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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강화군 여행] 역사 박물관 2편, 조선의 역사 제2의 수도 강화도 편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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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조선시대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나라 고려! 選定君主制[선정군주제], 이자 專制君主制[전제군주제] 국가였던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여 년간 34명의 군주를 거쳐 통치했지만 역시 1392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의한 역성혁명에 의해 신
흥 무인 세력들, 신진사대부 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 씨의 고려를 무너트리고 朝[아침 조] 를 쓰는 해 뜨는 나라 朝鮮[조선]
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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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선은 백관을 도당에 모아두고 국호를 논의해 고려라는 국호를 고집하는 대신 이성계 아버지의 고향인 '和寧[화령]'
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古朝鮮[고조선]' 중에 고자를 뺀 ‘朝鮮[조선]’ 중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大明[대명]에 청하
자, 멸망한 지 1500년이 넘은 고조선을 염두에 두었던 明[명]이 '조선'을 택하여 국호가 확정되었다. 당시 명나라 홍무제 이
야기로는, "조선은 예로부터 고조선의 명칭으로 그 이름이 유래가 깊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朝鮮[조선]을 국호로 사용하게
하였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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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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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역시 이성계가 1392년에 개국하여, 1910년에 경술국치로 멸망할 때까지 약 518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고
결국은 망했다. 결론적이긴 하지만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첫째로 폭정과 사치로 조선 최초 탄핵을 당한
핏빛 군주, 연산군 있었고, 두 번째로 뛰어난 정치력과 패륜이 공존했던 두 얼굴의 군주, 광해군이 있었다. 세 번째로 반정
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무능의 군주, 인조가 그렇고 네 번째로 임진왜란에서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책임
회피형 군주, 선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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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시 昏君[혼군]들이 왕이 되었을 때 나라는 위태로워졌다! 물론 현재도 마찬가지 이긴 하지만….
조선 최초로 탄핵당한 연산군의 광기 와 폭정, 패륜의 낙인을 받은 광해군의 두 얼굴,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인조의 무능,
임진왜란 속에서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의 행적, 그리고 마지막 대원군의 쇄국정책등을 통해 혼군의 過誤[과오]가 주
는 가르침을 우리는 조선의 역사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 혼군들의 무기력함이 결국은 국가의 興亡[흥망]을 갈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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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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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권력의 오만과 몰락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빛이 아닌 그림자를 살펴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값진 교훈
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뜬금없이 왕보다는 奸臣[간신]과 家臣[가신]들이 정치를 하
는가? 하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멀쩡한 국민들의 가슴에 총과 칼을 들이대고 죽이는 유신정권 박정희 시대로 돌아가려는
엉뚱한 생각을 한 군주들이 최근에도 있었으니 이 또한 묵과할 수 없는 昏君[혼군] 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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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나마 다행인 게 陵遲處斬[능지처참]과 剖棺斬屍[부관참시]는 물론이요. 九族[구족]을 멸하지 않았으니 그 후손
들은 천만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조선 말기 甲午改革[갑오개혁] 이후 대부분의 우리나라
역대 군주들은 위의 처벌 대상에 들어 있었으니 당연히 陵遲處斬[능지처참], 剖棺斬屍[부관참시], 九族[구족]을 멸하는
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처벌들을 면했으니 그 자식들이 또다시 대통령을 해 먹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
는 게 우리 대한민국 오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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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山城[강화산성] 서문 瞻華樓[첨화루]: '아름다운 누각을 바라본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
당시 강화 유수였던 민 진원에 의해 세워졌다. 누각의 현판 글씨도 민 진원의 글씨다. 강화산성은 고려 말 몽골과의 화친의
조건으로 허물어졌으나 조선시대 국방 강화를 목적으로 다시 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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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참된 이치, 강화 양명학: 강화학파는 하곡 정제두와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던 조선시
대 학파의 한 갈래이다. 정제두는 말년에 강화도로 들어와 여러 제자를 양성하고 이들과 친족 관계를 맺으며 학문을 승계
하였다.
정제두는 주자학 일색이던 조선 사회에서 양명학의 방법을 학문에 도입하여 특유의 사상적 계보를 보이는 인물이다. 정제
두의 뜻을 잇는 학자들이 강화도에 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강화학파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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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선 역사를 되돌아보면 善君[선군]들도 있었다. 건국 초반에는 태조, 태종, 세종을 중심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고,
특히 세종대왕은 나라의 말인 한글이라는 언어를 만들어 내었고, 과학 기술의 발전과 백성 중심의 정책 등을 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평가된다. 조선 중기에는 사림, 즉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들의 집권과 함께 성리학이 강화
되었고, 이에 따라 붕당의 형성을 통한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권력을 위한 당파 싸움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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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외세의 침략도 시작되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왕조의 존립을 위협한 최대의 전란이었다.
후기로 갈수록 세도가와 외척의 부패가 심해졌고, 민중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일시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조선은 개항을 맞이하게 되고, 다소 험난한 사건을 겪은 이후 결국엔 일본
의 침략으로 인해 결국 국권 피탈[1910년] 이라는 역사적 國恥[국치]라는 비극을 맞으면서 결국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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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1782년 정조는 강화에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설치하였다. 1866년 강화에 상륙한 프랑스 해군은 외규장
각에 보관되어 있던 왕실의례 관련 도서인 의궤와 귀중품을 약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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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차정첩, 순강원상시봉원도감의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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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국치[1.876년]의 시작은 1876년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練武堂[연무당]의 江華條約[강
화조약] 이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역사박물관인 만큼 江華都[강화도]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 보자, 조선의
제2수도 강화도!, 강화도는 국가가 위급할 때 왕실과 조정이 피난하여 전란을 극복하는 안전 보장 처이었으며 내륙으로 문
화와 물자가 드나드는 咽喉[인후(목과 코)]와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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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의 수도인 강화에는 높은 관직인 종2품 [현 중장급(부지사)] 유수가 배치되는 강화 유수부가 있었고, 임금의
거처인 행궁과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설치되었다. 강화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
모 간척 사업으로 풍부한 식량이 확보되었고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조운선이 반드시 거처야 하는 해상관문이자 전략적
국방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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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양헌수: 병인양요(1866) 때는 양현수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우측 어재연: 조선 후기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대 전투에서 미군에 맞서 싸우며 야포 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
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데 미군 수병 제임스 도허티가 찌른 총검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양헌수와 같이 서양의
침입을 받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동생과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무인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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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宮[궁]이 있는 유수부가 있는 만큼 해안가 방어력에 집중을 두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김포와 마주하고 있
는 동쪽 해안은 방어시설인 墩臺[돈대]와 保[보]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그중 잘 알려진 鹽河江[염하강(강화해협)]을 중
심으로 초지진[강화 제7경], 덕진진, 광성보[강화 제6경]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강화 외성을 구성하는 요새의 성벽을 오
르다 보면 폭이 좁지만, 물살이 거칠어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던 江華海峽[강화해협(염하강)]과 김포의 산하가 눈
아래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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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라기보단 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세를 싣고 한양으로 들어가는 주요 루트였을뿐더러 수많은 침략자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이 물길을 따라 강화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다. 참고로 강
화섬 둘레에는 5 개진과 7개의 보 그리고 54개의 돈대가 있다. 섬 전체가 이렇게 하나의 방어시설로 되어있는 곳은 전 세
계에서 唯一無二[유일무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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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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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강화교육: (통제영 학당)과 우:강화의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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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강화의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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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단군 이래 한민족의 기상이 서려 있다. 전해지는 마니산[강화 제5경] 을 지나게 된다. 산의
높이[472.1m]는 오백 미터가 채 되지 않지만, 해수면에서부터 치고 올라야 하기에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여느 명산 못지않게 훌륭하고, 바로 앞에 있는 塹星壇[참성단]에서 영험한 기운을 받으며 浩然之氣[호연
지기]를 마음껏 내뿜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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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참성단은 사적 제136호로 고조선의 창업 군주이자 한민족의 國祖[국조]인 단군에게 봄, 가을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는 곳으로, 민족적 성지로 1천 년이 넘도록 지켜온 石壇[석단]으로 우리 민족의 성지로 꼽힌다. 이제 다시 동쪽 길상면 지
역으로 가면 정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전등사[강화 제1경]를 만날 수 있는데 그 기원이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거
슬러 올라간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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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 弘益人間(홍익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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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이동휘 선생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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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高麗時代[고려시대]로 시계의 흐름을 다시 돌려 보면 이때부터 강화는 수도와 적당히 떨어졌던 이점과 임시수도로
서 소임을 수행되었던 시대도 있었던 만큼 쫓겨난 王[왕]들의 流配地[유배지]와 그들의 宮闕[궁궐]의 흔적을 더러 찾을 수
있다. 또한 강화읍에 이어 강화 남부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길상면 온수리 지역은 답사객이 다닐만한 명소는 물론 읍내 특
유의 정취가 살아있어 잠깐 시간을 내서 들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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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북부로 올라가다 보면 잊고 있던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북쪽으로 올
라가는 초입에는 강화를 대표하는 유적이 있다. 교과서 표지로 자주 등장하는 강화 부근리 고인돌[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이 바로 그것이다. 고인돌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의 전형적인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바로 옆엔 ’강화역
사
박물관‘과 ’강화자연사박물관‘과 함께 하나의 역사 지구를 형성하고 있어 강화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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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옥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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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본섬뿐만 아니라 부속 섬도 각기 개성이 살아 있다. 여러 섬들 중 잘 알려진 석모도와 교동도가 바로 그곳이다.
몇 년 전까지 외포리, 창후리 선착장에서 각기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현재는 각기 강화도 본섬과 다
리로 연결되면서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석모도는 이전부터 해수 관음의 도량 보문사[강화 제2경]의 명성이 꽤 높았
기에 찾는 사람들이 심상치 않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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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갯벌 체험을 즐길 수 있는 민머루 해수욕장과 해수온천이 점차 알려지며 다시금 재조명을 받고 있다. 민통선 북쪽, 북
한과 근접한 교동도는 민통선 내에 있어 몇 번의 검문검색이 까다롭긴 하지만, 이 섬에는 70년대의 정취가 살아있는 대룡
시장이 있어 그 수고스러움을 감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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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옥은 육교적 德目(덕목)에 따라 남녀의 생활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데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한옥은 안방과
사랑방, 누마루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은 안주인이 거처로 집안 살림을 모두 관장하는 공간이며 의류를 보관하는
欌(장)과 籠(농), 책과 문서. 의복 등을 보관하는 반닫이,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과 빗솔 등을 넣어 두는 빗접, 귀중품을 보
관하는 函(함) 등의 가구를 두었다. 사랑방은 주인이 거처하는 방으로 주로 글을 읽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각종
문방 용품과 문서 등을 보관하기 위한 文匣(문갑)과 책상인 書案(서안), 사방탁자, 종이와 붓. 먹을 함께 넣을 수 있는 硯
箱(연상) 등의 가구를 비치하였다. 누마루는 대개 사랑방에 이어서 있는데 집주인이 글을 읽거나 손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
를 나누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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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반닫이, 이중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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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마무리 하자면 강화역사박물관에선 선사시대부터 청동기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근·현대사까지 옛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살펴보며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강화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꾸민 2층에는 주먹도끼, 여러면석기, 가락
바퀴, 돌화살촉, 반달돌칼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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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목 근 현 토기 등 강화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유물도 만난다. 1층은 고려, 조선, 근대 강화도 사람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청자 화분, 청동 다리, 동경, 보상 화문전 등 민속품으로 꾸며졌다. 강화 여행의 지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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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농기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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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역사박물관 찾아가기
*주 소: 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구(지번) 하점면 부근리 350-4 (지번)
*전 화: 032-934-7887
*이용(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1500~2.000원), 유아/노인(70세)무료
-영 업: 09:00~18:00(매표 마감 5시 30분)
*휴 무: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날 당일
-주차 가능(무료), 와이파이 가능, 휠체어접근 가능, 반려동물 동반 불가
*홈: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museum_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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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관람 시 유의 사항
1.박물관 내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2.음식물 반입과 안내견 이외의 애완동물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3.전시실 입장 전에 휴대전화는 전원을 꺼주시거나 진동으로 전환하여 주십시오.
4.전시물에 손을 대거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행위는 삼가 주십시오.
5.전시실 내에서 플래시를 이용한 촬영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6.어린이를 동반한 보호자께서는 어린이의 안전·보호와 관람 질서에 대한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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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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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여행 가이드
*관광 안내소: 032-932-2302.
*강화군청 문화 관광과: 032-930-3568
*관광 통역안내: 1330(24시간 운영)
*한옥관광 안내소: 032)932-5464
*터미널 안내소: 032)93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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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여행 정보는 여기에서 확인 요.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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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8경
#제1경 전등사/. #제2경 보문사/. #제3경 연미정/. #제4경 갑곶돈대/.
#제5경 마니산/. #제6경 광성보/. #제7경 초지진/. #제8경 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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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성곽길, 강화 나들길 도보 여행 시 유의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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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코스를 숙지 후, 시간과 거리를 감안한 자신의 체력에 맞는 여행을 하십시오.
*여러 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위급 시 119나 소리를 내어 주변에 알리도록 합니다.
*해안제방 길에서 밀물과 썰물 및 군사 보호지역 통행시간을 고려하여 여행하십시오.
*해안가 근처에는 폭발물 등의 위험물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강화 나들길 여행시간은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입니다.
*코스 중에는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으니 훼손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중에 주민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할 수 있으니 조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위한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시고, 쓰레기는 반드시 회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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