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과 도로로 뒤엉킨 수도권을 벗어난다 해도 공사판으로 변한 삼천리 금수강산의 어디인들 온전한 자연이 있을까요. 그래도 정도 차이는 제법 있을 법한데, 충청도는 정확히 반은 공사판이요, 반은 자연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공사판의 운명을 피한 충청도 산야에 어김없이 초록이 돋아났습니다.
어릴 적, 봄 산에는 살아남은 나무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시절, 산 바닥은 솔가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마을 가까운 야산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반들반들해졌습니다. 이제는 나무를 하는 이도 없고 산속을 누비며 노는 아이들도 없는 산은 서서히 깨어나 푸르게 물들어갑니다. 앙상하게 마른 채 우거진 덤불 속에서 불을 두려워하며 추운 계절을 보냈던 나무들이 기지개를 켭니다. 새들의 지저귐은 활기차고 산짐승들의 활력은 용솟음칩니다. 그러나 공사판으로 변한, 더 이상 산이라고 할 수 없는 공터는 처량한 모습으로 기계를 기다릴 뿐입니다.
얼어붙어 있던 들판은 힘차게 머리를 내민 푸른 순들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들판 사이를 흐르는 물은 겨울 가뭄 탓에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부족하지만, 잡고기들의 생명력은 여전합니다. 할머니들은 산비탈에 매달려, 삼동네 텃밭을 누비며 냉이를 캡니다. 어릴 적 내 어머니만큼 젊었던 그들은 내 어머니만큼 늙어서도 봄의 전령사 노릇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시내 상설시장에서 좌판을 벌일 것입니다. 경기도 속의 서울처럼, 농촌 마을에 둘러싸인 시내 사람들은 봄나물에서 봄이 왔음을 실감할 것입니다. 겨우내 경로당에서 시간을 죽였던 늙은 농부들은, 경운기를 탈탈거리며 논으로 나가 두엄 냄새 흩뜨리고 논바닥에 잠들었던 뭇 생명들을 깨웁니다.
지난 10년 세월, 참 좋았습니다. ‘소비가 미덕’이고, ‘부자 되세요’가 일상적인 덕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돈 버는 재미에 들려 있었고, 마음껏 소비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맞은 최악의 불경기. 겨우내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비정규직으로 내려앉았고, 취직하지 못했고, 소득이 절반으로 줄었고, 이러저러한 불운이 닥쳐왔습니다. 복불복이라지만, 갑작스러운 궁핍과 고난은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만들었습니다. 한우 먹다가 미국산 쇠고기나 먹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봄이 왔건만 도시사람이든 시골사람이든 우울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변함이 없습니다.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그러했듯 태연자약, 할 일을 합니다. 봄은 시작이고 새출발이고 희망입니다. 지금 봄은 산, 언덕, 들판, 간척지, 저수지, 천변, 갯벌, 공원에만 싹을 돋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어김없이 싹을 돋게 합니다. 사람들은 봄옷으로 갈아입고 다시금 공사판을 가동시키지만, 마음이 하도 단단히 얼어붙어서 싹을 밀어 올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봄의 힘은 강력합니다. 4월의 에너지는 광활합니다. 두엄을 분해하는 미생물들의 약동, 올챙이들의 경주, 까치 떼의 그악스러운 지저귐, 만발하는 꽃들, 저수지 수면을 박차 오르는 물고기들, 기계의 힘을 빌려 거침없이 분쇄되는 논바닥의 흙, 하천을 흐르는 물의 기세, 온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이려는 가공할 만한 식물의 번식, 산짐승들의 천진난만한 사랑놀이! 어느새 사람들도 봄에 젖게 될 것입니다. 오랜 침체를 털어버리고 희망을 노래할 것입니다.
흔히 ‘충청도 사람은 의뭉스럽다’고들 합니다. ‘의뭉’은 어쩌면 자연의 이치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지나치게 절망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기뻐하지도 않는, 대신 줏대를 지키면서 유쾌하게 살아가는 모습. 화려하지도 않고 볼품없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장삼이사(張三李四)같이 사이좋게 어울려 있는 충청도 산야는 의뭉스럽게 봄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글·사진 김종광(소설가)
197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계간 ‘문학동네’에 단편 ‘경찰서여, 안녕’,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해로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짬뽕과 소주의 힘’ ‘낙서문학사’, 장편소설 ‘야살쟁이록’ ‘율려낙원국’ ‘첫경험’ 등이 있다. 대산창작기금과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였고, 충남 대천항 인근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여성조선
취재 장세영 기자 | 사진 신승희, 조선일보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