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비품
김미연
장마가 시작되면
나는 자주 서늘한 이불속에 잠겨 있었다.
베란다에는
잊고 있어도 잘 크는
화분이 두엇 즈음 되고
촉촉하게 젖은 잎사귀들을 훑다가
빗방울을 움켜쥐면
수북한 물의 카락들이
실금 같은 손금을 꼬옥 껴안은 채로
손목을 타고 흘러 내렸다.
손을 들어 물기 젖은 공중을 잠그면
그렇게
여름은 시작된다.
빗물을 한 모금 머금은 웅덩이를 가르면 그 안에서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나와
한창 초록을 덧칠해 나가는
여름의 숲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
여름을 넘나드는 새들과
덜 닦인 노을을 앞지르는 여름밤의 공기가
옷깃을 흔드는 냄새가 좋았다.
햇빛이 흙냄새를 삼키는 속도로.
우리는 여름과 급격히 친해졌다.
대화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언제쯤 떠날 것인지와
내년에 맞이할 또 다른 여름에 대해서도
밖에서는 한껏 지루해진
축축한 농담들이
둥근 턱을 괴고 흙탕물 속에
뛰어드는 동안
여름은 아직 숲에 심지처럼 박혀있었지만
우리는 여름에게서
서서히
버려지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모호한 밤
낮과 밤을 나누는 기준을 알고 있니?
경계는 짓는 건 누구의 월권일까.
적요寂寥가 빗방울로 다가올 때는
거울 앞에서 함부로 얼굴을 내뱉지 않기
닳아버린 내 가장자리를 들키지도 않기.
낮과 밤의 경계를 딛고 서서
엿보았어,
어둠이 몸 속 구석구석 서서히 나에게 스며들면
가끔 난 시름하고 꾸물거리게 돼.
얇게 잘린 생각들이 얼룩처럼 나의 가장자리 마다 묻어있구나.
밤이 되기 직전을 설명해 봐.
청각은 비릿하고
시각은 물컹해
촉각은 보랏빛이고,
후각은 모호하지
밤을 맞는다는 건
거창하고 아름다운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버틴
견딘,
우리들의 범람.
숭덩숭덩 잘린 햇살 반죽을 모아,무너지는 노을안에 던져보았어
어둠을 굽던 너가 내 경계로 흘러드는 일
그리하여 너와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
이건 적멸일까,탄생일까
바깥쪽임과 동시엔 안쪽이었던 그 날이
뒤틀린,
비틀린,
세계의 문을 열었어.
최초이자 최후였던
그 낱낱의
밤들이 숨죽여 줄 서 있었지.
낮보다는 밤에 스며드는 게 낫겠어.
어둠을 입는 것이 어둠을 잃는 것보다 쉬워 보였거든.
암연에 수몰된 그 하루,
겹겹이 쌓인 페스츄리 같은 표정을 짓던 너를.
그 때 너가 건네 준 그 밤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을까.
난 가끔 모호해져.
프라하의 얼굴
희뿌연 수은등이 듬성듬성 켜있는 동유럽의 작은 시골 마을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체코의 국경 어디쯤이겠지.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프라하로 가는 야간열차에 타고 있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소음과 어스름이 내려앉은 간이역의 풍경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차창 밖으로 봄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아늑한 정적을 오롯이 받아들이게 되는 기차 안에서의 밤이 꿈결처럼 아련하게 지나간다.
드디어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했다.
잿빛의 차가운 날씨일 거라는 동유럽의 이미지를 내내 생각해 왔는데 첫날의 프라하는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입김이 나올 정도의 차디찬 날씨는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도시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회색빛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프라하성을 연결해 주는 까를교를 걸었다. 브룬츠비크와 요한 네포무크 등 여러 성인의 동상이 즐비하게 늘어선 까를교에서 바라보는 블타바 강, 올드타운 브릿지 타워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 바투스 성당과 황금소로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구시가지에는 현재 작동하는 천문시계 중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프라하의 천문시계가 있는데 매 시각 정각이 되면 조그마한 두 개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행진을 하고 죽음을 형상화한 해골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관광객으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튿날부터는 하늘이 개어 해가 쨍했고 하늘은 파랬다.
첫날 봤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둘째 날 프라하의 모습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벚꽃과는 달리 진한 핑크색의 겹벚꽃 나무, 빨간 트램, 그리고 골목 사이사이 자리한 노천카페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활기차 보이고 붉은 지붕의 건물들은 햇빛을 받아 알록달록한 색채를 띠고 있다.
쨍한 날의 프라하 역시 그 도시가 가진 여러 가지 표정 중 한 가지일 것이다.
특히 프라하성에서 바라본 프라하 시내의 전경은 전혀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채도와 명도가 첫날과는 전혀 달라 볼티브강과 프라하 성 시내의 모습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각인된다.
시를 쓰면서 종종 마음속에 생각해 왔던 사물의 이미지를 또 다른 이미지로 확장 시키고 글로 옮길 때, 존재의 다른 이면을 발견할 때의 기쁨이 있다.
프라하의 첫날은 내가 생각했던 동유럽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어 좋았고 이튿날부터는 첫날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와 그 역시 좋았다.
하나의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찾아 글로 옮길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건축물에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이 있듯이 모든 사물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담겨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여러 표정을 발견해 애정 어린 글로 담아내는 것.
프라하의 서로 다른 얼굴 속에서 시에 대한 소중한 한 가지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