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두관의 젊은 시절
1959년 4월 어느날, 경상남도 남해군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 김두관. 그는 가난한 농어민의 아이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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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농사하는 김두관]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김두관 역시 가난했다. 운동화를 신어 보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나와 어렵게 대학을 다녔고, 1987년에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김두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1986년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청주집회는 1987년 직선제개헌쟁취로 이어지는 중요한 집회 중 하나였다.
감옥에서 오랫동안 김두관은 고민하였다. 어떻게 해야 진정 이 사회를 사람다운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김두관의 결론은 ‘지역’이었다. 지역의 뿌리가 튼튼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두관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귀향 후 김두관은 남해 농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88년 민중의당 후보로 13대 총선에 출마하였다. 비록 3천표, 4명 중 3위에 그쳤지만 총선 출마는 지역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김두관은 고향 이어리의 이장을 맡았다.
이장 김두관. 김두관은 이 이력을 가장 자랑스런 이력으로 내세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장이 무어라고, 이력이라고 하노?’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이장은 마을의 일 하나하나를 직접 맡으면서 주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주민들이 무엇을 진정 원하는 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알 수 있었다. 김두관의 오랜 꿈이 이장의 일을 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곧 김두관은 남해에서 <남해신문>을 창간하였다. 소외된 주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지역의 언론이었다. 선후배들의 지원을 받아 ‘군민주’형식으로 신문을 창간하였기 때문에 광고나 촌지 등 외부로부터의 재정에서 자립할 수 있는 신문이었다. 남해신문 사장이 된 김두관은 직접 신문 가지고 배달을 하면서 주민들의 삶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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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신문사 시절 김두관]
남해신문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남해 군민 절반 이상이 구독하였으며, 남해신문은 남해군민들의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신문이 되었다. 기성의 지역 언론들이 관공서 광고나 지역의 토호들이나 기업들에게 기대는 사이, 남해신문은 그 누구의 간섭과 의존을 받지 않고 스스로 남해군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두관은 1995년. 당시 37세의 나이로 남해군수로 당선되었다. 돈도 없고, 조직도 없었지만 김두관의 진정성 있는 활약에 남해군민들이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방자치의 교범이라고 할 수 있는 김두관의 남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2. 김두관의 남해 혁명
김두관이 남해군수로 취임한 직후, 과거 권위주의의 상징인 군수 관사를 헐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민원인 전용 주차장과 느티나무 쉼터를 만들었다. 김두관은 번듯한 관사가 아니라 대대로 살고 있는 허름한 자택에서 출퇴근 하였다.
다음으로 군수실의 한 쪽 벽은 투명한 유리로 바꾸었다. 모든 행정을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투명하게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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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수재임초기 군청앞마당에서 격의없이 즐겁게 노래하는 김두관군수!]
또한 주민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민원을 공개된 장소에서 토론하고, 투명하게 결정하는 ‘민원인 공개 법정 제도’를 실시하였다. 공개법정은 남해군에 일대 혁신을 일고 왔다.
당시 어민들의 생존이 걸린 어장 이설권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였으며, 마을버스 운행 허가권, 마을공동묘지 공원화 시범사업 등 각종 민생현안이 공개법정에서 주민들의 참여와 토론 속에 합리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밖에도 남해군이 발주하는 각종 공사에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주민 공사 감독관제’, 220명 이상의 주민만 요구하면 성립되는 ‘감사 청원제도’ 등을 속속 도입했다.
이제 남해군의 모든 행정 결정은 주민들의 의사와 요구, 토론과 공개된 곳에서의 투명한 처리 없이는 이뤄질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 밖에도 지역언론과 관공서의 부적절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하여 군청 기자실을 폐쇄하였다. 과거 군청 기자실에서는 촌지가 오가고, 그의 대가로 일종의 보도지침이 하달되는 등 지역주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공간이었다.
김두관의 남해 혁명은 끝이 없었다.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조국의 땅에서 쉴 수 있도록 한 ‘독일인 마을’, ‘남해 스포츠 파크’, 번지 점프 이벤트 등을 만들어 남해군이 관광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였다.
김두관의 남해 혁명으로 남해군은 수많은 수상을 하였다. 지자체 각종 평가에서 1위는 당연하고, 환경시범도시 지정, 환경경영대상 등 남해군에 온갖 찬사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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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삶속에 녹아 들어간 김두관
첫댓글 어차피 차기도 원순이형땜에 글렀다... 김두관둬.
이인제,오세훈 서클 가입 추카.
실패 ㅋㅋㅋㅋㅌㅌㅌㅌ
김두관 아깝다 담 대선주자로써 손색이 없는데 이번에 나와서 괜히 야권지지자들한테 실망만 남긴다...
정동영이 2007 대선 때의 모습이 생각난다...정동영 이때의 과오를 씻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나...
물론 좋은 방향으로 정동영은 바껴서 다행이지만 김두관...또한 정동영처럼 바뀔려면 엄청 노력해야 할것이다...
에휴 아깝다...주위에 사람이 그리도 없나...왜이리 상황파악을 못하다니...
정말 안타깝다...2017년 차기 대선주자가 이번에 훅 가다니.........
완전 공감 ,내가 홈피 가서 그렇게 말리는 글을 썼거늘,,,어떤 놈의 꾀임에 빠져가지고,.,,,
딱 그기 까지만 .
두과니의 역할은 여기까지. 더 이상의 효용가치는 없다. 두과니의 상품가치는 두과니가 경남도지사직을 놓은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다.
그렇군요 .... 아 네....
어째든 긍정적으로 보려 합니다... 민주세력의 큰 자산이라 생각합니다...
김전지사님 네거티브 보단 서로 격려하는 경선 부탁드려요...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이런분이 왜 이번에 이리 사사로운 권력욕의 화신이 되셨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직 회복할 기회는 있다고 봅니다. 생즉사, 사즉생... 리틀노무현 답게 모든 것을 던져 진보진영을 구하고, 자신의 차기 위상을 다시 회복하시면 좋겠네요. 김두관 후보님... 지금은 아닙니다. 국민 대부분이 아니라고 하고 있어요.
이 정도 이력가지고 그렇게 잘난줄 알다니....
모르겠다 불의와 싸우고 투쟁하고 감옥을 수십차례가고 그런모습 보여준 분들이 더 멋있다생각이 드는 이유가뭔지
어째든 긍정적으로 보려 합니다. 민주세력의 큰 자산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