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낙도 / 구양근
나는 전에 혼자 사적지 답사를 떠나 동학혁명의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마을을 들른 적이 있다.
첩첩산중의 조그만 농촌마을의 김개남 장군의 집터는 산 언덕배기의 삼밭이 되어 있었고 밭 가운데 농작물 사이에 어떤 사학도가 널빤지에 ‘김개남장군고택지’라고 써서 꽂아놓은 것이 전부였다. 나는 바로 삼밭 아래쪽 가옥의 김개남 장군 손자의 집을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간벽지에 찾아온 나를 무척 의외로 반기며 맞아주었다. 지금은 완전 농군이 되어있는 한 촌부와 하룻밤을 묵으며 나누었던 대화는 내 평생을 두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탐관오리의 착취를 막고 일본군을 몰아내자던 한 동학혁명군 지도자는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망해버리고 말았다. 김개남 장군 뿐만 아니라 당시 농민군의 삼거두인 전봉준, 손화중 역시 흔적도 없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당시 동학혁명군은 피를 토하면서 관군에게 호소한 말이 있었다. 농민군과 관군이 힘을 합쳐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그러나 멍청한 정부는 반대로 일본군과 관군이 힘을 합쳐 농민군을 진압해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그때 망해버리고 말았으니 그 뒤로 한일합방까지 에스컬레이터 되고 만다.
이번에 한 문우가 「분지糞地」의 저자 남정현을 같이 만나자고 했다. 분지는 내가 대학생 때 한국을 뒤흔들었던 필화사건이었다. “한국은 ×의 나라다.”고 외쳤던 그를 왜 나더러 같이 만나고 할까. 문우가 남정현을 같이 만나자고 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쓴 장편소설이 지금 출판 중에 있는데 그 소설이 나오면 아마 분지사건과 같은 필화사건이라도 터지지 않겠는가 하는 육감이 아니었을까. 가장 측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문우는 교수 출신 작가답게 미리 마음의 준비쯤 해두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미인 듯하다.
남정현은 짧은 단편소설로서 허구로 쓴 소설이지만 나는 사실을 쓴 데다가 3권에 달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 남정현은 미군에게 강간당하고 미쳐서 죽은 어머니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에둘러 썼지만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생생하게 직술하고 있다. 《붉은 전쟁》 ….
“남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분지보다도 훨씬 더 심한 소설을 썼습니다.”
남정현은 내 말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순진무구하며 아직도 아무런 면역세포를 만들지 못한 무공해 인간으로 남아 있었다. 80대 중반의 노구인데도 정신이 전혀 흐리지 않고 발음은 아직도 똑똑하였다.
“지금도 작품을 쓰세요?”
“아니요. 글 안 쓴 지 오래됐어요.”
“왜요, 절필하셨어요?”
“아니요, 절필이랄 것도 없고 그저 글이 안 나와요.”
쌍문역까지 우리를 만나러 나올 때는 비닐우산을 짚고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너무 노인 티가 나서 비닐우산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비닐우산은 삼천 원밖에 안 하기 때문에 잃어버려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고 했다.
분지사건 때 잡혀가서 어찌나 얻어맞았던지 나와서 거울을 보니 자기 얼굴이 정사각형으로 변해 있더라고 했다. 조선조 때에 명나라에 사대할 때는 명나라를 반대하는 것은 역적행위였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을 반대하는 것이 역적 행위였고, 해방 이후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역적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남정현은 ‘한 번도 제 것을 가지고 세계를 향하여 서본 적이 없는’ 이 나라를 분지라고 외쳤다.
그런데 막상 분지사건은 약과이고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은 긴급조치로 잡혀갔을 때라고 했다. 그때는 정말 별의별 고문을 다 당해보았다고 했다. 군사정부에서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고 긴급조치라는 것을 발동하여 민주인사들을 배후세력으로 무작위로 잡아들여 8명이나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도 초죽음을 만들어 내보냈던 사건이다. 어느 날 감옥에서 자기를 불러내더라고 했다. 복도로 나오니 동지들이 창살 틈으로 내다보며 목멘 소리로 “남 선생!” “남선생!”을 연호하더란다. “아! 사형집행을 하러 가는구나.”하고 따라 갔더니 사무실에서 어떤 대령 계급장을 단 사람이 소파에 앉으라고 하더란다. 죽일 때는 마지막으로 잘해준다고 하더니 맞구나 하고 각오를 하고 있었더니 다음에는 따끈한 차를 내오더란다. “맞네! 사형이네. 마지막 가는 사람에게 대하는 것 맞네.”했더니, 알고보니 그날이 긴급조치 해제하는 날이었고 조금 있으니 아내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군사정권에 대한 증오심도 없이 마치 “네까짓 것들 증오할 대상이나 되느냐?”는 듯 아주 평온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굳이 남 선생님 댁을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로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렸다. 가는 길에 자랑이 대단하다. 자기가 이사 올 때는 가장 싼 지역의 초가마을이었고 자기 집은 4채의 초가집이 있던 곳의 한 채였다고 한다. 건물 사이로 도봉산이 보이자 더 잘 보이는 쪽으로 오라더니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보이지 않느냐며 그래서 도봉산을 삼각산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남정현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란다.
집은 그래도 새로 2층을 올려 살만한 집인 성싶었고, 그 뒤로 민주정권 때 인정을 받아 부저 옆에 손바닥 크기보다 약간 넓은 팻말이 하나 붙어있다. ‘남정현가옥 서울미래유산’. 보상이라면 이 작은 팻말이 전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우는 넌지시 나에게 말한다. 저런 것이 붙어있으면 집도 팔리지 않는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