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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실세 김개시 1편
조선 시대 궁녀들 중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이다.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산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 있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지만,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와 김개시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장녹수와 김개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고,
남겨진 기록에도 모두 요부(妖婦)로 남겨져 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오히려 조선 시대 궁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김개시는 장녹수처럼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광해의 오른팔 궁녀 ‘비선실세’로 주목받았던 개똥이라 불리던 상궁 김개시는 누구인가?
옛날에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단명하지 않고 오래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어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김개시(金介屎)는 ‘개똥’이라는 아명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똥 시(屎)’ 자를 해자(解字)하면, 쌀[米]이 시체[尸]가 되었으니 똥인 것이다.
인분(人糞)의 ‘똥 분(糞)’ 자도 마찬가지다.
쌀[米]이 변했으니[異] 똥이 된 것이다. 한자의 재미있는 묘미다.
김개시는 ‘개똥이’라 불리다가 궁에 들어오면서 한자이름 ‘개시’로 불리게 되고,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가희’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의 기록에는 ‘김가희’보다 ‘김개시’란 이름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왕의 여인이 될 수 있는 첫 번 째 조건은 보통 왕을 유혹할 수 있는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김개시는 이런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시대 궁에 입궐한 궁녀들의 최고의 목표는 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는 것이다.
김개시는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개시는 후궁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다.
후궁의 신분보다는 궁녀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에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왕의 강력한 신임을 얻은 김개시는 상궁에 불과했지만, 어떤 권세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비선실세 김개시 2편
김개시는 어릴 적부터 남달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영특하고 겁이 없었고, 성격이 별났다.
스님 한분이 남자 천 명의 몫을 하고도 남는다면서 큰일을 내고 말 것이라 염려할 정도였고, 화를 막으려면 부처님 전에 귀의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개시는 7살의 어린 나이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 수업을 받았다.
김개시의 영특함은 이 절에 자주 오는 벼슬아치의 눈에 띄어 그의 양녀(養女)가 되었다.
그러다가 선조 때 대궐의 무수리로 들어가고, 세자 광해군 처소의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다.
궁녀 김개시는 ‘못난 외모’ 때문에 처음에는 광해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궁녀 김개시와 광해군의 만남은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해볼 때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후궁인 ‘공빈 김씨’가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장자인 임해군은 무식하고 성질이 난폭해 세자가 될 자질이 부족한 반면, 광해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
세자 책봉에 관한 조정과 민간의 여론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눈치 빠른 김개시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가능성이 임해군보다 크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김개시는 광해군을 극진히 보필했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고뿔(감기)을 앓으면 밤새 곁을 지킬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혈기 왕성하고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광해군은 점점 김개시에게 빠져들었다.
총각 광해군과 처녀 김개시는 자연스레 깊은 관계에 빠져들었으며,
이런 관계는 광해군이 세자가 된 피난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미인은 아니나 빠른 판단력과 명석한 두뇌를 지닌 김개시는 광해군의 정치적 진로에 깊은 조력자가 되게 되었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개시는 세자의 처소에 머물면서 세자와 급기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이루어졌다.
광해군과 김개시의 관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변화를 맞이했다.
선조는 피난길에 오르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중국 명나라로 망명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18세인 광해군을 급하게 왕세자로 책봉한다.
광해군에게 국가의 통치를 맡기고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던 선조의 눈에 김개시가 들어왔다.
당시 김개시는 전장을 누비던 광해군과 떨어져 선조의 피난길에 함께하고 있었다.
선조가 그녀를 눈여겨본 이유는 빼어난 외모 때문이 아니라, 궁녀 김개시가 글을 알고 문서 처리에 능하며 민첩하고 똑똑했기 때문이다.
김개시는 선조의 총애를 받으며 ‘정5품 특별상궁’이 되었다.
이렇게 김개시는 왕세자 광해군부터 왕 선조까지 모시는 ‘특별한 궁녀’가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셈이다.
아들 광해군의 여인이 아버지 선조의 여인으로 둔갑하는 상황이 적군을 앞에 둔 피난처에서 발생한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유교관념이 국정철학이었던 조선왕조에서 김개시가 두 왕의 성은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선조와 광해군은 엄연히 부자지간이라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광해군을 폐위시킨 반정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비선실세 김개시 3편
선조는 김개시가 광해군의 동궁 나인 출신임을 의식하여 후궁의 첩지는 내리지 않았다.
김개시가 선조의 마음을 얻은 것은 훗날 광해군의 즉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녀는 광해군의 여인이면서 선조의 죽음, 광해군의 즉위 그리고 인조반정 과정에 까지 등장하면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선조는 새 중전을 간택하여 19세 된 인목왕후와 51세의 선조가 혼례식을 치렀다.
김개시는 선조의 성은을 입은 몸으로 그의 아들 광해군을 사랑한다는 것이 부질없고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생각하고 여승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으려 하였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뜻을 접은 대신, 광해군의 세자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와 인목대비와의 합방을 막는 등 인목대비가 임신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한다.
인목왕후가 24세 되던 해, 광해군을 눈의 가시로 여기고, 34세 된 광해군을 폐하고 3세 된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고 하는 상황에서 김개시가 광해군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위기를 느낀 김개시는 무언가 결단을 내릴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여 선조에게 약밥을 올렸고, 이를 맛있게 먹은 선조는 급체(急滯)로 사망한다.
그런데 숨을 거둔 선조의 얼굴빛이 검푸른빛이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독을 먹고 죽었을 때에 검푸른빛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장안에는 선조가 누군가에게 독살을 당해서 죽었다는 말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만일 선조가 정말로 독살 당했다면, 선조를 독살할 사람은 광해군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선조는 정비의 아들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것을 많이 후회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이 총애하는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내심적으로 왕세자로 세울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일기》나 《연려실기술》에도 ‘선조가 찹살떡을 먹다가 쓰러졌다’ ‘쓰러진 선조의 몸에는 이상하게도 검푸른 빛이 가득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물론 승자가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기록은 당연히 없지만, 당시 장안에는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루머가 퍼져있었다고 한다.
결국 선조가 57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음으로써, 인목왕후(인목대비)는 겨우 25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3살배기 영창대군과 함께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보호막이 완전 사라져버린 것이다.
광해군의 세자시절에 선조의 후계자자리를 놓고서, 광해군과 인목대비간의 엄청난 갈등과 대립관계를 형성하였지만, 결국 갑작스러운 선조의 병사로 인해서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광해군은 승자가 되었고 인목대비는 패자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광해군은 나이 34세, 세자책봉 16년 만에 15대 임금이 되었다.
비선실세 김개시 4편
김개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제조상궁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버지 선조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여인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광해군은 단지 자신의 여인인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개시는 후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제조상궁(提調尙宮)에 머물렀다.
궁녀 중 가장 우두머리는 '제조상궁'이다. 그 때문에 권세나 권위가 대단해 역사 상 정치의 이면에서 왕을 대신해 눈에 보이지 않는 주역을 맡는 경우도 허다했다.
궁녀 중 가장 고참인 제조상궁은 오직 한사람으로 학식과 영도력은 물론 외모까지 뛰어나야 한다.
제조상궁은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 일을 주관.
재상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어려운 청원이 있으면 먼저 이 제조상궁에게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고도 한다.
심지어 재상과 제조상궁이 의남매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왕권의 그늘에서 권력의 핵심임에 틀림없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자, 김개시는 광해군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게 된다.
나아가 국정에까지 관여하여,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거의 후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지위는 엄연히 상궁에 불과했다.
이는 후궁이 되면 궁 밖 출입이 불가하기 때문에 일부러 상궁 자리에 머무르며 궁 밖 출입을 자유롭게 하면서 정치적 행동을 하려는 계산이었다고도 한다.
그녀는 상궁의 신분으로 광해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권력을 손에 쥐고 그야말로 비선실세로 정권을 농단했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았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씌우기도 했다.
담대하게도 김개시는 앞 못 보는 ‘수련개’라는 궁궐 전속 무당을 이용하여 인목대비를 제거하려 했다.
영창대군의 보모 김상궁과 대비전 시녀들, 그리고 인목대비 아버지의 종 오윤남이 ‘수련개’를 찾아와 임금인 광해군과 중전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고 거짓 누명을 씌웠다.
사실은 김개시가 다른 사람을 변장시켜 ‘수련개’에게 보내 속인 것이다.
그러나 오윤남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혐의를 끝내 부인하다가 죽고,
김상궁과 대비전 시녀들도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평소 인목대비와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아랫사람들에게 많은 은덕을 베푼 결과였다.
김개시는 몇 번 자객을 보내 영창대군을 죽이려 했으나 워낙 방비를 철저히 하였던 터라 번번히 실패했다고 한다.
비선실세 김개시 5편
양반가의 서얼(庶孼) 7명이 은장사를 하는 상인을 죽이고 은을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난을 일으킬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곧 체포되어 심문들 받았는데 박응서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사실을 자백했다.
그러자 포도대장 한희길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도 내통했다는 사실도 자백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므로 자백을 하지 않자 박응서의 늙은 어머니를 끌어다가 모진 매질을 가하게 되고, 결국 박응서는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 내용은........
『7년 동안 거사를 준비했다. 은 상인을 죽이고 빼앗은 은괴(銀塊)로 거사 자금을 만들어 군사 3백명과 힘을 합친 후 대궐을 습격하여 세자를 죽인 뒤 옥새를 빼앗아 인목 대비에게 넘기려 했다.
인목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영창 대군이 성장하면 왕위에 오르게 할 뜻이었다. 총지휘한 사람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역모의 주동자 7명의 서얼은 전부 참수되고, 인목 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은 모두 귀양을 갔다.
인목 대비가 광해군에게 찾아갔지만 광해군은 만나주지 않았다.
중전에게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당시 머리카락은 목숨처럼 귀중했기 때문에 그것을 자른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와 결심이 없이는 못하는 일이었다) 보내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영창대군은 결국 강화 교동으로 보내졌다.
영창대군은 그때 8살이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은 영창대군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으나 대북파는 반대했다.
결국 영창대군은 문에 못을 박아 나오지 못하게 가둔 다음 아궁이에 불을 계속 때서 방안에서 죽게 만들었다.
결국 그 집은 불태워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인목대비는 혼절했다.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사건(咀呪事件: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기도 하였다.
이런 일은 정치적 감각과 술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궁궐 안의 모든 일이 그녀(김개시)의 손에서 이뤄졌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광해군 시대 대북파 영수 이이첨은 ‘공식실세’였고, 궁녀 김개시는 ‘비선실세’(秘線實勢)로서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굳이 권력 서열을 나눠보자면 1위는 광해군, 2위는 김개시, 3위는 이이첨이라 할 만하다.
《인조실록》에는 ‘이이첨이 김씨(김개시)에게 빌붙어’라든가, ‘내외의 크고 작은 벼슬이 모두 김 씨와 협의를 거친 뒤에야 낙점 받았다’는 표현들이 나온다.
광해군 시대 최고의 실세인 이이첨도 국정을 김개시와 먼저 상의할 정도였다.
광해군 역시도 세자 시절부터 함께해 왔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김개시를 이이첨보다 신뢰하였다.
그녀는 매매관직(賣買官職)을 일삼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인사권을 장악했다.
양반들에게 ‘인사 청탁’(人事請託)을 받고 고위 관리부터 말단 관리들의 인사까지 모두 관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엄청난 양의 뇌물을 받으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겼다.
비선실세 김개시 6편
그녀의 권세가 얼마가 높았던지 궁녀들은 뇌물을 바쳐야만 왕과 잠자리를 할 수 있었고,
광해군조차도 그녀가 지목하는 궁녀하고만 합방을 해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보다 더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김개시는 친척 딸의 남편인 ‘정몽필’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고관 뇌물 챙기기와 백성 수탈하기를 맡기며 본격적인 국정 농단과 매관매직 등 악덕 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보다 못한 윤선도·이회 등 충신들은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리며 그녀를 비난하였지만, 김개시를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광해군은 오히려 충신들을 유배 보내어 그들의 바른 소리를 차단하였다.
그녀는 광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친구요. 동지였던 것이다.
광해의 지위는 늘 불안하여 김개시 같은 지략가의 도움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세자 시절부터 궁녀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어느 관료보다 충성심이 강했고, 총명한 두뇌로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업무처리 능력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필해 왔기 때문에 그의 기분을 잘 맞췄다.
광해군은 그런 김개시가 자신의 눈과 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와 신임을 등에 업고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 이이첨과 함께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로 성장한다.
실록에서 김개시는,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시대 최대 악인으로 묘사된 부분이 있다.
《광해군일기》 중 5년 8월11일자에 보면, 이이첨과 김상궁을 비교 평가한 구절이 있다.
그 둘의 비슷한 점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이첨은 영상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김상궁은 후궁의 자리에 욕심을 두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실익은 마음대로 챙긴다는 점을 들고 있다.
첫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며 과격한 역적 토벌론을 일삼는 것.
둘째, 벼슬 욕심을 줄이되 실권을 최대한 갖는 것.
셋째, 악역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그 일에 대한 공은 자신이 차지하는 것.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의 독살에 간여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과 사랑을 보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고, 광해군의 제조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고,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비선실세 김개시 7편
김개시는 특유의 간교한 애교와 아첨으로 선조와 광해군 두 부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서, 두 사람 모두의 총애를 받았다.
권력의 한복판에 서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여장부였다.
김개시는 여우같은 술수를 부려서 선조의 마음을 움직이고, 광해군이 왕의 첩지를 받을 수 있도록 광해군을 도와주었다.
이것 때문에 광해군은 김개시를 총애하게 된 것이며, 왕이 된 후에도 광해군은 김개시를 최측근으로 옆에 두고 정권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감싸줬다고 한다.
김개시는 단순히 광해군의 애인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광해군의 정치적인 참모역할도 했으며, 정치사건에도 크게 관여했다고 한다.
김개시는 영창대군의 참살과 인목대비의 폐위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개시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과 서인들은 광해군과 대북세력을 몰아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18년 인목대비의 유폐를 계기로 반정을 도모하기로 하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반정세력이 왕을 끌어내리려 한다는 소문이 궁궐 안에 퍼졌다.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김개시 역시 반정의 조짐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반정의 주동자 김자점에게 뇌물을 받고 반정 후에 자신의 안위와 권력유지를 조건으로 반정을 묵인해주기로 한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저지른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반인륜적인 처사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거사되었다.
서인인 전 평산부사 이귀와 김자점 등의 반란 모의가 있다고 광해군에게 수많은 상소가 올라왔다.
그중에는 반정자의 이름이 올라온 것도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별일 아닌 것으로 취급하고 무시했다.
김개시가 광해군 곁에서 눈과 귀를 멀게 했기 때문이다.
역모 주모자로 거론된 김자점에 대해 김개시는 “충성스런 신하입니다.
역모를 꾸밀 리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김자점이 김개시에게 뇌물을 바치며 후일을 약속 해주자 김개시가 이를 받아들이고 광해군에게 반란 모의가 헛소문이라 하며 안심시켰다.
광해군은 김개시의 말만 듣고 상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1623년 3월 12일 김개시는 후원에서 술잔치를 벌이고 광해군에게 술을 먹였다.
그 때 이이반이 역모 고변을 했으나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늦장을 부리면서 수습에 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광해군은 반란군이 대궐에 들어온 것을 알고서야 대궐 밖으로 도망가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로 귀양 갔다.
고변한 이이반은 반정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김개시는 새 정권의 공신이라 권력 참여를 기대하였으나 서인들은 반정 성공 다음날 반정의 명분을 위해 그녀를 죽였다.
비선실세 김개시 8편
광해군은 전란 때의 공적과 유연한 실리 외교 때문에 유능한 군주라는 평이 있다.
명나라와 신흥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고 선정(善政)을 베푸는 등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던 광해임금은,
관료들 간의 고질적인 분쟁과 궁녀 김개시의 잘못된 보좌로 인해 서서히 변질되어 결국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저 혼자 살려고 죽자고 도망만 다닌 선조와 달리, 분조를 이끌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고군분투한 광해군의 활약은 역대 어느 세자보다 훌륭했었다.
그러한 광해임금이 조선조에서 두 번째 반정(反正)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광해군은 자기보다 권력과 돈을 더 사랑한 정치 궁녀 김개시에게 철저한 배신을 당한 것이다.
광해군의 은덕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김개시는 이미 반정세력의 쿠테타가 돌이킬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알고서,
광해군을 배신하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인조반정’의 성공 이후에 김개시는 반정세력들에게 결국 참수되었다.
반정세력들은 자신의 주군을 쉽게 배신하는 그녀를 살려둘 가치를 못 느꼈던 것 같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즉위와 폐위에까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반정 후에 광해군은 18년 동안 더 살다가 외롭게 죽었다.
그때 나이 67세, 살만큼 살다가 갔다. 인목대비는 끝까지 광해군을 죽이려 했지만, 번번히 반정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도리어 인목대비가 광해군보다 9년 먼저 죽었다.
《광해군일기》에 김개시의 죽음에 대해 제법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일반 궁녀의 죽음을 기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서인들은 김개시가 반정의 원인을 제공한 주역이라 생각했다.
김개시의 죽음을 실록에 기록해 그들의 반정(反正)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김개시는 인조반정을 묵인한 대가로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처형 1호는 바로 김개시였다. 광해군이 저지른 반인륜적 처사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반정군 세력은 광해군을 반인륜적인 인물로 몰았고, 상궁 김개시를 만행의 중심인물로 몰아 참형에 처한다.
광해군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자발적으로 없애고자 충성을 다한 김개시는 광해군에게는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스스로 비극을 자초했다고 여겨진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동시에 광해군이 왕에서 폐위되는 데에도 일조한 인물이다.
김개시의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은 그녀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간에도 붙었다 쓸개에도 붙었다가 하는 천하의 아첨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뛰어난 두뇌로 왕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의 힘을 가졌던 여인 김개시.
그녀가 만약 그 비상한 머리를 올바른 정치를 위해 썼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