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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토요일. - 미움을 최고로 잘 받는 기술, 우리 영혼의 청사진!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2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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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9 05:23
- 미움을 최고로 잘 받는 기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저는 오늘 미움과 관련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의 괴로움과 불행 가운데 미움은 가장 큰 괴로움과 불행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에게 미움은 가장 큰 괴로움과 불행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 더 큰 괴로움과 불행은 미움이 아니라
아예 미워하지도 않는 무관심과 무시입니다.
사실 미움은 사랑이고,
많은 경우 사랑하기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미움받는 내가 괴로울 때도 있지만
미워하는 그가 어쩌면 더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운 미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미워하는 이유가 실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괴로워하며 미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남의 자식이나 남편이 잘못하면 욕 한 번 하고 잊어버리지
계속 붙들고 미워하고 괴로워하지 않지 않습니까?
반대로 자식이나 남편은 괴로워하면서도 미워하는데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미움을 받아도 그 속에서 사랑을 읽을 줄만 안다면
그것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지 않고 불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워하며 고통을 받는 그가 외려 불쌍하고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움을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미워하는 그가 오히려 고맙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나를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미움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미움받을 때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이 없는데도 그의 잘못으로 미움을 받거나
순전히 그의 시기심 때문에 내가 잘하고 있고 의로운데도 미움받을 경우는
미움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미움받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영광되고 기쁘게 미움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 까닭에 미움받고 하느님 때문에 미움받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 때문에 미움받게 될 거라고,
당신과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이들로부터 미움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시며 각오도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은 아무 의미 없이 고통받고 미움받습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에
고통과 미움을 아무 의미 없이 억지로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미움받는 것,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 때문에 미움받는 것,
이것이 미움을 최고로 잘 받는 기술임을 깨닫고 기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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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영혼의 청사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당신의 마음 위에 제 인호를 새겨 두소서.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우리 영혼의 청사진
2026년 5월 8일 금요일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는 연애와 에로스의 언어가 종교 전통을 초월하여 신비가들의 보편적 체험을 드러내는 방식임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적 전통에는 저마다의 "아가서"가 있는 듯합니다. 연애의 언어는 영혼과 하느님의 관계를 묘사하고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 어떤 신학적 설명의 언어보다도 더 정확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혁명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아가서"가 정경 안에 들어가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신비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사랑의 언어는 바로 "아가서"가 흘러나온 그 동일한 샘에서 솟아오릅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영적 친교와 영적 갈망의 진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갈망은 합일과 친교로 들어가는 문이 되고, 그 합일은 다시 갈망의 기준점이 됩니다. 신비가들이 그리움, 고통, 단절,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품 안에서 안식하는 달콤함을 노래할 때마다, 그들은 본질적인 노래, 곧 "아가서"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본문을 직접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가서"는 모든 영혼 안에 새겨진 본질적 청사진이며, 우리를 영적 길로 이끄는 연료입니다. 설령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직접 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모두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1]
아가서에서 연인은 사랑하는 이를 찾는 자신의 여정을 노래합니다:
스타(Starr)는 갈망을 "혼인 신비(nuptial mysticism)"의 본질적 요소로 설명합니다:
우리 영혼 안에는 유배와 귀환의 역동을 알아보는 어떤 감각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근원이 "사랑"임을 기억합니다. 영혼의 뿌리에서 뽑혀 나왔다는 환상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본래의 "소속됨"이라는 탄생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영적 수행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합일을 이루는 순간, 우리는 애초에 둘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일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는 마치 우주선과 같아서, 우리를 환상의 층들을 뚫고 지나가게 하며, 하느님과의 본질적 결합과 모든 피조물과의 상호 연결성이라는 진리로 데려다 줍니다. 갈망의 불길로 빛나고 합일의 포도주에 취한 신비적 시의 한 구절만큼, 우리의 타오르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합일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CAC가 모든 신앙 전통의 지혜를 존중한다는 사실이 참 기쁩니다. 동양 영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제 자신의 가톨릭 신비 전통과 아름다운 관상(관상기도)의 실천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년 전 동양식 명상 수행을 시작하면서, 마침내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저서와 제임스 핀리의 팟캐스트 “Turning to the Mystics”(신비주의자들에게 주목하기)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요가와 다른 명상 수행에는 참으로 귀한 가치가 담겨 있으며, 그것들은 제 가톨릭 신앙에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지혜가 없었다면, 저는 이러한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Suzanne L.
References
[1] Mirabai Starr with James Finley and Michael Petrow, “The Song of Love Lost and Found,” The Living School: Essentials of Engaged Contempl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5.
[2] Mirabai Starr, Wild Mercy: Living the Fierce and Tender Wisdom of the Women Mystics (Sounds True, 2019), 5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im MacKinn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Canad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사랑의 시선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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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주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삶!~~~
미움 속에도 어떤 상금이나 보상이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괴적인 정념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겠습니까? 미움에는 은밀한 만족이 숨어 있습니다. 롱펠로우가 말했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은 사랑이요, 그 다음으로 달콤한 것은 미움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습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타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미움은 오히려 자아를 강화합니다. 분리의식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워할 때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강한 감각을 맛봅니다. 아마 이것이 미움의 숨은 상금이나 보상일 것입니다. 또한 미움은 자신을 미워하는 대상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참된 일치의 풍자적 모방인 셈입니다. 개인을 미워하면 그 사람과 동등한 듯 보이고, 집단을 미워하면 자기가 그 집단의 원형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미움을 이해해야만 그 전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사명 중 많은 부분은 미움의 구조를 해체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곧 자아를 해체하는 일인데, 위험한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과 용기를 갖고 이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 길을 통해 미움의 사슬을 끊고, 참된 자유와 일치를 우리에게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움이란 것은 달리 말해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와도 같습니다. 에고의 속임수에 빠져 어떤 강한 집착 속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미움은 그 자체로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움이 당장은 어떤 만족을 주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이런 미움과 대립, 단절을 부추기는 에고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해 주신 "좋은 세상", "선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아주 중요한 당부를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느님(주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것"을 자주 의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할 때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라고요!
우리를 사랑의 하느님께서 선택해 주셨고, 또 우리의 삶을 당신 사랑의 섭리로 이끌어 가시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모아들이신다는 확신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충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으로 창조되었고, 또 그분의 자녀들로 거듭 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작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요한 3,3; 7)이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요한 3,5)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전히 집착하여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하느님께 그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이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작은 용기를 내어 포용하는 사랑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그 걸음을 은총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토마스 머튼의 짧은 묵상 글 하나를 나누며 오늘 복음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 기도하는 데 있어서의 용기 –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 우리는 머지않아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모험을 걸어야 하고, 우리가 보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험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세상보다 더 불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다면 참된 단순성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소심함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개의 마음"을 갖게 한다. –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주저주저하면서 말이다. 이런 주저함 안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 믿음은 하나의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결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그 사랑의 권위에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주저함은 곧 희망의 죽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언젠가는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실패를 안겨 줄 보이는 것들의 도움을 전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저함은 진정한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 이런 주저함은 절대로 어떤 것을 청할 용기를 갖지 못하게 하며, 만약 그 어떤 것을 청한다 해도 그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청을 하는 행위 안에서 인간적인 판단으로 몰래 임시변통의 대답을 만들어 낼 강구를 하게 된다.
만일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하느님을 조금밖에 신뢰할 수 없어서 우리 기도에 대해 일종의 우리 스스로의 대답을 구상하는 데 분주하다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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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사랑의 계명’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15,19)이며, 또한 “내 이름 때문에”(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 그렇게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과, ‘예수님 이름’, 이 세 가지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는 <제자들 편>에서의 이유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존재의 의미요, 우리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 편>에서의 이유를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15,21) 때문이라고 밝혀주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에게 선택받았는지? 제자로서의 신분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꿋꿋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이는 비록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게 하라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하오니, 나의 주 나의 전부 나의 임자시여!
나를 독차지하신 나의 지배자 나의 정복자시여, 바로 지금 저를 점령하소서.
저는 본시 당신 것이옵니다.
저는 당신의 것, 당신의 소유이오니, 당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옵니다.
당신의 택함, 당신의 보냄을 따라 감히 당신의 뜻을 따르겠사오니,
제가 공동체와 형제들 안에 머물게 하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혹 내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사는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 주님이신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오 감사하나이다. 나의 주, 나의 임자시여!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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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지금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중동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세계 곳곳에서 갈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멀리 있는 이야기 같지만, 그 여파는 우리 삶 깊이 들어옵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오르고, 경제가 흔들립니다. 성지순례의 길도 막히고, 사람들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자리 잡습니다. 전쟁은 강한 나라들이 시작하지만, 그 고통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듭니다. 역사를 보면 인류는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언제나 힘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강한 군사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이루어진 평화입니다. 오늘날에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형태의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힘이 약해지면 평화도 함께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인간이 만들어낸 평화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바로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힘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칼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미사일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미움을 녹이며,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평화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열쇠가 바로 ‘자기 성화’입니다.
예전에 레지오 단원들이 피정했을 때 이런 질문을 들었습니다. “레지오 단원의 첫째가는 직무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출석이라고 했고, 어떤 분은 선교라고 했으며, 어떤 분은 사랑과 기도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정확한 대답은 자기 성화입니다.” 자신이 성화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출석하게 되고, 선교하게 되며,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성화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무가 되고 부담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힘으로 하는 신앙은 결국 지치게 됩니다. 열심히 하다가도 어느 순간 식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화된 사람은 다릅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 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전원이 연결되어야 제 기능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성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하고, 때로는 전쟁까지도 불사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기준은 다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세상의 논리에서 시작되지만, 평화는 성화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하며, 세상이 변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힘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성화의 길을 갈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 안에 머무르며, 날마다 자신을 성화시키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게 하소서. 주님 안에 머무르며 날마다 성화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평화의 시작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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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세상이 예수님과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초세기부터 엄청난 조롱과 박해, 의심과 몰이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로부터의 대대적인 배척과 증오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매일 일상적으로 겪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AD 64년 네로 황제에 의한 대대적인 박해를 필두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시련에 시달렸습니다. AD 90년경 유다교 지도층 인사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파문(破門)과 출교(黜敎) 처분을 내렸습니다. 유다교 광신자들은 출교 처분에 만족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살상하였는데, 놀랍게도 자신들의 살상행위를 하느님께 바치는 유혈 제사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박해자들의 무지와 악행,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체를 명확히 파악했었더라면, 그토록 역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운명을 지닌 운명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이 동참하는 것이니,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영예로 여겨야겠습니다. 세상이 예수님과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생활방식과 사고 방식에 비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요구성이 훨씬 많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날선 지적과 충고가 가슴에 찔리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참으로 영악하고 사악합니다. 정말이지 고단수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비둘기처럼 단순할 필요도 있지만,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이 세상, 사랑이신 하느님 손길과 흔적이 담겨있는 이 세상이기에,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사랑의 마음으로 성장시켜나가고 완성시켜 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동시에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 바로 옆의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다같이 합심해서 극복하고 투쟁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 교회는 때로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 토착화시키고 현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동시에 악한 세상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대안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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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18–21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그리고 이어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다소 두렵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겁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맞이할 현실을 미리 알려 주시며
끝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세상의 인정과 박수만을 받는 길이 아님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욕망과 기준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와 사랑의 질서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갈등과 거절은
때로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속해 있다는 흔적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받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미움을 받는가입니다.
교만이나 완고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과 복음의 진실 때문에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라면
그 길 안에는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을 멸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거짓 기준에 완전히 물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힘보다 사랑을,
배제보다 환대를,
지배보다 섬김을,
두려움보다 진실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삶은 때때로
세상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이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랑인지를 보여 줍니다.
돌봄은 모두에게 편하게 보이기 위한 친절이 아닙니다.
정말로 누군가를 살리려 할 때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무관심과 조롱,
오해와 거절을 만나게 됩니다.
약한 이를 편들고,
잊힌 이를 기억하며,
배척당한 이를 품는 일은
항상 환영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길이 당신이 먼저 걸으신 길임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이웃종교/생태의 날에
이 말씀은 더 넓게 다가옵니다.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함부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낯선 문화 속의 사람,
말없이 살아가는 피조물,
상처 입은 자연을
단순히 대상이나 배경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 앞의 현실로 존중하는 삶은
세상의 익숙한 지배 논리와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결국 함께 살기를 배우는 길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주님을 아는 사람은
그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이름 안에서 더욱 굳세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오해할 수 있어도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사람들이 거절할 수 있어도
주님은 우리를 붙드십니다.
돌봄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띄지 않고,
당장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손해처럼 보일 수 있어도
주님 안에 뿌리내린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세상의 인정만을 좇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라도
사랑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
나는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책임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불편함이 생길까 봐
돌봄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미움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주님,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께 속한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거절이 두려워 사랑을 멈추지 않게 하시고
낯선 이와 약한 존재들까지
당신 안에서 함께 살게 하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더 깊이 돌보고 더 넓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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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30 추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https://story.kakao.com/ 黃Dami 매일묵상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18-21).”
1) 여기서 ‘미움’은 ‘종교박해’를 뜻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박해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너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복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안 믿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환영하고 접대하지만, 안 믿고 거부하는 사람은 배척하고 박해합니다.
초대교회의 이야기를 보면, 사도들이 처음부터
미움과 박해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호감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상적인 일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진리’이고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박해를 받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2)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데도 박해자들은 왜 그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배척하고 박해하는 것일까?
사도행전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사도 4,2).”
이 말은, 부활을 안 믿는 사두가이들의 박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사도 5,17-18).”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본 기득권층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도들을 박해했음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면, 사두가이파가 시작한 박해에 바리사이파가 나중에 합류하고, 결국 유대교 전체가 박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유대인들이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새로운 신앙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3)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신앙과 복음을 버린다면 종교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10,16).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이리 떼’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환대하는 이들도 분명히 많은데, 그래도 ‘이리 떼’ 같은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선교활동입니다.
선교활동을 하다가 환대를 받든지 박해를 받든지 간에, 절대로 버리면 안 되는 것은 신앙과 복음입니다.
<만일에 ‘이리 떼’에게 굴복해서 ‘양’이기를 포기하고 ‘이리’로 변신한다면, 박해를 안 받겠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4)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가져라.” 라는 말만 하고, 어떻게 해야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방법을 몰라서 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고 해서 없었던 용기가 갑자기 생기는가?
답은 ‘성령’과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던 사도들이(요한 20,19), ‘밖으로 나가서’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을(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사도 2,1-4).
사도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 한 일은, 또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한 일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한’ 일이었습니다(사도 1,14).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인의 용기’는 ‘성령’께서 주시고,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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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https://cafe.daum.net/bbadaking/LgCX/1909
stellakang 26.05.09 03:35
1) 여기서 ‘미움’은 ‘종교박해’를 뜻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박해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너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복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안 믿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환영하고 접대하지만, 안 믿고 거부하는 사람은 배척하고 박해합니다.
초대교회의 이야기를 보면,
사도들이 처음부터 미움과 박해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호감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상적인 일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진리’이고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박해를 받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2)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데도 박해자들은 왜 그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배척하고 박해하는 것일까?
사도행전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사도 4,2).”
이 말은, 부활을 안 믿는 사두가이들의 박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사도 5,17-18).”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본 기득권층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도들을 박해했음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면, 사두가이파가 시작한 박해에 바리사이파가 나중에 합류하고, 결국 유대교 전체가 박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유대인들이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새로운 신앙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3)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신앙과 복음을 버린다면 종교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10,16).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이리 떼’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환대하는 이들도 분명히 많은데, 그래도 ‘이리 떼’ 같은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선교활동입니다.
선교활동을 하다가 환대를 받든지 박해를 받든지 간에, 절대로 버리면 안 되는 것은 신앙과 복음입니다. <만일에 ‘이리 떼’에게 굴복해서 ‘양’이기를 포기하고 ‘이리’로 변신한다면, 박해를 안 받겠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4)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가져라.” 라는 말만 하고,
어떻게 해야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방법을 몰라서 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고 해서 없었던 용기가 갑자기 생기는가? 답은 ‘성령’과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던 사도들이(요한 20,19), ‘밖으로 나가서’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을(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사도 2,1-4).
사도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 한 일은, 또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한 일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한’ 일이었습니다(사도 1,14).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인의 용기’는 ‘성령’께서 주시고,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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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9. 부활 제5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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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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