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가
6:1.5)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말씀의 초대
콜로새 신자들은
과거에 이교인들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들과 화해하시어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다. 이제 그들은 믿음을 기초로
복음의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지적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충돌하는 장면이 복음서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안식일 계명을 고집하는 바리사이들이 아주 완고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식일 계명에는 대단히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느라고 바빴던 일상을 멈추고, 그동안 잊고 지내기 쉬운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제정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또한 안식일은 기계처럼 일에 매여 있는 자기 자신과 이웃, 특히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라도 노동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인간다운 모습을 되찾고 누리도록 도와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 계명에서 중요한 것은 그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주님의 날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때에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점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 안식일에 기억해야 할 그분이심을 뜻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안식일에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추수를 하건 탈곡을 하건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주일은
어떻습니까? 오직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고맙고 즐거운 휴일, 아니면 주님의 날인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어, 우리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셨기에, 우리의 안식일은 그분께 감사드리면서 지내는 주님의 날이어야 하겠습니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의 모습과는 달리 글씨를 너무나 잘 쓰시는 것입니다. 순간 제가 본 것은 그 신부님의 손에
들려 있는 펜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펜이 아니라 조금 특별한 모양의 펜이었지요. 저는 잠시 빌려서 한 번 써보았습니다. 훨씬 잘
써지는 느낌이어서 이 펜이 무슨 펜이고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지요. 아트펜이라고 하며, 미술 용품을 파는 화방에 가면 구입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얼른 화방으로 뛰어 가서 아트펜을 구입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부님처럼 멋진 글씨가 나올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지요.
지금 현재 저는 이
펜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니,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펜을 가지고서도 엉망진창인 저의 글씨체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보다는 글씨를 잘 쓰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도구 탓, 환경 탓을 할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도구가 없어서,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작 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인데도 말이지요.
요즘에 어떤 운동을
시작하려면 먼저 도구부터 구입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자전거 쪽에는 더욱 더 그런 분이 많더군요. 앞으로 계속 탈지 안 탈 지도
모르는데 몇 백 만 원짜리 자전거부터 사고 보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여기에 완전히 선수처럼 보일 정도로 주변 장비까지 완벽하게 구비를 하십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노력과 꾸준함이 있을 때, 비로소 도구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먼저고 자신에게 맞는 도구는 그
다음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중요한 것보다는 중요한 것을 돕기 위한 부차적인 것들에 더 힘을 쏟는 것 같습니다. 전혀 노력하지
않으면서 도구만 구입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바리사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고발합니다. 그런데 그 고발의 내용이
참으로 유치하지요. 즉,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었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뜯은 것이 추수한 것이고, 비빈 것은
타작하는 것이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이 왜 있는지 그 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처럼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래서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이
제외된 모든 행동들은 주님 앞에서 의미 없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의 외면도 바꿀 수 있다(윌리엄 제임스).
무엇이 중요할까요?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시험 성적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성적표를 보니, 다 평균 이상인데 수학만 50점을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술은 가장 높은 점수인
100점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이 성적표를 보고서 학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어떤 학원을 보냈을까요?
보통의 엄마는 이
성적표를 보고서는 수학 학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학점수를 높여야 성적이 좋아질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 엄마는 수학 학원이
아니라 미술 학원 등록을 시켰습니다.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는 생각보다는 잘 하는 것의 재능을 더 키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로 현명한
엄마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모든 과목에서 일등하기를 원하겠지만, 사실 모든 과목을 잘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이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만을 키워주는데 집중할 수 있다면 본인이 잘하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학원을 몇 개씩
끊어서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렸을 때 제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어렸을 때 떠올려지는 추억은 주로 놀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야구하고 축구했던 모습, 하루 종일 동네 공터에서 뛰놀던 시간들만 기억납니다. 공부한 것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하기 싫은 학원 다녔던 시간들이 내게 정말로 좋은 시간이었다고 먼 훗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추억을 떠올리며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러한 추억들을 간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조재형신부-
인사이동에 따라서
사제들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교구가
커지고,
사목의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인사이동의 소임지도 여러 곳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본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교구청의 여러 부서로 자리를 옮기기도 합니다.
사무처,
사목국,
청소년국,
사회사목국,
해외선교
봉사국,
홍보국,
성소국,
관리국이
있습니다.
학교법인,
해외선교,
교포사목,
해외유학,
국내수학,
중견사제
연수,
바오로
연수,
베드로 연수가
있습니다.
10년 이상 사목을
하면 청할 수 있는 안식년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안식년을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2013년 안식년을
청했는데,
교구장님의 명으로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다른 소임지는
맡겨진 일들이 있지만 안식년은 본인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안식년 중에 택시 운전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세상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수도원에서 글을 쓰기도 합니다.
같은 안식년이지만
결과는 모두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3분이신 하느님께서도
고유한 역할과 담당업무가 있으십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성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고,
느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자이신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십니다.
‘슬기,
지식,
의견,
굳셈,
효경,
두려움,
통달’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위로와
희망,
용기와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는
삼위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위해서 특별히 전구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예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방향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불교의 큰
어르신이신 ‘성철’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께서 연로
하셔서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을 때입니다.
그분의 제자
1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이제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가십니까!’
성철 스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놈아!
그것을 알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겠느냐!’
깨달음이 큰 스님도
어디로 가야할지 스스로 알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마지막
말씀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이는 이제
교황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스스로 알기는 어려운 일들을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안내 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방황하는
이들에게,
외로운 이들에게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수철신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한마디로 모든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이 말끔히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우리 삶의 중심이심에 대한 선언입니다.
유일한
분별의 잣대는 주님이시오,
당신을
중심으로 안식일법은 물론 모든 것을 상대화하심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 앞에 우상들은 자리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분은 삶의 중심인 주님뿐이요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느냐’는 바리사이들의 항의에 난감해하는
제자들을 대신하여 한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 주는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제자들은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라는 화답송 후렴을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죽음과 삶의 주인이신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기반이요 배경이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여 진정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의
장엄한 고백이 진정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파스카의
주님 안에 믿음으로 정주할 때 하느님과 화해된 삶이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삶은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슬픔도, 절망도, 아픔도 견디어 내야 합니다. 바로
파스카의 주님께 희망을 둘 때 꿋꿋하게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받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쳤던 석가모니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얼마나
당당한 인간선언입니까?
바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사람의
아들인 당신처럼 각자 주체적 인간으로 하늘 향해 우뚝 서라고 나무처럼 직립인간입니다.
세상
우상들에 휘둘리지 말고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 참 나를 살라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될수록 내 삶의 자리에 주인이 되어 자존감 충만한 고유의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존엄한
인간품위를 확인시켜주는 말씀입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를 대하며 과연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인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오래된 미래’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되어 살았던 모든 성인들 역시 ‘오래된 미래’이자 희망의 표지입니다.
미래가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오래된
미래’인 예수님이나 성인들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
삶을 총괄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아무도
주님 섭리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시간이 주님 손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며칠전
동방영성에 관한 책을 읽던 중 다음 영어 말마디가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There
is really nothing worse in life’
우리
삶에서 더 나쁘다할 일은 실제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시야를 얻을 때 이런 초연한 자유요, 긍정적 낙관적 인생입니다. 절대로
비관할 것도, 슬퍼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잘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은 중력重力과 신력信力의 비교입니다.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고 열매가 아래로 향하는 것이나,
아랫배가
나오고 얼굴이 나이들어 아래로 쳐지고 젖가슴이 아래로 늘어지는 것이나
모두가
바로 중력탓입니다.
지구에
살아있는 한 누구나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서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있는 것이 편한 것도 중력탓입니다.
중력이
점점 아래로 끌어내려 서서히 우리를 무너뜨리고 마직막에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심,
베드로가
잠시 물위를 걸음,
하늘을
나는 천사들, 모두 중력을 벗어남에 대한, 무아無我에 대한 상징입니다.
중력에
거슬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영혼의 힘이자 신력입니다.
영적
삶의 본질도 중력과 신력의 차이입니다. 몸은
중력의 영향으로 날로 쇠락해가더라도 영혼은 늘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몸이야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는다 해도 영혼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힘으로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중력에
패한 듯 하지만 실상 승리한 신력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성인들입니다.
답은
단 하나 안식일뿐 아닌 모두의 주인이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길뿐입니다.
이래야
숙명론자가 비관론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중력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시편9,2-3).
아멘.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
-양승국신부-
저희
수도회 총회에 참석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전 세계 134개국에서 온 대표 살레시오 회원들
2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두 달 동안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머리 맞대고 죽기 살기로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습니다. 회의를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이지 ‘회의적’인 사람이 되더군요
.
이
모든 사람들 왕복 비행기표 값과 두 달간 체류비만 해도 가난한 청소년들 위한 건물을 몇 채나 사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태리어로 동시통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언어 사용에 한계도 많이 느꼈습니다. 이런 회의가 도대체 수도회를 위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그런 회의감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회의 기간 내내 계속된 작업의 주제가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해석하고 있는가?” “만일 돈보스코라면 이 시대 청소년들의 상황 앞에서 어떤 일을 하셨을까?”
저희는
끝도 없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진단했고,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강점과 경쟁력을 무엇이며, 약점과 위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겠는지 답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회의를 거듭할수록 그나마 우리 살레시오회가 전 세계 차원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이런 ‘식별과 검증 시스템’에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해오는 공동체들이 있는가 하면,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춘 공동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공동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제 나름대로 연구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소멸되어간 공동체들이 밟은 절차는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처음 출발은 다들
좋았습니다. 내세웠던 기치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뭐든 다 할 것 같았습니다. 이것저것에 손도 많이 댔습니다.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문어발식으로 사업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세월이 바뀌고, 세상의 주역들도 바뀌어 갔습니다. 삶의 스타일도 바뀌어갔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교회가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 언제나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재해석하고 재발견하려는 과정을 거쳤어야만 했습니다. 시대에 맞는 복음을 공동체
안에서 되살려냈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이 다시 강생하셨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일을 하셨을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부단한 자기정화(自己淨化) 작업과 쇄신작업이
필요했었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되살려내지 못한 공동체는 속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보란 듯이 떠들고 다니지만 교회를 위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최고이며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형편없습니다. 이런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닌 특징이 한 가지 있는데 죽어도 공부안하는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책 한권 읽지 않습니다. 비판세력, 약자, 소외계층의 사람들은 철저히 무시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할 의욕도 힘도
없습니다. 구성원들은 서로 자기 몫만 챙기느라 바쁩니다. 자기네만 잘 먹고 잘 삽니다.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바도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져간 공동체를 바라보며 생각해봅니다. 그 어떤 공동체이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이라는 ‘영원한 식별의 기준’에 따라 수시로 스스로의 삶을 진단, 평가, 반성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복음에로의 부단한
회귀, 고통스럽지만 철저한 자기반성과 쇄신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앞날은
불투명합니다.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반영억신부-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에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억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오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루카
6,1)
-오상선신부-
요즈음은 큰일 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어릴
적에 소위 '서리'라는
것을 해 보셨나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해 보셨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먹을
것이 귀한 때라 이것저것 훔쳐
따먹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요.
저는 국민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자두밭에 서리하러
갔다가 친구들은 다
내빼고 어리숙하게
붙잡혀 나무에 묶여 혼줄이
난 적이 있답니다. 또 학교
실습지에서 무를 뽑아 먹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무를 입에 물고
벌을 선 적도 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나는
아름다운 옛
추억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늘 밀서리를
하다가 혼줄이
나네요.
그런데
예수님은 혼을
내시기보다는 우리 아버지처럼
변호해 주시네요. 재미로 하는
서리인데 뭘
그러냐고... 이보다 더 한
서리도 얼마나
많은데...
예,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우리 편에 서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랍니다.
오늘 설혹 누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처럼 너그럽게
변호해 줍시다. 그래야 나도
잘못하거나 실수하게 될
때 너그러이 변호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틀을
버리고 자유롭게 사랑하자
-기경호신부-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법이 있다. 자유롭고 싶고 인간다워지고 싶은 인간에게 법은 때론 짐이나 걸림돌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법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는 자기중심적인 관점이나 자신 안에 굳어진 틀을 지니고 법을 대하는 것 같다. 법을
공부하거나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규범적이라거나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심하다.
그런데 인간이
있고서 법이 생겨난 것이며,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새겨보면 결국 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을 만들고 법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자신이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고착된 사고의 틀과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등에 매여
살아가는 자신을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준수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말해주는 표지였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엄격하고 세부적인 율법들을 만들어 노동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활동을 금지했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을 채우려고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허용되었다(신명 23,26 참조).
이런 배경에서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자 바리사이들은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금지된 밀 수확을 하느냐?”라고
예수께 따진다. 밀 이삭을 따는 것은 율법에 안식일을 더럽히는 스물아홉 가지의 중요한 노동 형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께 대한 도발이자 경고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던 다윗이 성전에 보관된 ‘거룩한 빵’을 먹었으며 동행하던 이들에게 나누어준 예(1사무 21,1-7)를 들어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기시켜주신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법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고 생명과 인간 존엄을 살려나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다.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사랑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으며 그 목적은 영혼구원에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6,5) 율법의 근본정신과 법 실천의 기준을 철저히 인간을 위하고 사랑으로 자신 전부를 내놓는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분은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시고 세상 모든 이가 지니고 걸어가야 할 사랑과 자유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곧 모든 제도와 체제,
그리고 법규와 관습은 인간을 섬기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다움과 인간의 존엄함이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법은 인간을 살리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래서 결국 그 안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는 ‘사랑의 법’, ‘성령의 법’임을 잊지 말자.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율법의 정신인 하느님의 사랑을 망각한 채 사람을 구속하는 족쇄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얼을 품고 있는 인간을 도외시 한 채 법과 규정을 자신의 권력이나 이익 추구나 다른 이들을 소외시키는 도구 여기며 살아가는 일이 없어야겠다.
그러려면 법 이전에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생생하게 떠올려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참 자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틀에 상대방을 끼워 맞추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받아들여야
하리라!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의 자유롭고 신명나고 사랑 넘치는 우리가 될 순 없을까?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일텐데
새 마음으로
받아들여 봅시다.
-김기현신부-
새벽 미사 강론
때는 보통 나눔을 합니다.
어제는 마음에 와
닿는 구절과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신자 분이 반복했던
구절 중에 하나가 저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 같아서,
한 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구절입니다.
스승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가졌던 느낌도 그와 비슷해서 그런 가 봅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 보지만 신자들은 여전히 변화도 없고 동참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거 같습니다.
하나마나인 거
같습니다.’
저도 베드로와
똑같은 말을 했었던 거 같은데요.
그 다음 말이 저와
다른 부분이어서 순간 아주 살짝 전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또 한 번 그물을 내리겠다는 그 말이..
예상하지 못했고
살짝 거부했던 일이라 내 행동을 다시 한 번 잘 들여다봐야겠다..
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마 다음과 같은
일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아무도 나오지 않을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면 그 자리에 다시 나가 기도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 성경을 읽는 사람이
없고 교육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그 그물을 다시 던져보겠습니다.
...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이나 환자들이나 냉담자들이 반기지 않더라도 다시 당신의 사랑과 관심이라는 그물을 던져 보겠습니다.
...
아이들 반응이
별로더라도 다시 그물을 짜서 던져보겠습니다.
... 하나도 모이지 않고
모임이 흐지부지 된 단체들에게도 다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 미지근한
봉사자들에게도 다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 늘 일하는 사람만
일하고 있는 작업의 자리에도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다시 그물을 던져보겠습니다.
... 그 일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다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저의 마음은
그러해야 하는 거 같습니다.
제 일은 그물을
계속 정비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던지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 중에는
신자들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거부반응이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런 신자들도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새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참하길 기도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고,
자주 모이고
방문하는 것도 그렇고,
내 역할을 가지고
모두가 동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늙은이한테 뭘 자꾸
하라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뭘
자꾸 하라는 거야..
묵은 것이
좋다..’
고 거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신앙 안에서 새로 접하게 되는 것들을 익숙하고 편한 것만 찾으려는 옛 마음이 아니라 받아들이겠다는 새 마음으로 담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터지고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보관하여
맛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새로운 일들을 새
마음에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들이랑 나들이를
가서
이런저런 재밌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재밌는 사진들이 다 없어졌다.
아마도 아이들이
사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다 지운 거
같다...^^;
-한상우신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일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창조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저마다에게
필요한 안식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창조와
안식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자신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해 우리를
찾으십니다.
삶에 지친
우리들은 안식일을
통해 호흡을 가다듬게
됩니다.
휴식없이는 삶의
신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제대로된
휴식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시작은 깊어지는
봉헌의 시작입니다.
사람다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유로운
삶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자유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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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