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5]
스페인 귀족들과 미국의 부유층 여성들도 그녀의 고객이 되었다. 1915년, 유명한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샤넬 의상을 최소한 한 벌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유행에 뒤져 있는 여성이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이 되자 샤넬은 이미 엄청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젠 누구의 후광도 필요 없었다. 1930년, 샤넬은 파리에서 가장 비싼 옷을 만드는 유명 디자이너였다. 2천4백 명의 직원을 두고 26개의 공방(옷을 제작하는 작업실)을 운영했으며, 한 해에 1억2천만 프랑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샤넬의 성공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거기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도 샤넬을 피곤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전쟁이나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단지 옷을 디자인하고 직원들에게는 일한 만큼 돈을 주고 자신의 가치만큼 옷을 비싸게 파는 것이 전부였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한 지 3주가 지난 1939년 가을, 샤넬은 갑자기 캉봉의 매장을 닫았다. 그녀가 탄생시킨 향수 No.5만이 여전히 생산되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수입이 없던 이 시절 이 향수로 먹고 살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44년, 프랑스가 독일에게서 해방되고 전쟁이 끝났지만 샤넬은 여전히 매장 문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나치 장교와 사귀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녀는 곧 석방되어 처벌을 피했지만, 나치와 사귀었다는 것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지고 가야 할 책임이 되었다. 이후 샤넬은 스위스로 망명해 8년을 살았다. 이제 그녀는 60대가 되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샤넬’ 브랜드는 더 이상 유행을 선도하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그녀의 스타일은 잊혀 갔고, 크리스천 디올 같은 신진 디자이너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샤넬의 전성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샤넬은 재기의 의욕을 불태웠다. 그녀는 캉봉가 31번지의 매장을 다시 열었다. 그녀의 복귀는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녀의 성공을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54년 2월5일, 사교계의 부유층 여성들과 패션지 기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샤넬의 복귀전을 보기 위해 모였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옷깃이 없는 검은 수트와 네이브블루의 저지 수트에 사람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론은 이제 샤넬이 늙고 한물갔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샤넬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디자인과 재단에 몰두했다. 단순하지만 세련되고, 입었을 때 편하고, 활동하기 좋은 옷을 만든다는 샤넬의 철학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은 전후의 해방감으로 다시금 화려한 옷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그녀는 결국 그들이 자신의 옷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확신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955년 디올의 ‘New Look’은 유행을 타 한물간 것이 되었다. 얼마 후 디올이 52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기도 전에 ‘New Look’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또한 파리 대신 뉴욕이 패션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옷을 선호하는 미국 여성들의 취향이 샤넬의 명성을 되살려 주었다.
이제 샤넬은 미국의 사교계 명사들과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자신의 옷을 입혔다. 그레이스 켈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여배우들도 샤넬의 옷을 입었다.
유명한 샤넬의 2.55퀄팅백도 이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