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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루카 9,51-56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 꿈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을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마음을 굳히십니다.
십자가에 달리려는 마음을 굳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 달려오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삶의 목표이자 꿈이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길을 선택하면 그저 생존하려는 이들에게 비난받습니다.
그냥 살면 되지 왜 꿈이니 목표니 하면서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가끔 힘들고 어려울 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삶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목적이 없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꿈이 없으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거나 생존하는 것입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은 나의 생명의 에너지를 소진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참 생명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스물다섯 살까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다가 가난하게 되어 돈이 행복이라 믿을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신은 큰 부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가족도 돌보고 세상에 좋은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만족을 알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랐던 어머니에게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현실을 잊기 위해 마약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큰 선물을 준 사람은 마약을 끊는 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사였습니다.
그는 그랜트 카돈은 마약에 워낙 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끊을 수는 없을 것이라 단정하였습니다.
그랜트 카돈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공에 집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약은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6개월 만에 자동차 판매왕이 되었고 지금은 부동산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가 마약을 할 때는 모두 마약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성공에 집착할 때는 그것도 마약인 것처럼 뜯어말렸습니다.
자신들이 꿈 없이 노력하지 않는 것에 가지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랜트 카돈은 성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마약의 삶으로 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냥 생존하기 위해 마약을 하는 삶과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생존하는 데 쓰느냐, 꿈을 이루는 데 쓰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본인이 할 일입니다. 에너지는 어디엔가는 쓰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이 세상을 구하려는 꿈에 쏟아부으셨습니다.
피곤한 하루를 살면 잠이 잘 오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깨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원리입니다.
하루에 자신의 에너지를 꿈을 위해 쏟아붓지 않으면 아침이 괴롭습니다.
마지막 때도 그럴 것입니다.
꿈은 처음부터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에 유익한 무언가를 하도록 태어났음을 믿고 나아가다 보면 조금씩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절만 당하던 루저에서 62조 자산가가 된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 전 회장의
인터뷰를 들어봅시다.
“대학 입학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졌었나요?”
“네 대학 시험에 3번이나 떨어졌어요. 저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실패들도 많았죠. 전 중요한 초등학교 시험을 2번 낙제했어요.
전 중학교 입학도 3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오늘날에도 저희는 여전히 거절당합니다.
대학교 졸업 후 3년 동안 취업을 준비했어요.
거의 30번 넘게 지원했지만, 모두 실패했죠.
저는 경찰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적합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는 심지어 KFC에 들어가려 했어요.
KFC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을 때였어요.
총 24명이 KFC에 지원했는데 23명만이 합격했어요.
제가 떨어진 단 한 사람이었어요.
경찰을 지원했을 때는 총 5명이었는데, 저는 여기서도 유일하게 떨어진 한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실패’는 익숙한 거였어요.
그리고 제가 말했죠.
저는 하버드에 10번을 지원해서 10번 모두 떨어졌어요.
저는 매우 낙담해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친구가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추천해줬죠.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이.’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믿으세요.
그 일을 사랑하세요.
다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요.
당신이 어떤 것을 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어요.’
나는 절대 몰랐어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당신과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을 거라는 걸요.
나는 결코 몰랐어요.
하지만 저는 만들어냈어요. 15년 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약 우리가 성공한다면 80%의 중국 젊은이들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아버지도, 막강한 권력의 삼촌도 없습니다. 은행에서 1달러, 정부로부터 1센트도 못 받았어요.
단지 팀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 걱정되는 것이 있나요?”
“요즘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리고 꿈을 잃고 불평불만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꿈이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는 사람은 꿈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장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생존에 집착하든, 진정한 삶에 집착하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소명과 성공에 집착하지 않으면 중간밖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만큼 생존 욕구에 집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생명을 바칠
나의 소명을 찾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꿈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죄를 짓는 일만 남습니다.
인생은 오르막 아니면 내리막입니다.
매일매일 예루살렘으로 오를 결심을 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루카 9,51-56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강론>
(2023. 10. 3. 화)(루카 9,51-56)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라는 말은, 지금 예수님의 여행은 수난, 죽음, 부활을 향해서 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이 예수님의 일행을 거부한 일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여기서 심부름꾼들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신자들의 숙소와 음식을 미리 준비하려고 간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 마을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룻밤을 지낼 곳과 음식을 구하려고 갔습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유대교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적대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원래 두 민족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면서 접촉 자체를 하지 않았는데(요한 4,9), 큰 축일을 지내려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때에는 사마리아인들의 적대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신앙과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아마도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일어났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도 아니고, 메시아를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낯선 유대인들’을 거부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과 사도들 입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가는 순례 여행 중에 생긴 일이기 때문에 ‘종교박해’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이지 사마리아인들 전체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요한 4,28-30.39ㄱ.40-41).”
그렇다면 56절에 언급되어 있는 ‘다른 마을’은
‘다른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일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 때문에 몹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두 사도가 바로 심부름꾼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단순히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심한 폭언과 모욕과 폭행으로 예수님의 심부름꾼들을 쫒아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입니다.
두 사도에게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은 두 사도가 그만큼 크게 화가 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이야기에서는 그냥 그 마을을 떠나서 다른 마을로
갔다고만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마을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앙갚음하지 않고 그냥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 자체도 ‘복음의 씨’를 뿌린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흩어진 신자들은 가장 먼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갔고,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사도 8,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사도 8,14-15).”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5).”
<만일에 화가 난 두 사도가 원한 것처럼 예수님을 거부한 마을에 ‘천벌’이 내렸다면, 사마리아인들의 반감과 적대감만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나중에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주님의 복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