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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윤봉길의 아내가 된 불행
배용순 (윤봉길 의사의 아내)
나는 열여섯 살에 혼인하여 스물여섯 살에 남편을 잃었다.
내 남편은 윤 우의라는 분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보통 윤 봉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봉길'은 어릴 적에 부르던 별명이었던 모양인데 남편이 그 이름을 좋아하여 붙여지게 된 것 같다.
우리는 남편의 고향이자 내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같은 마을 사람의 중매로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때에 남편의 나이가 열다섯살이었으니 나보다 한살이 아래인 셈이다.
시가는 뼈대 있는 파평 윤씨 집안이긴 했지만
윗대에 별로 큰 벼슬을 지낸 분이 없이 그저 먹고살 만큼 땅을 갖고 농사를 지었다.
남편은 맏아들이었다. 시어머니가 생산을 많이 하셔서 시동생과 시누이가 많았다.
남편은 나와 혼인할 그즈음에 성 주록이라는 지조있는
선비가 가르치는 '오치 서숙'이라는 글방에 나가 한문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종일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인지 혼인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나는 남편의 얼굴초자 잘 모를 만큼 심하게 내외를 했다.
남편, 또한 내게 변변히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남들은 남편의 성질이 괄괄하고 사나와서 삵괭이 같다고 하여
'살가지' 란 별명조차 붙였다지만 내겐 도무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 손님 보듯이 서먹서먹하게 지내면서도, 용케 아이를 배스리고 낳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말 몇 마디쯤 나누게 되었다.
남편은 저녁에 돌아오면 때때로 내게 한글로 적힌 책들을 읽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남편에게 핀잔을 받기도 했다.
늘 밖에서만 지내고 저녁에 들어와서 옷이나 갈아입고 나갈 때에 잠깐 얼굴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던
우리 사이에 무슨 대단한 부부애가 있었을까만 그대로 남편은 나를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언젠가 집안에 송사가 생겨서 남편이 서울엘 다녀왔었는데 그때에 내게 법단 댕기 한 감을 사다 주었다.
그나마 내 것만 사 오기가 쑥스러웠던지 시누이에게도 꽃고무신 한 켤레를 사다 주었다.
그 댕기는 내가 남편에게 받은 단 하나뿐인 선물이었다.
오치 서숙에게서 한문 공부를 끝낸 때가 남편 나이 열아홉 살 때쯤이었을 게다.
나중에 들은 얘기에 따르면 성 주록 선생이 그로서는
남편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글방을 떠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 매헌이란 아호까지 지어 주었던 모양이다.
글방엘 나가지 않게 되자 그는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동네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쳤다.
나는 밤늦게 사랑에서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길쌈을 했다.
내게 곰살스러운 남편이 되지는 못했을망정
스무 살 남짓한 나이로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남편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때에 이미 자기 나름의 큰 뜻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이따금 서울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주어 보내서 헌책들을 사다가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자기의 뜻을 펴는 데에는 글방에서 배운 한문보다는 새 학문이 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헌 잡지와 날짜가 지난 신문들까지 구해다 낱낱이 읽고는
깊이 생각에 잠기는 남편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그즈음에 아마 광주 학생 사건이 터졌을 게다.
나는 그 사건을 잘 모르지만 다만 남편이 자주 밖에서 자고 들어오던 것만 기억한다.
그때에 일본 사람들의 곡식 공출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악랄했다.
남편은 본디 대식가였다. 칼국수는 서너 그릇을 먹어야 했고 밥도 두어 그릇은 넉근히 먹었다.
내가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의 밥그릇에 밥을 수북이 뜨는 것 밖에 없었는데도
남편은 늘 내게 자기의 밥그릇을 줄여서 양식을 아끼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에게 끼니조차 푼푼히 들게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왔다.
그럭저럭 우리는 칠 년을 함께 살며 남매를 두었다.
행복이니 뭐니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저 남 살듯이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혼인한 지 팔 년째 되던 해 이른 봄이었다.
한 번은 누이의 남편감을 선보러 간다면서 아침을 먹고 외관까지 하고 나가던
남편이 웬일인지 다시 돌아오더니 부엌문 앞에 우뚝 섰다.
나는 설겆이를 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어물어물하더니 찬물을 좀 달라고 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찬물 한 그릇을 떠서 상 위에다가 놓았다.
그때에 부엌에는 시누이가 함께 설겆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만 떠서 주고 얼른 돌아서서 하던 설겆이를 계속했다.
그런데 시누이 이야기로는 남편은 그 물을 먹지도 않고 그냥 우두커니 섰다가 나갔다고 했다.
남편이 시누이의 남편감을 선보러 간다고 나간 지 며칠이 지나서야
집에서는 그가 중국의 상하이로 떠난 줄 알게 되었다.
선보러 간다는 말은 핑계였던 것이다.
나는 그때에 세 번째 아이를 배고 있었고 낳을 날이 멀지 않았었다.
남편인들 만삭인 나를 두고 가기가 쉬웠을까만,
이미 자기의 뜻을 펼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마음을 다져 먹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한번 마음먹으면 언젠가는 떠나고야 말 사람이었다.
나는 남편의 떠남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자기가 떠난다는 사실을
찬물 한 그릇 달라는 식으로라도 내게 알려준 것이 고맙게 여겨졌다.
남편은 집을 떠나 중국 청도에 닿자 집으로 편지를 했다.
그는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담이란 이름을 지어 보냈다.
남편은 세 살 먹은 맏아들 모순이 앞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모두가 내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교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나먼 남의 나라 땅에 가서도 내 앞으로 편지를 보내기가 쑥쓰러웠던 모양이다.
" 모순이는 눈물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 가며
불변성의 의지력으로 훈련과 교양을 시킬 어머니가 있지 아니하냐?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보건대 서양으로 만고 영웅 나폴레옹과
고명의 발명가 에디슨,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다.
후일에 따뜻한 악수와 키스로 만나자. "
나는 철 모르는 모순이 앞으로 온 이런 편지를 읽으며 낯을 붉혔다.
그가 나를 맹자의 어머니에 견주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기르고 농사일을 하는 데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남편을 기다리는 일을 잊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청도에서 상하이로 건너갔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났다. 남편은 스물다섯 살이 되었고,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그해 사월 스무아흐렛날이다. 우리 집에 수많은 일본 경찰과 신문 기자들이 몰려왔다.
남편이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 있었던 천장절 기념식에 모인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앞잡이들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 일로 해서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와
일본인 거류민 단장 겸 행정 위원장 카와바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 밖에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일본 사람들이 여럿이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 남편 윤봉길은 자결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챙겨서 방에 들어앉히고 이를 악물었다.
모질게 마음을 다잡아 먹자고 스스로 타일렀다.
정말이지 눈물 한 방울 흘릴 겨를이 없었다.
기자들은 사진기를 내 쪽으로 겨누고 정신없이 눌러 댔고
경찰들은 옆구리에 칼을 철커덕거리며 구둣발로 방마다 들어가서 뒤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날 죽여라. 날 죽여다오" 하고 경찰들에게 악을 썼다.
몇 날 며칠을 끊임없이 경찰과 기자들에게 시달렸다.
기진하다시피 한 시부모들과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 시동생과 시누이들과
내 자식들이 가엾고 가여워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대로 꼬꾸라져 죽어 버리고 싶도록 괴로웠다.
어두운 시절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은 그해 오월 스무닷샛날에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이 '사형'이란 말을 듣고도 조금도 슬프거나 무섭지가 않았다.
사형이 곧 죽음을 이르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남편이 아닌 다른 누구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덤덤하기만 했다.
같은 해 동짓달 중순께에 남편은 상하이로부터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일본 오오사카에 있는 위수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나는 남편을 면회해 보겠다는 '호사스러운 생각' 같은 건 해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면서 어찌어찌 한 달이 지났던 모양이다.
섣달 아흐렛날 오전이었다. 나는 베틀에 앉아서 명주를 짜고 있었다.
씨와 날이 짜여 가는 것을 시름없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립문 앞이 떠 뜰썩했다.
베틀에 앉은 채 내다 보았더니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몰려와 있었다.
남편은 그날 새벽 일곱시 반에 처형당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잠자고 앉아 있었다.
달리 내가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물이라도 나와 주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눈동자의 물기가 마르는지 눈알이 뻑뻑했다.
나는 몇 번이고 '남편'과 '죽음'을 이어보려고 했는데 도무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살아서 나간 사람을 어떻게 보지도 않고 죽었다고 믿으란 말인가?
나는 남편의 애국적인 거사에 힘입어 살아 있었던 게 아니다.
남편이 살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남편이 언젠가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돌아올 것을 믿었기에 살 수 있었다.
남편이 나의 이런 헛된 믿음을 알았던 것일까?
한 번은 아이들을 끼고 얼핏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사립문 앞에 사진기를 멘 사람들이 얼찐거리더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꺼먼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저게 뭘까?" 자세히 보았더니
기념 사진 같은 걸 찍을 때 세워 놓고 찍는 큰 사진기에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뒤집어쓰는 커다란 검은 보자기였다.
그 사람이 보자기를 가져다 방 앞에 딸린 쪽마루에다 놓았다.
나는 무심코 그 보자기를 들춰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속에는 목이 잘린 남편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남편의 얼굴을 보고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참으로 끔찍한 꿈이었다.
남편이 내게 자기가 틀림없이 죽었음을 일깨워 주려고 그런 꿈을 꾸게 했던 것 같았다.
얼마 동안은 그 꿈이 무서워서 남편의 얼굴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나는 다시 남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내려가면 문 앞의 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보며 기다렸다.
내 설움이 처음으로 터진 때는 둘재 아들 담이가 죽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상하이로 가던 해에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던 담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복막염으로 죽었다.
시름시름 앓고 드러누운 담이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는
이미 목숨을 건질 수 없을 만큼 병이 깊어진 뒤였다.
죽어서 누운 담이를 보고서야 나는 소리 내어 울 수가 있었다.
울고 울어도 눈물이 나와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온 몸의 피가 모두 눈으로만 빠져 나오는 것 같았다. 며칠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울었다.
돌아올 남편이라면 그때쯤 돌아와 주어야 마땅하리란 생각을 하며 또 울었다.
이 세상에 세월만한 영험한 약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울다가도 맥 없이 내 곁에 와 앉은 맏아들 모순이를 보면 눈물을 감추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자 모순이를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몸은 추스리고 들로 나가게 되자 일에 지친 탓이었던지 잠시 생각을 잊을 수가 있었다.
세월이 어디로 흘러 갔던지 모르겠다.
남편이 집을 나간지 십오년만에 광복이 되었다.
나는 광복이 그처럼 기쁜 일인지 실감할 수가 없었다.
하루 아침에 우리 집이 여관처럼 사람들로 득시글거리게 된 것이 기쁜 일이라면 모를까,
남편은 광복이 되었다고 다들 돌아오는데 그처럼 기다리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마음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견디며 광복된 그 이듬해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주위에서는 내 머리가 돌아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끊임없이 손님들이 내려 왔다.
김 구 선생님과 김 홍일 장군도 상하이에서 돌아오던 길로 예산으로 내려왔다.
김 구 선생이 내 앞에 와 절을 하는데 민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내 남편이 장한 죽음을 하여 '윤봉길 의사' 로 떠받들리고 있는 만큼
살아 있는 내 몸뚱이가 송구스러워서 어디다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김 구 선생으로부터 남편의 거사 직전의 모습을 꽤 소상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남편은 거사하던 그해 이른 봄에 상하이의 홍코우 근처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일본군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가 박 진 씨의 소개로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이자 한인 교포 단장이던 김 구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해 1월 8일에 이 봉창 선생이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와 했던 남편은 4월 29일에 있을 천장절 기념식전에
폭탄을 던질 것을 결심하고 김 구 선생을 찾아왔더라고 했다.
김 구 선생은 남편의 결심을 기꺼이 받아 들여서 먼저 한인 애국단에 가입시켰다고 했다.
한인 애국단은 달리 조직이 있는 단체가 아니고 임시 정부에서 무력으로 의거를 할 때에
다른 나라에 대한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만의 단체였다.
천장절 기념식장에 오는 사람들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과 일장기만을
가지고 오도록 미리 <상하이 일일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고 했다.
김 구 선생은 비밀 작전 참모격인 김 홍일 장군에게 남편이 가지고 갈
도시락 모양의 폭탄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만들게 했다고 했다.
남편은 만들어진 폭탄으로 던지는 연습을 하며 몹시 기뻐했다고 했다.
거사 이틀 전에 남편은 다시 채소 장사로 가장을 해서 홍코우 공원을 둘러 보고
돌아와서 <신공원에서 답 청하며> 라는 시를 썼고
자기의 약력과 아들 모순과 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김 구 선생에게 맡겼다고 했다.
거사하던 날 아침에는 김 구 선생과 둘이서만 아침을 먹었는데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새 양복과 새 구두로 단장을 하고 택시를 타고 홍코우 공원까지 갔다고 했다.
그날은 보슬비가 내렸다고 했다.
남편은 천장절 기념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침착하게 먼저 물통 모양의 폭탄을 식장의 중앙을 향해 던졌다고 했다.
그리고 곧장 도시락 모양의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이 왜병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고 했다.
나는 김 구 선생의 얘기를 듣고 비로소 남편의 죽음을 어렴풋이나마 믿게 되었다.
김 구 선생의 주선으로 1946년 유월에 남편의 뼈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 봉창 선생과 백 정기 선생의 뼈도 남편 것과 함께 돌아왔다.
박 열 선생과 이 강훈 선생이 남편의 시체를 찾으러 오오사카에 갔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 못하여 애를 썼던 모양이다.
남편은 오오사카 위수 형무소에서 카나자와 육군 형무소로 이감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처형장이 카나자와시의 교외에 있는 미고우시 공병 작업장이었던 것만
알아냈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박 열 선생과 이 강훈 선생은 여러 곳에 수소문을 한 끝에 마침 남편이 수감되어 있을 때에
그 형무소에서 사무를 보던 여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아이 엄마가 되어 있던 그 여사무원은 남편이 죽을 때의 일을 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여사무원의 얘기를 따르면 남편은 처형되기 전에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자기를 화장하지 말고 그대로 매장해 달라고 말했다고 했다.
남편은 다행스럽게도 그의 소원대로 매장되었다고 했다.
그 여자는 묻힌 곳이 어디쯤이란 것까지 기억하여 일러 주었다.
박 열 선생과 이 강훈 선생은 그 여자가 일러준 곳의 펀펀한 땅 위에 세워진
다 썩어가는 나무 십자가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남편은 바로 거기에 묻혀 있더라고 했다.
남편의 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뼈는 태극사에 모셔져 있었다.
나란히 놓인 세개의 흰 상자 가운데에 하나, 그 속에 남편의 뼈가 들었다고 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 상자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되어 돌아올 사람을 십오년이나 기다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슬픔도, 감회도, 눈물마저도 다 새삼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장례식은 화려했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에게 산 사람이 베풀 수 있는 크나큰 너그러움이었던 것 같다.
장례식장이자 장지인 효창공원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늘어서고 군악대는 느리고 어두운 진혼가를 연주했다.
국민장이어서 그랬던지 기나긴 조사와 추도사를 여러 사람이 번갈아 읽었다.
나는 유가족의 자리에 죄인처럼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었다.
살아 있음이 욕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는 그 장례식으로 말미암아 내 남편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이런 날더러 '장한 아낙네' 란 소리를 거침없이 하고
보상이라도 하듯이 이것저것 물질의 도움을 주었다.
김 구 선생은 돌아가기 전까지 모순이를 맡아 주었다.
김 구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그 분의 아들인 김 신 장군이 나와 내 아들의 뒤를 봐 주고 있다.
덕산면 우리 집에는 봄과 가을이면
소풍 온 학생들이 마당 가득히 들어서서 '윤 봉길 의사'를 기렸다.
나는 학생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내 남편의 '장엄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랑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의 동상이 효창 공원에 세워질 때에도 그 자리에 나가기를 꺼려했고
그 밖에도 남편과 관계된 자리에는 되도록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한 불행한 아낙네의 삶에 씌어지는 가당찮은 비단옷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 '털어놓고 하는 말' 출간 이후 1982년에 배용순 여사님은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으셨다
출생 1907년 8월 15일에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열여섯살 때에 한 살 아래인 윤봉길과 결혼.
사망 1988년 7월 10일
윤봉길
출생 1908년 6월 21일 . 충남 예산
사망 1932년 12월 19일
김민기 3(1993) 수록 / 김민기 사-곡 피아노. 신디사이저-김광민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첫댓글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보았네요. 가슴이 먹먹할 따름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여러 일들이 오버랩되어 더 그런가?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살아 있는 자의 부끄러움...
살아 있음이 욕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글 이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걷자님 ^^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이라 옮겨 보았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때 그시절,
여자의 일생을 글로 표현하신 듯합니다.
열사의 아내로써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경이나 감사보다는,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나가서 대의를 행하고 사형을 당한 남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그렇게 십 오년을 기다리다,
결국 백골의 주검으로 돌아온 남편의 죽음 받아들이며,
살아있음이 욕되게 느껴졌다는 배용순 여사님의 고백에
마음이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내 남편의 '장엄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랑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한마디로 배용순 여사님의 가슴 속 깊은 심정이 전 해 지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