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일 [수호천사 기념일]
마태오 18,1-5.10
수호천사가 있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보통 수호천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추석에 박스를 나르다 눈 주위를 조금 다쳤습니다.
수호천사가 있었다면 다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실 수호천사가 있어서 보호받는 것보다 보호받지 못한다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수호천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믿거나 안 믿거나 우리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만약 배우자를 믿는다면 배우자가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증거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냥 믿는 게 속 편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만약 의심한다면 배우자가 정말 자신을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피우고 있더라도 믿어버리면 언젠가는 그 믿음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믿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저도 넘어져 박스에 눈 주위가 긁혀서 피가 날 때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오랜만에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기분 나쁜 상태로 가면 무엇이 좋을까요?
사람들은 분명 눈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져서 다친 것은 다행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다행이라고 믿는 게 속 편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피를 닦으면서 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 날 한가위 미사를 할 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붓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사를 할 수 있을 정도만 다쳐서 좋았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게 더 좋으니까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좋은 것을 바라지 않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호천사를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먼저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대전교구 신리 성지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순교 성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순교미술관’은 순교자들을 주제로 한 작품만을 전시한 특별한 곳입니다.
이종상 화백(요셉, 1938~ )이 3년에 걸쳐서 그린 13점의 대형 순교기록화와 5점의 성인화가 상설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종상 화백은 5천 원권 지폐에 들어간 율곡 이이 초상화나 5만 원권 신사임당을 그린 분입니다. 그러니까 손바닥만 한 그림을 그려도 수억 원에 달하는 그림을 그리는 분입니다.
그분이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3년 동안 그린 그림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에서 보는 그림은 사실 원본이 아닙니다.
원본은 워낙 가치가 높기에 금고에 따로 보관한다고 합니다.
그 금고는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수 제작된 것이고 유지비도 적지 않게 든다고 합니다.
정말 귀중한 것을 맡길 때 자기 작품이 망가지지 않게 그러한 정도의 금고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금고 안에 있는 원본의 그림이 비록 혼자 방치되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됩니다.
나에게 수호천사가 붙어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기에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여기면 절대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믿게 해야 합니다.
수호천사를 믿으면 나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될까요? 나에게도 수호천사를 붙여주셔서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믿을 수 있게 하셨다면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수호천사를 믿어 자존감을 가졌다면 다른 피조물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조그만 녀석이 돈을 달라고 까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놈을 우습게 보고 까불지 말라고 꼴 밤을 한 방 먹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자기가 아는 형들을 몇 명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저는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어린아이를 보아도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것은 수호천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호천사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수호천사에게 이것저것 청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 쉽게 믿어집니다.
저도 주일학교 교사 할 때 한 아이를 야단치고는 겁이 나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믿으려면 먼저 왜 믿는 게 좋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고 그다음에는 믿고 대화를 나누며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 2일 [수호천사 기념일]
마태오 18,1-5.10
수호천사는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에 절대 공감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나마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하는, 좀 더 살맛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어떤 흐름, 다시 말해서 영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신 하느님께서 따뜻한 시선으로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청춘이신 성령께서 우리 삶 한 가운데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며,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위로자이신 성모님께서 상처 투성이인 우리네 인생 여정에 자상한 어머니로서 늘 동반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존재, 수호천사들이 항상 우리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길을 걸어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특급 도우미로서,
수호천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수호천사의 존재를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 집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들로 인해, 시절이 하수상하니,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집나서기도 걱정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호천사란 존재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요 위로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아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들의 존재를 굳게 믿으며, 그분들의 존재에 대한 깊은 감사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일상 생활 안에서 얼마나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 삶은 좀 더 진실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좀 더 거룩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와 가장 가까이 몸붙여 살아가는 사람들, 가족, 친지, 형제, 동료들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신 수호 천사들입니다.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 힘이 되어 주라고 엮어주신 수호천사 말입니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수호천사는 마치 내가 직접 고용한 사설 경호원처럼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를 밀착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육적인 삶에 너무 푹 빠져 살아가다보니,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우리의 수호천사들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영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너무 인간적·지상적 삶의 방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또 다른 방식의 세계와 존재, 삶에 대한 감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오 복음 18장 3~4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일 [수호천사 기념일]
복음: 마태 18,1-5.10: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파견되어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명이 있는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10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라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제자들처럼 자신을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겸손을 촉구하신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4절).
예수께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5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앞의 내용, 즉 겸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마태오는 여기에 수록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만큼 낮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으므로 여기에 수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10절)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주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여기서는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토비 5,6-7.22; 사도 12,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기”(10절)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를 업신여김으로써 또한 그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까지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로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