어른들이 주고받는 욕은 정치판 발(發) 영향이 큽니다. 정치언어가 풍부하지 않은 현실에 그들의 위선이 풍미하는 시대상까지 겹쳐 ‘통큰누나’ 같은 유튜브 채널이 수십만 독자들 가슴에 얼음찜을 해줍니다.
인격이나 사람됨은 말에서 알 수 있고, 말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세상이 편안해지고 사는 것이 수월해지면 좋은 생각, 선한 말을 할 텐데, 사방팔방이 꽉 막혀 출구가 안 보이니 생각도 말도 거칠어지나 봅니다. 봄날은 깊어 가는데 우리네 일상은 아직 겨울인가요?(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