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스 히딩크 감독을 '동구 형'이라고 불렀다.
그를 영입했던 이용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 '참 멋있는 형 아니냐'고 하면서다.
히딩크는 실력에 소탈한 인간미를 겸했다.
폐부를 찌르는 말솜씨가 카리스마를 더 했다.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 후에도 자주 한국을 찾았다.
50대 시절 날렵하던 몸매에 살이 붙고 흰머리가 늘어 할아버지 다 됐지만
여전히 '이 사람 참 간단치 않네'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툭 던지는 한마디에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가 대표팀 감독으로 올 때 축구협회와 정부가 반씩 부담해 연봉을 100만 달러 가깝게 맞춰줬다.
다들 너무 비싸다고 했다.
그런데 16강에 오른 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는 그를 보고 천만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6강 전이 끝나고 한 말은 지금 생각해도 절묘하다.
이탈리아 감독이 '편파 판정으로 승리를 도둑 맞았다'고 하자 히딩크가 한마디 했다.
'남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라.'
'거울' 효과는 대단했다.
외신들은 '팔꿈치를 가장 많이 쓰는 팀' '한 골 넣으면 문을 잠그는 재미없는 팀'이라며 화살을 이탈리아에 날렸다.
히딩크가 엊그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임시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목구 네델란드 감독을 하다 성적이 부진해 쉬던 중이었다.
'히딩크 매직'은 유통기한도 참 길다.
첼시 임시 사령탑도 벌써 두 번쨰다.
그가 선수 상견례에서 거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거울을 들여다봐라. 잠깐이 아닌 오랫동안.'
선수라면 승리에 대한 배고픔을 느끼라는 뜻이다.
지난해 리그 우승팀 첼시는 올 시즌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자칫 2부로 강등당할 판이다.
스타 감독 무리 무리뉴와 스타 선수들의 불화 탓이었다.
한 성수는 자기를 ㅈ둥용하지 않는 무리뉴에게 교체 선수용 조끼를 던졌다.
무리뉴는 경기에서 진 뒤 '선수들에게 배신당했다'고 했다.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과 지략이 출중한 감독을 만났지만 막장 분위기에선 무기력한 패배만 거듭할 뿐이었다.
2002년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구호가 나온 적이 있다.
학연.지연을 끊어 실력으로만 선수를 기용하고
과학적 시스템을 도입한 그의 능력이 우리 정치도 바꾸면 좋겠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일자리 못 구해 아우성이고 경제 사그러드는데도 우리는 정치와 리더십 부재를 앓고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정신 좀 차려야 할 사람이 한둘 아니다.
잠깐이 아닌 아주 오랫동안 민학수 논설위원.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