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 큐티
시편 137: 1 ~ 4
울며 버드나무에 수금을 건 이유
관찰 :
1)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다
- 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본 시편은 표제어가 없는 34편의 시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70인역 중 루키아 사본에서 ‘예레미야가 부른 다윗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간구하는 내용과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 등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포로에서 돌아와 훼파된 예루살렘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며 지은 시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본 시편은 58, 109편과 더불어 저주시로 분류됩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의 이스라엘의 애절하고 비통한 슬픔을 토로하면서 매우 철저하고 잔혹한 저주의 형식으로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원하는 시입니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은 바벨론 제국을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발강, 을래강 등과 그 강들을 연결하는 많은 운하들의 주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으로 도시나 성읍에 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또는 노동자로서 운하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는 바벨론에서 포로로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려주는 것을 통해서 애절한 비탄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처량한 모습으로 본 시편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슬픔은 단순한 타향살이의 한이나 실제적인 삶의 고난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통함의 이유는 시온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관계된 것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예배하도록 정하신 곳입니다. 그러한 시온을 생각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를 그리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애통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 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 “버드나무”는 잎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처량한 소리를 내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바벨론에만 서식한 이국적인 나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축제 때에 사용될 정도로 가나안 지역에서도 매우 흔한 나무였습니다. 이 버드나무는 고향에서 늘 봐왔던 친숙한 나무이며, 예루살렘 축제의 절기에 그 잎을 따서 절기를 지키며 즐거워했었던 기억을 새롭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기억이 담긴 나무였기에 이 나무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시온에 머물 수 없는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을 더욱 각인시키는 소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나무이지만 거룩한 성소가 있는 이스라엘 도성인 시온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바벨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였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나무에 수금을 걸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걸었나니”는 ‘허공에 매달다’라는 뜻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된 표현이기도 합니다. 수금이 마치 처형당한 죄수처럼 걸려있다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당시 시편 기자의 마음이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함께 있던 이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수금 연주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최고의 기교로 수금을 타서 하나님을 예배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바벨론에서 귀족들이 자신들의 잔치에서 수금을 탈 것을 요청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벨론의 귀족들을 위해서 도저히 수금을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오른손 엄지가락을 도끼로 잘라내고 연주를 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금을 버드나무에 그렇게 처량하게 걸어두었다는 것입니다.
2) 버드나무에 수금을 건 이유
- 3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은 자”는 바벨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승전 후 정복당한 측의 남자, 여자, 아이, 가축, 재산 등을 소유물로 삼은 것입니다. 대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왔고, 그들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수금의 연주를 청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요청한 것이 아니라 ‘명령’한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중함이 아니라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굴복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을 위해서만 드려져야 할 찬양을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원수들의 조롱 섞인 요청에 응하기 위해, 그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연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엄지가락을 끊고 전쟁 중에서도 소중하게 간직했던 악기인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4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정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대적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의 쾌락과 유흥을 돋우기 위해 찬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문문의 형식으로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단코 그들을 위하여 찬양과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연주하는 날을 고대하고 소망한다는 또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르침 :
1) 시편 기자는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과 재산은 다 바벨론 사람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시온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알고 있던 자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눈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의 도성에서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없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강변에 삼삼오오 흩어져 살면서 궁핍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시온에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을 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시편 137편의 기자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수금 연주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연주할 것을 명하는 바벨론 사람들의 요청 혹은 명령을 그들은 거부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도끼로 자신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까지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음악과 재능을 사용하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의 결기는 놀랍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예배자들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3) 타협하지 않는 신앙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마음이 들도록 연주하면서 그들이 주는 팁(Tip)으로 좀 더 여유있는 포로 생활을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포기했습니다. 오직 주님만 찬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 귀환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 시기를 기억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그 길이 옳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포로 생활의 삶 속에서 시온에서의 예배와 같은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셨으면 얼마든지 바벨론에서도 궁중에서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원하지 않으셨고, 예배자들에게 바벨론에서 수금을 타는 형식의 예배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배자들에게 고통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기쁨이고 감사이고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2) 주님만을 예배하는 것을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신앙의 결기입니다. 그런 신앙의 결기가 오늘날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타협하는 모습은 너무나 흔한 상황에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자신의 소중한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믿음의 결기가 오늘날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런 믿음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채워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가득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 스스로는 그런 믿음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으로 주님만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기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