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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낮추며 높이는 사랑.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1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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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8 04:54
- 낮추며 높이는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면
종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 신분 상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종이라는 말씀이고,
친구가 된다 해도 종이 아닌 것은 아니며,
그것을 모르고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된 데는 주님의 낮추심이 먼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위해 당신을 세상에 낮추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이 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당신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되는 신분 파괴가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는 신분 파괴가 있고,
우리의 신분 상승이 있다면 주님의 신분 하강이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낮추심으로 우리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낮추시며 높이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쭐하지 말아야 하고,
주님께서 높여주시도록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사도들처럼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런데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우리 서로도 이렇게 겸손하게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이룰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낮추면 그도 낮추고,
내가 그를 높이면 그도 나를 높이고,
내가 그를 높이기 위해 나를 낮추면 그도 나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먼저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를 높이신 것처럼
우리도 내가 먼저 나를 낮춤으로써 이웃을 높이는 사랑을 할 때
사랑에 있어서 주님과 동격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에 있어서
우리가 신화(神化)되고 동격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가 신이 되고 동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모두 깨닫고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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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나는 내 사랑하는 이의 것이요, 내 사랑하는 이는 나의 것이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만, 사랑만은 그 자체로 이유가 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나는 내 사랑하는 이의 것이요, 내 사랑하는 이는 나의 것이다.
2026년 5월 7일 목요일
제임스 핀리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가 강조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제가 수도원에 있을 때, 성 베르나르도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성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가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Amo quia amo" —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또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만, 사랑만은 그 자체로 이유다." [1]
분명히 이것은 아가서의 연인들이 가진 동기입니다. 사랑은 그들의 유일한 이유이며, 유일한 보상입니다. 제가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의 사건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곧,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는 자기 내어줌의 행위 안에서 자신을 쏟아내고, 비우고, 선물로 내어주고 계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존재라는 선물과 기적 안에, 타인의 존재와 만물 안에, 그리고 그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무(無) 안에 친밀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우리의 근원이요, 우리의 기초이며, 우리의 지속되는 현실이고, 우리의 궁극적 목적지입니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실재의 본질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사실상 덧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2]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인정했습니다. 곧, 형제적 사랑—형제자매를 향한 사랑, 부모가 자녀를 향한 사랑, 자녀가 부모를 향한 사랑, 그리고 친구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혼인의 사랑"은 독특합니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서로를 완전히 내어주기로 선택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하며, 곁에 머무는 사랑입니다.
그들의 혼인의 결합은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주고받는 사랑을 육체 안에서 기념하는 성사적이고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곧, 혼인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의 표징이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아가서에 묘사된 혼인의 사랑을 최고의 사랑으로 보았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처럼,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도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십니다.
"혼인의 신비주의"란 곧 하느님과 혼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혼인하시기를 원하시며, 그 사랑의 입맞춤 안에서, 궁극적이고 지고하며 최고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3] 성 베르나르도는 파스칼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가서를 묵상하면서 마음의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주는 언어와 비유를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을 때 감동을 받는 이유는, 베르나르도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표현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라는 사실입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CAC가 모든 신앙 전통의 지혜를 존중한다는 사실이 참 기쁩니다. 동양 영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제 자신의 가톨릭 신비 전통과 아름다운 관상(관상기도)의 실천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년 전 동양식 명상 수행을 시작하면서, 마침내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저서와 제임스 핀리의 팟캐스트 “Turning to the Mystics”(신비주의자들에게 주목하기)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요가와 다른 명상 수행에는 참으로 귀한 가치가 담겨 있으며, 그것들은 제 가톨릭 신앙에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지혜가 없었다면, 저는 이러한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Suzanne L.
References
[1] James Finley, paraphrase. See Bernard of Clairvaux,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vol. 4, trans. Irene Edmonds (Cistercian Publications, 1980), sermon 83.
[2] James Finley and Mirabai Starr with Michael Petrow, “The Song of Love Lost and Found,” The Living School: Essentials of Engaged Contempl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5.
[3] Blaise Pascal, Pensées, trans. W. F. Trotter (P.F. Collier, 1910), no. 277.
[4] James Finley, “I Am My Beloved’s,”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im MacKinn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Canad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사랑의 시선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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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그릇은 사랑으로 넓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아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신이 성부의 완전한 계시라는 말씀이고, 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온전히 접근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기에 그 무한한 계시를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전해주신 진리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서서히... 우리는 그 진리 안에서 완전한 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목마를 때 우리는 한 잔의 물을 마십니다. 아주 목마르면 여러 잔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양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무한한 바다와 같습니다. 그분은 단지 한 잔이나 몇 잔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다 전체를 내어주십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과 우리 에고의 욕심으로 인해 그 은총을 다 받아들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끈기 있게 은총을 내어 주시면서 우리가 이 은총의 바다에 들어서기를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목표는 은총의 "한 모금"이나 "한 잔"에 머물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끊임없이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은 평생을 통해 이 길을 걸었습니다. 더 많은 은총을 받을수록 그들의 영혼은 더 넓어졌고, 그릇이 커질수록 더 많은 은총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내면의 성(城)"의 여러 저택을 거쳐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속적 집착에서 벗어나 영혼을 정화할 때 은총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히 사랑의 덕을 통해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확장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혼 안에 은총이 머무는 한, 그 영혼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늘 나라의 현실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의 정도는 이 땅에서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얼마나 넓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 그릇은 사랑으로 넓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곧, 사랑의 덕은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원천일 뿐 아니라 모범이십니다.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의 선택은 우리가 따라야 할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희생적 사랑은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기심으로 기울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낫다." "섬김을 받는 것이 섬기는 것보다 낫다." "남보다 자신을 먼저 챙기는 것이 더 낫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이러한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안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유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 안에서 발견됩니다.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당부하신 말씀,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현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해 삶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는 곧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참된 필요를 헤아리며,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오늘,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의 바다가 우리 삶에 흘러드는 것을 묵상해 봅시다! 어떤 이기심이나 두려움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두신 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성장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며 성부께 들은 모든 것을 나누어주신 예수님을 더 가까이서 바라보고 따라가기 위해 정성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기억합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할수록 우리 영혼은 넓어지고, 그 넓어진 영혼은 더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신 분께서 우리 영혼의 그릇을 넓혀 주실 것이니 우리는 안심하고 그분의 섭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도록 합시다!
무한한 사랑이신 주님, 당신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지만, 그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받아들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제 영혼을 자비의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제가 당신의 영원한 영광을 더 깊이 나눌 뿐 아니라, 제 안에 심어주신 사랑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당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 저를 희생적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어, 당신께서 저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것처럼 저도 다른 이들을 위해 제 삶을 나누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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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리고 아들과 제자들 간의 사랑이, 이제 제자들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시사해줍니다. 곧 타인은 나의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동반자로 짝 지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는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얼마 후, 그 사랑을 직접 십자가에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께서 손수 보여주실 바로 그 사랑, “가장 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대체 ‘친구’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예수님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이요, 또 하나는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친구 되는 조건은 주인이 하는 일, 곧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이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 친구가 되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알게 된 까닭에 예수님과도 그리고 우리 서로 간에도 친구입니다.
한편,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로 타인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놓을 때라야 친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5,16)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시고, 벗으로 선택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 곧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한’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의 호소를 듣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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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4년 2월 13일에 뉴욕에서 달라스로 왔습니다. 직책도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에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본당 신부로 바뀌었습니다. 2027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건축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건축 위원회에서는 사제관 신축, 친교실 확장과 같은 목표를 세웠습니다. 본당 교우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고, 사제관 신축과 친교실 확장이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친교실 확장은 관세로 인한 비용이 늘어나서 보류하고, 사제관 신축을 먼저 하기로 했습니다. 사제관은 성당 밖에 있는데 그것을 매각하면 비용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 위원회 위원장이 타주로 직장을 옮겨야 해서 위원장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다음에 선출된 위원장이 새롭게 사제관 신축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요구하는 상황을 파악하였고, 지금 사제관의 시세를 파악하였습니다. 이제 시티의 허락을 구하면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본당 설립 50주년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은총의 50년, 희망의 50년’이라는 주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고, 50주년을 맞으면서 본당의 역사를 담아낼 책자도 만들기로 했습니다. 비용 마련을 위해서 물품 판매도 준비하고 있고, 계좌를 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50주년 준비 위원회 위원장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선출된 위원장이 의욕을 가지고 다시 50주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2024년 사목회를 구성하면서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임기를 2년이지만 3년으로 연장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해 준 사목회는 고심 끝에 일 년을 더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심에 감사드렸습니다. 함께해서 행복했다고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목회가 1년 더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과 계율이라는 의자를 과감하게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내린 결정은 당시 이방인들도 거부감 없이 지킬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에 전래된 교회는 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 천국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한국인들이 오랜 전통으로 이어왔던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는 한국의 초대교회가 박해받는 큰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훗날 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한국의 오랜 전통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좋은 글이 읽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줍니다. 참된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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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 친구!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께서 얼마나 파격적이신지!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과거 종이나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전부였습니다. 생사여탈을 쥐고 있었으며 여차하면 마치 물건이나 동물처럼 매매나 양도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 시장이 서면 노예가 필요한 사람은 매물로 나온 노예를 샅샅이 훑어봅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말입니다. 입도 벌려서 치아 상태가 양호한지? 옷을 벗겨서 몸 상태는 괜찮은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분을 종에서 친구로 승격시켜주셨습니다. 죽을 운명을 지닌 비참한 존재에서 구세주 하느님의 친구로 영원한 생명을 확보한 위대한 존재로 우리 위치를 격상시켜주셨습니다.
‘친구’란 단어처럼 듣기 좋고 편안한 단어가 다시 또 있을까요?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란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는 사람, 아무런 말없이 내 흐느낌을 오래도록 기다려주는 사람, 멀리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아도 언제나 존재 자체로 큰 위로가 되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연옥’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 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 하면서 홀로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친구 먹자고 제안하신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분신이자 외아들이십니다. 아니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 결국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이며 한없는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나가는 유명인사 가운데 친구가 한 명 있다면 덩달아 어깨가 으쓱합니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크게 자랑합니다. “그거 알아? 모모 국회의원이 바로 내 초등학교 동창이야.” “이번에 임명된 그 장관 있잖아? 나하고 소꿉장난 친구였어!”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런 친구 두지 못한 것 하나도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즉 하느님 아버지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며 감지덕지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거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에 대한 큰 자긍심을 지니며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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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12–1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 벗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리고 이어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벗이라고 부른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사랑의 중심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막연한 호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 주신 방식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상대를 살리기 위해 자기 편안함을 넘어서는 사랑,
그리고 마침내
상대를 종이 아니라 벗으로 대하는 사랑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복음을 묵상하며
사랑이야말로 계명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랑은
명령을 넘어서는 은총이며,
계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영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하신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스스로 만든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곧 사랑은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상대를 내 아래에 두지 않으며,
상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고
그 사랑 안에서
그들을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돌봄의 깊은 기준이 있습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이 왜 단순한 친절보다 더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돌봄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존엄을 인정하며
벗처럼 귀히 여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돌봄은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같은 생명을 지닌 사람으로
함께 서 주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큰 위로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연한 표류가 아니라
주님의 선택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목적은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사랑의 열매,
돌봄의 열매,
지속되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회복은 바로 이 열매를 향해 자랍니다.
오늘 성 힐라리오를 기억하며
이 복음은 더욱 깊어집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한 사랑의 친교이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외적인 도덕 규칙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이
우리 삶 안에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 닮음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종처럼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벗처럼 대하고 있는가?
나는 사랑을 말하면서
실은 내 편안함과 내 기준만 지키고 있지 않은가?
나는 누군가를 돌본다고 하면서
그의 존엄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보여 주시며
그 사랑 안에 머물라고 부르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 사랑을 얕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내어 주는 사랑,
벗으로 대하는 사랑,
존엄을 살리는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벗이라 불러 주셨듯이
저도 이웃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시고
돌봄의 사랑 안에서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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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45 추가.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 스승, 형제, 친구, 신랑이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1)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 스승, 형제, 친구, 신랑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생살여탈권’을 포함해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구원의 길’을 당신이 먼저 앞장서 가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스승’이신 분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사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6-17ㄷ).”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친구’ 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약혼자’로 표현했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형제, 친구, 신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완전히 하나로 결합하고 일치할 때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에서 ‘계명’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하게 되는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실천해야 하는 명령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억지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당부’하셨고, ‘호소’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13절,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에서 ‘목숨’은 ‘모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일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14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라는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여라.”, 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명령’이라는 말과 17절에 있는 ‘명령’이라는 말은, 12절의 ‘계명’을 가리키는 말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분의 당부이고 호소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를 ‘벗’으로 사랑한다.”,
또는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벗’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대등한’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3)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예처럼 할 것인가? 자유인으로서 할 것인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할 것인가? 사랑하니까 기쁨으로 할 것인가?
사실 ‘사랑’도, ‘기쁨’도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먼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사랑받기를 원하는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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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8. 부활 제5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40 추가.
요한 15,12-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라면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나와 상대방 모두를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는 참된 사랑을 해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을지라도, 아무나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상대방을 위해 양보하거나 희생할 줄 알아야 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사랑을 말하면서도, 양보하고 배려하며 희생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하기보다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속박하고 집착하며 내 뜻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사랑이 깨져버리고 난 다음에야 뒤늦게 후회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하시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짧은 말씀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어디에서부터 우러나왔는지 그 근원이, 그리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마저 내어주셔야 했지요. 그분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가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힘으로 변화되어 당신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마음과 방식으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우리’를 생각하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마음이 깊어지면 내가 받고자 하는대로 상대방을 대하게 되지요. 즉 내가 싫어하는 건 상대방에게도 안하도록 조심하고, 내가 원하는 건 상대도 원한다는 뜻이니 먼저 받으려고만 하기보다 내가 먼저 베풀줄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이 점점 더 깊어져 완성에 가까워지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주님은 당신이 우리를 그 정도로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처럼, 대가를 바라며 당신 뜻과 계명을 억지로, 마지못해 실천해서 스스로를 불행한 ‘종’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성경 묵상을 통해 당신 뜻을 헤아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헤아린 뜻을 기꺼이, 기쁘게 실천함으로써, 당신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는 좋은 ‘친구’가 되자고 하십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좋은 친구가 되자고 먼저 손까지 내밀어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손을 붙잡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이웃 형제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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