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부분 우장춘하면 제일 첫번째로 떠오르는것은 '씨 없는 수박' 일 것이다. 하지만 우장춘은 수박 말고도 다른
업적을 많이 남겼다. 우장춘은 개화파 무인 우범선과
일본인, 사카이 나카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3년, 우범선이 암살된후, 나카는 6살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겼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태어난 애라고
아이들이 괴롭혔다. 그때마다 상처입은 아들을 다독일땐
민들레꽃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덕분에 시련을 이겨내고
한국인 유학생 자격으로 최상의 직업이라 손 꼽히는
도쿄제국대학 농학실학과에 입학했다. 1963년 5월,
우장춘은'종의 합성'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그리고 양배추와 재래종 배추씨앗을
교배해서 서양유채 식물을 만들었고, 염색채 분석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1953년 8월 일본에 있던 우장춘의 어머니, 사카이 나카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우장춘은 아버지의 고향,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던 한국에 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위령제를 원예시험장 강당에서 지냈고,
전국 각지에서 조의금이 전딜되었다. 그는 식수문제로
고민해온 원예시험장내에 우물을 파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란 뜻을 담아 '자유천'이라 지었다.
이후 우장춘은 제주도, 거제도, 등 남부지역에서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산업이 우장춘의 공로이다.
1959년, 십이지궤양 수술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사망 몇시간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 받았다.
수여사실과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줬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장춘의 업적들이 남겨져 있고 자유천도 있는 우장춘 기념관, 한번쯤은 가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우장춘의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였는데 이번 기회에 많이 알게 되었던거 같다.
쉬는날에도 시간 내주신 박애경
해설자님께 정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