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9장 22절 ~ 27절
O 다마스커스에 관한 말씀이라. 하맛과 아르팟이 수치를 당하니 이는 그들이 나쁜 소식을 듣고 낙심함이라. 바다에는 슬픔이 있고 고요함이 없도다. 23)
Concerning Damascus, Hamath is confounded, and Arpad: for they have heard evil tidings: they are fainthearted; there is sorrow on the sea; it cannot be quiet. 23)
남쪽의 에돔에서 드단까지 언급하시고 다시 북쪽인 시리아를 언급하시고 있습니다. 바다 근처의 시리아 성읍들이라 그들의 멸망의 슬픔이 바다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조선의 역사에는 을씨년 스럽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을사조약체결의 해인 을사년의 조선의 멸망 풍경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위의 지도에 앗수르는 바빌론이 강대해지기 이전입니다.
https://youtu.be/UB4OKEYqCCc
귀에 익은 팝송이 예레미야서의 내용이라는 것이 조금 신기합니다.
rivers of Babylon은 유프라테스강과 티크리스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끌려간 유대인들이 노예생활을 하며, 그 강가에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가사의 내용이 회개보다는 자신들의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이 천년이 지난 지금도 요하난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에 zion을 그리워하며 다시 힘을 되찾아야 한다는 가사는 고집이 세도 너무 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미국 대중문화를 장악한 일루미나티들의 영향력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을 바빌론을 끌고간 것은 사탄(wicked)이 아니라 범죄한 유대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다마스커스가 유약해져서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니 두려움이 그녀에게 엄습하고, 고통과 슬픔이 마치 진통하는 여인처럼 그녀를 붙들었도다. 24)
Damascus is waxed feeble, and turneth herself to flee, and fear hath seized on her: anguish and sorrows have taken her, as a woman in travail. 24)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은 두려움에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도망치려고 하면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를 해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천오백년전의 시리아의 성읍에도 적용이되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때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구원 구속이 가까워지는 일이며, 우리가 기다리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두려워하여 대비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독교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을 왜 우리 자신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일까요?
역사는 반복되어 일어날 것이며, 우리는 박해와 순교를 뛰어넘는 부활과 구원을 이 땅의 것들보다 소망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우리는 항상 되돌아봐야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의 블로그에 교황에 대해서 오해하는 내용이 있어 지적하였더니 댓글로 사람이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같아서 스스로 믿음을 점검하라고 댓글을 달았더니 자신의 블로그에서 제가 쓴 댓글과 자신의 댓글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이처럼 형식의 믿음의 열매로는 우리를 증거해주지 못합니다. 본질의 믿음만이 그 열매를 증거해줄 것입니다.
찬양의 성읍, 내 기쁨의 성읍이 어찌 남아 있지 않게 되었는가! 25)
How is the city of praise not left, the city of my joy! 25)
찬양의 성읍, 하나님의 기쁨의 성읍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형식의 믿음은 변하지 않을 수 있어도 본질의 믿음은 변합니다.
시리아의 성읍들이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다르게 하나님의 기쁨인 찬양의 성읍들이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찬양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도 시리아의 성읍들처럼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체성이 변하는 것은 나쁜 쪽도 있지만 좋은 쪽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낙관도, 절망도 유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의 청년들이 그 거리에서 쓰러질 것이요, 모든 전사들은 그 날에 끊기리라.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26)
Therefore her young men shall fall in her streets, and all the men of war shall be cut off in that days, saith the LORD of hosts. 26)
내가 다마스커스의 성벽에 불을 붙이리니 그 불이 벤하닷의 궁들을 사르리라. 27)
And I will kindle a fire in the wall of Damascus, and it shall consume the palaces of Ben-hadad. 27)
벤하닷은 지명이 아니라 시리아의 왕이름으로 시리아의 궁전을 의미합니다. 위의 팝송의 가사와 반대로 벤하닷의 궁들을 사르시고, 바빌론으로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하여 잘못된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교정할 수 없게 됩니다. 팝송의 가사는 사탄의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신이라는 비극도 일루미나티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우리들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5G와 캠트레일도 우리의 이웃들이 타협하고, 속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많은 건물주들이 자신의 옥상에 임대료를 위하여 이웃들을 향하여 무서운 공격을 허락하고 동참하고 있는 것이고, 항공사들과 기장들, 정비사들이 캠트레일을 설치하고 뿌리는 일을 하고 급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몰랐다고 해도 그것은 무지의 소치이고, 비극입니다.
우리 이웃들의 이러한 무지와 이기적인 모습은 결국 바빌론과 같은 재앙이 우리에게 허락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