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일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둡고, 또 매캐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곳이랍니다. 상점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집 한 채가 없는 그야말로 생명의 냄새가 하나도 없는 곳이죠. 하지만 그 곳에도 그 거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대부분은 오갈 데 없는 부랑자들이지만, 도둑이나 강간범, 또 때로는 살인자들이 세상을 피해 달아나 14번 가로 흘러 들어오기도 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버려진 자들의 안식처'라고 부릅니다.
타지 인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14번 가, 또 그곳에서도 가장 구석 모퉁이에는 오래된 카페 하나가 있습니다. 외벽은 칠이 몽땅 벗겨져 을씨년스럽기 그지없고, 건물 중앙에 위치한 더러운 손잡이가 달린 정문은 그나마 머리를 깊게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곳이 카페라는 것은 정문 바로 위에 위태롭게 달려 있는 사인보드만이 확인해 줄뿐이랍니다. 그리고 사인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The Blues]...
이름만큼이나 우울한 분위기의 이 카페는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서 만약 누군가가 그 카페로 들어와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보고 들어왔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단숨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답니다. 아무튼 뻔한 사람들만 모이는 카페 더 블루스는 오늘도 그 울적한 영업을 시작하는군요.
7시가 되자 카페 더 블루스의 오래된 정문이 음산한 삐걱음을 내며 열리고, 그 열려진 틈으로 늙은 악사의 재즈 연주가 흘러나옵니다. 열려진 문으로 들어온 것은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군요.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싸여져 있습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이 가리고 있어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군요.
이제 여자는 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곳은 카페의 가장 구석 자리로군요. 한번의 두리번거림 없이 저 자리에 앉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녀의 지정석인가 봅니다. '조'가 그녀의 뒤를 따라 왔군요. 아, '조'는 이 카페의 주인입니다. 왜소한 몸집에 뱀 같은 눈을 가진 이 남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14번 가로 오기 전 뭘 했던 사람인지, 가족은 있는지, 하물며 이름은 무엇인지... 어느 하나도 밝혀진 게 없는 신비한 남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는 대신 자신들을 숨겨 놓은 베일을 절대 벗지 않는다... 이것이 14번 가에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규칙이었으니까요.
관점을 다시 조금 전 그 검은 옷의 여인에게로 돌려야겠군요. 오늘의 주인공은 신비의 사나이 '조'가 아니라 어딘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저 여자거든요. 그녀는 '조'가 가져다 준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길다란 한숨을 내쉬는군요. 무슨 사연이 있는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죠.
이런, 여자가 울고 있습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군요. 아마도 그 사연이라는 건 좋지 않은 것인가 봅니다. 그렇게 한참 눈물을 떨구던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머리를 쓸어 올립니다. 어두운 조명에 드디어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군요.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오...
너무 못생겼네요.
너무도 못생겼어요. 쌍꺼풀 없이 작은 눈은 그 두덩이가 어찌나 두꺼운지 썰면 한 접시는 나오겠고, 코는 또 어떤지, 옆에서 보면 불거져 솟은 광대뼈 때문에 낮은 코가 보이질 않는군요. 시컴죽죽한 입술은 윤곽 없이 흐릿했으며, 주걱턱에 또 각마저 잡혀 있으니... 이쯤 되면 완벽한 추녀라 해도 손색이 없겠군요. 신도 너무합니다. 자신의 피조물들을 이다지도 편애하셨다니 말입니다. 모르긴 해도 그녀, 신에게 단단히 미움을 샀나 봅니다.
잠시 흐느낌을 멈춘 그녀는 자신 앞에 놓여진 칵테일 잔을 들어 한번에 들이킵니다. 그리고 힘없이 손을 들어 또 한잔을 주문하는군요. 물론 그때까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잠시 후, 새로운 칵테일 잔으로 교환되고, 늙은 악사의 연주 또한 새로운 곡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만큼은 변함이 없어 보이는군요. 곧 다시 눈물을 흘릴 만큼 말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비참해..."
여자는 그렇게 혼잣말을 해대며 계속 울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나 봅니다. 아무도 자신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조금 잘못된 생각이었군요. 지금까지 그녀를 지켜보던 눈동자 하나가 점점 그 형체를 드러내며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습니다.
"앉아도 될까요?"
여자의 젖은 얼굴은 곧 목소리에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동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지는군요. 하지만 그녀는 곧 잊었다는 듯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고 맙니다.
"불쾌하시지만 않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은 재즈 선율을 따라 조용히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의자를 빼내어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답니다. 희미한 조명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조그마한 램프에 의해 확연히 드러났고, 그 순간 여자는 아... 하고 조그만 탄성을 내질렀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죠.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정말로 잘생긴 얼굴입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와 그 아래로 미끈하게 자리잡은 오똑한 콧날, 단단하게 다물어진 입술, 약간 그을린 듯한 구리 빛 피부,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그의 외모를 서구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 소홀함이 없군요. 게다가 옷차림은 또 어떤지. 온통 명품으로 치장한 그의 모습에는 고급스러운 감각이 줄줄 흐릅니다.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지켜 봐야하는 저 못생긴 여자가 얼마나 당혹스러울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가엾게도 벌써부터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군요.
"여긴 혼자 오셨습니까?"
남자의 녹아드는 듯한 목소리는 여자를 꿈길로 인도하나보군요. 여자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자신의 허벅지를 몇 번 꼬집어봅니다. 거참, 저 여자... 이건 현실이 맞다고 얘기라도 해주고 싶네요.
"카페에 들어오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구요. 아, 이런... 제가 불쾌하게 하고 있습니까?"
순간 여자는 고개를 크게 내젓습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돌발 행동이라 여자 자신도 꽤나 머쓱했나 봅니다. 곧 머리카락 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숙여 버렸거든요.
"안심이군요. 숙녀 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느니 차라리 저 차가운 마론 강에 뛰어드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미소를 짓습니다. 그 미소를 곁눈질로 훔쳐본 그녀의 얼굴이 금새 빨갛게 물들어 버리는군요.
"사실을 얘기하자면, 이 곳에서 당신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몇 번이나 말을 걸고 싶었지만 언제나 슬퍼 보여서요."
"왜 저를..."
"훗... 글쎄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고 한다면 대답이 될까요?"
"네?"
여자의 그 작던 눈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커지는군요.
"왜 당신 같이 근사한 남성이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여자의 얘기를 궁금해하시는 건가요?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전 근사한 남성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도 보잘 것 없는 여자가 아니구요."
"하지만 당신은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전..."
"외모란 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껍데기가 좋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좋을 것이란 생각은 위험하다고 봅니다만."
"위험해도 현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죠. 그 사실이 저로선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말이에요."
여자는 내버려두었던 칵테일 잔이 이제야 보인 듯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하는군요. 아무래도 그녀로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테지요.
"그래... 내게서 듣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가요?"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무슨 얘기든 들려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심호흡을 하고는 입술을 적힙니다. 그건 곧 얘기를 시작할 것이라는 준비 단계로 보여지는군요.
"난 평범한 여잡니다. 그리고 못생겼구요. 혹시 아시나요? 못생기고 평범한 여자가 세상을 견뎌내는 방법을? 그건 마치 타는 갈증에 뜨거운 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답니다. 물은 마셔야 하는데 너무 뜨겁죠. 그걸 마시면 분명 목구멍이든 어디든 화상을 입어 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셔야 해요. 끔찍하지 않으세요?"
"계속하세요."
"난 이 추한 외모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말 다른 여자들 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하며 살아왔어요. 그녀들에게는 간단한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는 죽을힘을 다하도록 강요되어 왔죠.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녀들 보다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 내더라도 실패를 한 그녀들 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아 왔어요. 그건 능력의 문제도 아니었고, 기회의 문제도 아니었답니다. 그건 오로지 당신이 얘기했던 그 껍데기에 관한 문제였어요."
"당신은 못생긴 당신 자신이 싫은 거로군요."
"모두가 싫어하죠. 어느 누구도 나와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아요. 나도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밤새 어울려 춤도 추고 싶어요. 이 버려진 14번 가 따위는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싶었다구요. 가끔은 남자들과 사랑이라는 것도 하고 싶고, 아니,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지극히 평범한 이런 일들이 난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되는 거에요. 왜 그런 건지 말해 볼까요? 그건 내가 너무도 못생겼기 때문이에요. 못생겼기 때문에요..."
여자의 눈가가 다시금 촉촉해 지는군요. 잔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옵니다. 하지만 저 잘생긴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요. 배려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남자는 여자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곳에 웬일이죠? 이 버려진 곳에 올만한 분 같지 않아요."
"그래 보이십니까?"
남자의 작은 미소 하나에도 여자의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습니다.
"네... 이 곳과는 안 어울려요. 당신이라면 다른 곳에서 웃고 있는 게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전 이 곳을 좋아합니다. 이 곳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죠. 그리고 가끔은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구요."
"말도 안돼요. 14번 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구요? 지금 당신을 절 놀리시는군요. 14번 가는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곳이에요. 다시 말해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 쓰레기들이라구요. 비약이 심하다는 표정이군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굳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14번 가는 세상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이 모인 곳, 맞습니다. 그들에겐 현재도 미래도 없죠. 단지 지우고 싶은 과거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잊고 살죠. 하지만!!"
남자의 눈빛이 순간 미묘하게 반짝입니다. 워낙 짧은 순간이라 저 황홀함으로 가득 찬 여인은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지만 말이죠.
"때로는 희망이 없는 자들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있죠. 미래를 준비하고, 꿈꾸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그 어떤 일들을 말입니다."
"전 잘 모르겠군요. 당신이 하는 얘기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이해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 생각이 그렇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자, 제 얘기는 이쯤 하죠. 전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당신에겐 희망이 있습니까?"
희망... 남자가 하는 희망이라는 말에 그녀는 목이 메이는 것 같군요. 한참을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곧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난 엄마를 닮았어요. 피는 못 속인다는 거... 웃기지만 너무도 진리라서 말이에요. 못생긴 우리 엄마는 저처럼 외면당한 채 살다가 비슷한 외모의 아빠를 만나, 그것이 당신 인생의 몫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했죠. 사랑도 없이, 행복도 없이, 그저... 단지 비슷한 처지기 때문에 말이에요. 그리고 자식을 낳아버리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죠. 그런걸 대물림시키다니 말이에요. 정말 멍청한 일 아닌가요?"
여자는 남아 있는 잔을 말끔히 비워 버립니다. 그리고 이번에 손을 든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 쪽이로군요. 손을 올리던 남자에게서는 야릇한 향기가 풍깁니다. 그녀를 취하게 한 것은 알콜인지, 아니면 그의 향기인지...
"하지만 전!!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그리워하고, 또 동경하면서 그렇게 꿈만 꾸고 싶지는 않아요. 전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그들이 먹는 것을 함께 먹고, 그들이 꾸는 꿈을 같이 꾸고 싶어요. 전 절대 이대로 엄마 인생을 살고 싶진 않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돈을 벌고 싶었어요. 이렇게 사는 게 얼굴 때문이라면 뜯어고치면 되니까. 돈을 벌어서 세상에서 가장 용하다는 의사에게 찾아가 제발 내 인생을 바꾸게 해달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요?"
"하지만... 난 조금의 돈이라도 벌 수가 없어요. 아무도 내겐 시급을 주려하지 않으니까. 가난한 내가 돈마저 벌 수 없으니, 이젠 그나마 의지했던 한 가닥 희망 마저 사라져 버린 거에요."
"포기... 했나요?"
"거의요. 아, 아니에요.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포기가 되진 않아요. 그래요. 전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것마저 포기해 버린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는 '조'의 방문에 잠시 멈추는군요. '조'는 익숙한 동작으로 비워진 잔과 새 잔을 교환합니다. '조'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군요. '조' 역시 조금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그에게도 저런 정중한 면이 있다는 게 의외로군요. 아무튼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잠깐의 눈인사를 나눈 뒤 헤어집니다. '조'가 돌아가자 남자의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들립니다.
"당신의 행복에서 가장 큰 문제는 외모 보다 돈이로군요."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그래요, 결론적으로 돈이겠군요. 불행의 원인은 못생긴 얼굴이지만 돈만 있다면 해결이 되는 문제니까..."
언제부턴가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로군요. 이야기하는 시간이 조금씩 더해질수록 그녀는 맞은편의 잘생긴 남자가 편안해지나 봅니다.
"그 문제라면... 어쩌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여자의 작은 눈이 또 우스꽝스럽게 커집니다.
"돈으로 해결이 된다면, 그 돈 문제를 제가 풀어드릴 수 있다는 말씀, 드린 겁니다."
"당신은 여전히 날 놀리시는군요. 당신이 왜?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큰돈을 해결해 준다는 거지요? 그냥 하는 말이라면 이제 그만 두세요. 당신과의 대화는 즐겁지만 이 이상 날 놀리신다면 화를 내겠어요."
순간 남자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립니다. 그는 곧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바짝 다가갑니다. 남자가 다가오자 여자의 심장이 또 뛰기 시작하는군요. 마치 벨 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는 훈련 견처럼 말이죠.
"누군가를 놀리는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리고 전 지금, 충분히 진심입니다."
남자의 말이 워낙에나 단호해서 인지, 아니면 그의 검은 눈동자에 정확하게 맺혀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인지 저 여인, 어느 샌가 남자의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나 봅니다.
"저, 정말 내게 그 일을 해주신다는 건가요? 정말 내게 그 큰돈을 주신다구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수술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제가 지불하죠. 물론 그 후를 대비한 어느 정도의 생활비도 지불할 생각입니다."
"오, 이런 신이시여... 당신은 불쌍한 날 살리기 위해 내려온 천사였군요."
여자의 눈은 또다시 젖어 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조금 전까지의 그것과는 전혀 틀려 보이는군요. 그녀는 정말 행복한 얼굴입니다.
"전 천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물론 자선사업가도 아닙니다."
남자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두꺼운 시거 하나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입니다. 그의 입이 내뿜는 푸른 연기가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일들이 당신에게 무상으로 제공되지는 않을 거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 몫의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할겁니다."
"물론이에요. 나 역시 아무 이유 없이 받는 돈은 싫어요. 뭐든 하겠어요. 내 몫의 그 돈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이든... 말인가요?"
"네, 어떤 일이든!! 평생을 두고 해야할 일이라도 기쁘게 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아니요. 평생이 걸리는 일은 아닙니다.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을 일입니다."
"전 준비가 됐어요. 뭐든, 말씀해 주세요."
순간, 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군요. 남자는 시거를 천천히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연기를 내뱉습니다. 불투명한 연기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립니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어느 돈 많은 분이 그것을 원하고 있죠. 만약 당신이 그 분의 원하는 바를 이뤄 준다면, 당신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 남자는 누굴까요? 지금 그는 여자에게 살인을 교사하고 있군요. 끔찍한 그 짓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할텐데요. 남자의 얼굴에 남은 술을 끼얹어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를 나와야 할텐데요... 그런데 그녀, 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는 거죠? 왜 저 악마의 제안에 흔들리고 있는 거죠?
"... 그 일을 한다면... 내가 그 사람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면... 당신은 날 도와 주실 건가요? 그 돈 많은 분이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건가요?"
"그 점에 있어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대가만 지불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저런... 저러다간 그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군요. 제발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저희는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그 분에게 대가를 지불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할게요."
오, 제발... 어리석은 여인이여, 그 입을 더 이상 열지 마세요.
"하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남자의 표정을 보니 제법 만족한 듯 합니다. 그는 짧아진 시거를 비벼서 끈 후 차분하게 뒷 말을 이어 가는군요.
"규칙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내일 그 일을 진행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분을 위해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음을 확인할 징표로 사라진 그 사람의 오른쪽 눈을 파 오시면 됩니다. 죽은 이에게 두 개의 눈은 사치일 테니까요. 아무튼 그 모든 일들을 성사 시켰을 때, 당신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전 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그럼 이로써 우리의 계약은 성립됐습니다. 이건 당신이 처리할 그 사람에 대한 정보입니다. 실수 없이 처리하신 다음, 우리는 내일 밤 11시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죠. 질문 있습니까?"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내젓자 남자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리고 어디서 생겼는지 검은 중절모를 눈까지 눌러 쓰고는 새로운 시거에 불을 붙입니다. 그의 걸음은 느긋했고, 또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저 어리석은 여자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그녀는 남자가 주고 간 메모지를 손에 꽉 쥔 채 눈을 번뜩입니다.
입구에 다다른 남자를 '조'가 배웅하는군요. 저 잘생긴 남자는 카페 더 블루스를 벗어나기 전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주인에게 말합니다. 굉장히 유쾌한 목소리로 말입니다.
"이것 보게, '조'. 나는 이 곳이 정말 좋다네. 이 곳에 있는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 그들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준단 말일세."
'조'는 웃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도 처음 보는 야릇한 웃음이 번져 있습니다.
자... 드디어 오늘이로군요. 어제의 내일이자 그와 그녀가 다시 만나기로 한 날, 서로에게 대가를 지불할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날, 그리고 약속된 11시가 다 되어 갑니다.
그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추한 외모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지라도 적어도 영혼만은 순결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남자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약속한 일을 후회하고, 또는 그 사람을 죽이려던 순간 그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줬으면 좋겠군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이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는 내면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이제 11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더 블루스의 문이 열리고... 아... 그녀로군요... 어제와 같은 차림, 어제와 같은 자리, 그녀가 왔습니다. 오고야 말았군요. 길게 늘어뜨린 흑발도 그대로고, 고개 숙인 채 걷고 있는 모습도 그대론데...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붉게 물든 그녀의 손입니다...
다른 사람들 일엔 관심이 없던 14번 가의 사람들도 오늘만은 예외로군요. 모두들 그녀의 섬뜩한 모습에 곁눈질을 해댑니다. 드디어 그녀가 자리에 앉고, 여지없이 그녀의 테이블에 물 잔을 올려 주는 '조'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새파랗게 떨리는 목소리...
"저기... 어제 그 분, 저와 함께 있었던 그 분은 아직 인가요?"
'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고는 곧 자리를 떠납니다. 다시 홀로 남겨진 여자는 테이블 밑에 곱게 숨겨 놓은 자신의 손을 올립니다. 그 안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들어 있는 양 조심조심 움직이는군요. 물론 그것이 보석은 아닐 것이란 걸 압니다. 그녀의 두 손에 조심스럽게 담겨져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여자는 다시 한번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가 보군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붉은 손은 곧 그 주먹을 천천히 펼치고 있습니다. 제발... 그만 하세요. 그 손을 펼쳐 전부를 보이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주먹은 모두 펼쳐지고, 그 안에는... 약속한 대가의 것이 틀림없이 들어 있군요. 차라리 신을 원망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모든 죄를 신에게 묻고 싶어요... 저 주인을 잃은 눈동자를 보여주며 그를 원망하고 싶군요.
"이제 됐어. 이제... 후후후후후...."
여자의 눈은 이미 광기로 가득합니다. 그녀는 이제 단지 못생겼던 여자에서 영혼이 썩어버린 추한 괴물로 변해 버렸습니다.
시계는 어느덧 12번의 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테이블에는 여전히 그녀 혼자로군요. 여자는 여전히 손바닥에 올려진 동그란 눈동자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간헐적으로 웃고만 있군요. 남자가 올 시간이 훨씬 지나버렸다는 것은 잊은 채로 말입니다.
시계의 종이 1번을 울리고, 또 2번을 울리도록 여자는 혼자 앉아 웃고 있습니다. 이제 더 블루스에 남은 건 그녀와 신비의 사나이 '조' 뿐입니다. 미니 바 안에서 컵을 닦고 있는 '조'는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군요. 마치 그녀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새벽으로 다가갈수록 여자의 광기로 사로잡힌 눈빛이 기묘하게 흔들립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그녀는 여전히 행복한 미소만은 잃지 않고 있군요. 그녀는... 아주 아주 행복해 보입니다...
시계의 종이 이제 5번을 울립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가 시계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저 가엾은 여인에게만은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나 봅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과 약속을 했던 그 남자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이 다 말입니다.
어둠의 거리 14번 가에도 어느덧 희뿌연 아침이 찾아옵니다. '조'는 카페 입구에 매달려 있는 'OPEN'이라 적혀 있는 메모판을 뒤집은 후, 낡은 사인보드의 조명을 끄는군요.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동안, 우리의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던 그 남자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란 걸 말이죠. 후.......
자, 이제 카페 더 블루스의 오늘 영업은 끝이 났습니다. 지금부터는 '조'가 달콤한 단잠을 즐겨야 할 시간입니다. 그는 카페 구석에 비석처럼 앉아 있는 그녀를 한 번 돌아본 후 미니 바 안에 설치된 좁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탁' 소리와 동시에 멀리서 패트롤카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이렌 소리는 14번 가의 새벽 적막을 뚫고 그녀에게로 점점... 다가옵니다...
어둠의 거리 14번 가는 오늘도 여전히 암울한 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곳 사람들은 여전히 수면을 즐기며, 밤이 되면 하나둘씩 카페 더 블루스로 모입니다. 그들이 더 블루스의 표정 없는 주인에게 술을 주문하면 그는 빠른 동작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쥐어 줍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이 곳만은 여전합니다. 마치 세월이 비켜 가는 공간인 것처럼 말이죠.
더 블루스에 10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낡은 문이 여전히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립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적어도 몇 개월은 족히 지났겠군요, 아무튼 그 친절했던 남잡니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네요. 조금 틀린 것이 있다면 그의 오똑한 코에 걸쳐져 있는 금빛 안경 정도랄까요.
그는 여전히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와 어두운 카페 안을 조금 둘러보고는 미니 바에 앉습니다. 곧 그를 발견한 '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예의 정중한 몸짓으로 인사를 합니다.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군요. 그리고 '조'는 그의 앞에 물 잔을 놓아주는 대신 검지를 뻗어 카페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던 남자는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초라한 차림을 한, 한 사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곧 일어서 그 사내에게로 다가가는군요.
구석에 앉아 홀로 술을 홀짝이는 남자의 얼굴은 검은 물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때가 낀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이 그런 자국들을 남긴 것 같군요. 어딘가... 참 슬퍼 보입니다.
우리의 친절한 미남은 그에게 말을 겁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군요.
"잠시 앉아도 될까요?"
사내는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은 놀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연연할 그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죠.
"제가 술을 한 잔 사도 될까요?"
어느덧 사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버린 그는 환한 미소로 말을 이어갑니다.
"............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오늘도 많은 부랑자들이 어둠의 거리 14번 가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현재도 없고, 꿈꾸는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지우고 싶은 과거만이 존재할 뿐이죠. 언젠가 이 곳을 찾게 된다면 신비의 사나이 '조'와 훤칠한 외모의 친절한 신사가 있는 카페 더 블루스에 한번 들러 보세요. 그들은 당신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 줄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첫댓글 잘은 모르지만 문체가 부드럽다는 느낌이 드네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저 이글읽으면서 왜 머리속에서 막 뭉게구름처럼 그 카페와 조의 모습 그녀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질까여?^^칵테일잔까지....진짜 많이 본데같아여~꿈에서 밨나?^^
ㅡ_ㅡ; 이거 어메이징 스토리.. . 스티븐 스필버그의.. . .
읽으면서 환상특급과 어메이징 스토리가 생각나네요
어메이징 스토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전혀 다른 내용에서 같은 분위기를 느끼신 분들... 천잽니다. ^^;; 꼬리말 주신 분들 감사드리구요, 즐필, 즐독하시길...
오오~문장이 부드럽네요오~^^재밌었습니다!!
오- 이런 글 너무 좋아요 ^^
^^* 잘 읽고 갑니다
훤칠한 외모의 친절한 신사 = 살인청부 브로커 + 사기꾼
우와,,,,문체 너무 부드럽다>ㅁ<잘읽었어요
전개 방식이 너무 맘에 들어요 >_<!! 가끔 개그성까지 적절히 가미 된 이랄까..?(웃긴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느낀건지-_-;;) 굉장히 재미있네요!
잘읽었습니다. 꼭 동화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