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작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처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1979)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의 표제시로, 슬픔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이기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는 한편,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하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슬픔’이고 청자는 ‘기쁨’이다. 그런데 그 ‘기쁨’의 모습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슬픔’은 그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즉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 때문에 눈물을 흘릴 줄 알며, 심지어는 이기적인 ‘기쁨’까지도 보듬고자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시에서의 ‘슬픔’은 소외된 사람과 그 소외된 살마에게 냉정한 대상까지도 사랑하려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결국 이 시는 자신의 행복에는 민감하지만 타인의 고통에는 무괌심하기 쉬운 우리의 이기적 삶의 한 면을 드러내면서, 그러한 삶에 대해 반성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본다면, 청자인 ‘너’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평생을 가난과 싸우면서 살아온 과일 장수 할머니에게까지 값을 깎고는 기뻐하는 사람이나, 막막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에게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서러운 사람들을 위해 ‘단 한 번도’ 따스한 사랑을 베풀지 않는 사람, 그리고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만큼 남들에겐 철저히 ‘무관심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바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진리조차 부정하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인 셈이다. 인간관계를 오직 이해(利害) 득실로만 평가하거나 삶의 목적을 부의 축적이나 출세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청자인 ‘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화자는 그 같은 이기적인 존재들이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참 행복은 ‘우연히’ 또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끝에서 획득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한다. 또한 ‘함박눈’으로 표현된 시련과 역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를 소망하믄 것은 물론, 이제 간신히 생의 의지를 일으켜 세운 이 땅의 민중들을 짓밟고 억누르는 ‘봄눈’ 같은 자들에게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슬픔’의 힘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깨우쳐 준다. 시인은 이러한 깨우침을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따스한 이웃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진정 인간다운 세상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모든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슬픔을 어머니로 하고 눈물을 아버지로 한다.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고통이 때문이다.”라는 시인의 깨달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고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하여 평등한 사랑을 위해 슬픔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되짚어 보게 한다.
[작가소개]
정호승(鄭浩承)
1950년 경상남도 하동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설굴암에 오르는 영희」 당선
197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슬픔이 기쁨에게」 당선으로 등단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위령제」 당선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 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모밀꽃』(1995),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이 짧은 시간 동안』(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