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 돌담길 이야기
<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고 할까.>
문득 이 사나운 폭염 속에 덕수궁 돌담길 가로수 잎사귀는 얼마나 익었을까 싶어서 간단히 적어봅니다.
덕수궁 돌담길은 1999년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고,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행정주소는 서울시 중구 정동길입니다. 가을에는 낙엽을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하지요.
그런데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 때문에 기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정동’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 때문에 지어졌습니다. 태조는 강씨의 능을 이곳에 정성스럽게 치장해서 조성했고, 훗날 자신도 이곳에 함께 묻히려 했습니다.
하지만 태조의 꿈은 아들 태종 이방원이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씨의 아들인 방번과 세자 방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정릉을 도성 밖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리고, 아버지 태조의 능은 구리(양주)로 이전합니다. 아버지와 계모 강씨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거죠.
계모에 대한 이방원의 분풀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정릉을 파괴해서 봉분을 완전히 깎아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했고, 정자각은 헐어서 목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 썼습니다.
또 정릉을 조성한 석조물은 청계천 광통교 돌다리를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장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를 만들면서 일부러 정릉의 석조물을 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지요.
아무튼,
가을이면 유난히 더 걷고 싶은 거리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는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게 되었는데요,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이혼하는 부부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1927년, 이 정릉길에 경성재판소가 들어섰습니다. 경성재판소는 해방 후에는 대법원이었다가 1995년에 서초동으로 이전했습니다. 그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개관되었지요.
그러나 경성재판소가 아직 정동에 있던 시절 가정법원 역할을 했는데요,
부부가 이혼 소송을 하기 위해서 법원으로 갈 때 그 길을 걷게 되고, 또는 이혼재판을 마친 후에 버스를 타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부부가 많았답니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배재학교 학생들, 이화학교 학생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는 대한제국 시절에 설립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풋풋한 첫사랑을 시작한 남녀 학생이 함께 이 길을 걷다가 정동교회 앞에 이르면 각자의 학교로 들어가야 했기에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이상, 두 가지 설을 보았는데요, 아무래도 가정법원 때문이라는 설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