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05
■ 2부 장강의 영웅들 (61)
제 6권 꿈이여 세월이여
제 7장 날개를 펴는 초장왕 (8)
손숙오(孫叔敖)의 영윤 취임과 더불어 초(楚)나라의 내정은 부쩍 안정되었다.
"이제 눈을 밖으로 돌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눈을 밖으로 돌린다 함은 중원진출을 말함이다.
초장왕의 물음을 받은 손숙오(孫叔敖)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어째서 때가 아니라는 것이오?“
"왕도란 무릇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은 다만 방편일뿐입니다.
우리 초(楚)나라가 비록 중원의 여러 나라보다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칠 때의 명분이 없습니다.
"대의명분은 만들면 되질 않소?“"대의명분이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주는 것입니다.“
"만일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어찌 되오?"
"만약 그런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왕께서는 패자(覇者)가 되실 수 없습니다.
하늘이 내리고 사람이 행할 때 왕도는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왕께서는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만, 하늘이 내리는 때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날 성득신(成得臣)이 성복 전투에서 패한 것도 때가 아닌 때에 출병했기 때문입니다.
왕께서는 기다리십시오.""아, 패자의 길은 멀고도 멀구나.“
초장왕(楚莊王)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 때 우구(虞邱)가 들어와 아뢰었다.
"정나라 군주가 그 신하에게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정영공(鄭靈公)이 신하의 손에 죽은 내력을 소상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경위를 다 듣고 난 손숙오(孫叔敖)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하늘이 마침내 왕에게 때를 내려주셨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살해했다 함은 천륜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대의명분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곧 출병을 서두르십시오. 반드시 큰일을 이룰 것입니다.“
초장왕도 무릎을 치며 외쳤다."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정(鄭)나라를 치리오!"
...때로 죽음은 아주 하찮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발생한 정영공(鄭靈公)의 죽음이 바로 그러했다.
이 무렵은 정목공이 재위 22년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정영공(鄭靈公)이 새로이 군위에 올랐을 때였다.
정영공의 이복형제 중에 귀생(歸生)과 자송(子宋)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귀생(歸生)과 자송(子宋)은 모두 천한 신분의 여인에게서 태어났으나, 정실 소생인 정영공과
매우 가까이 지내며 많은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정영공(鄭靈公)에게 문안을 드리기로 약속했다.
이튿날 그들은 조문 앞에서 만났다.이때 자송(子宋)의 두 번째 손가락이 저절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귀생이 그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 그거 참 재미나군. 네 손가락은 늘 그렇게 저절로 움직이느냐?자송(子宋)이 반 자랑삼아 대답했다.
- 이놈은 참 신통하오. 이렇게 식지(食指)가 움직이는 날에는 반드시 별미를 먹게 되더군요.
2년 전에도 이놈이 움직이더니 석화어(石花魚)란 것을 먹었고, 지난해에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니 고기를 먹은 적이 있지요.오늘도 궁에 들어가면 별미를 먹을 것이 분명합니다.
두 사람이 조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얼굴을 잘 아는 내관 하나가 재부(宰夫)를 부르고 있었다.
자송(子宋)이 내관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일로 요리하는 사람을 부르느냐?
- 오늘 새벽 백성 하나가 강에서 자라 한 마리를 잡아와 주공께 바쳤습니다. 무게가 2백 근이 넘는
아주 큰 자라이지요.주공께선 그 어부에게 상을 내리시고 자라를 당하에 매어 두셨습니다.
이제 그 자라로 국을 끓이라 명하셨기에 재부(宰夫)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점심때에는 자라탕을 모든 중신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송(子宋)이 귀생을 돌아보며 다시 자랑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이 식지가 움직이는 날에는 영락없이 별미를 먹는다고 말이오.오늘 별미는 자라탕이었구려.
- 정말 신기한 일이네.두 사람은 궁 안으로 들어가 기둥에 매어놓은 큰 자라를 보고 유쾌히 웃었다.
정영공(鄭靈公)에게 문안을 드린 후까지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정영공이 궁금하여 물었다.- 그대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얼굴에 웃음꽃이 잔뜩 피었소?
이에 귀생(歸生)이 조문 앞에서 있었던 자송(子宋)의 식지(食指)가 움직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 그래서 오늘 자라 고기를 맛보게 되나보다 하고 함께 웃었던 것입니다.
정영공(鄭靈公)이 장난조로 말했다.- 식지(食指) 얘기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내 생각에 달려 있지 않겠소?
그 날 점심때였다.과연 정영공은 중신들을 내궁으로 초청하였다.
- 자라탕은 수족(水族)중에서도 특히 맛있는 요리요. 나 혼자 먹기 아까워 그대들을 불렀소이다.
중신들이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물론 그 자리에는 귀생(歸生)과 자송(子宋)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재부(요리사)들이 요리한 자라탕을 날라왔다.
자라탕을 식탁에 내려놓기 전, 한 재부가 정영공(鄭靈公)에게 아뢰었다.
- 자라탕이 한 그릇 모자랍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정영공이 대답했다.
- 자송은 평소 진미(珍味)를 많이 먹어보았다고 한다.
그 자라탕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자송에게는 평상시 음식을 내주어라.
그러고는 자송(子宋)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 내가 모든 중신들에게 자라탕을 대접하려 했으나 한 그릇이 부족하다고 하니 그대가 양보하오.
오늘만은 그대 식지가 영험하지 않은 모양이오.
사실 자라탕이 한 그릇 모자란 것은 정영공(鄭靈公)이 미리 재부에게 시킨 일이었다.
그는 자송(子宋)의 식지(食指)가 아무 영험이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한바탕 웃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아침부터 귀생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식지를 자랑해온
자송(子宋)은 자신만 유독 빠지게 되자 이만저만 무안함을 느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곧 분노와 오기로 변했다.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자라탕을 먹고 있는데,
자송(子宋)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영공 앞으로 걸어갔다.
" ................?"
정영공(鄭靈公)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중에 자송이 손가락을 정영공의 자라탕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자라 고기 한 점을 꺼내어 입 안에 넣고 씹었다.
- 신은 이미 자라 고기를 맛보았습니다. 이래도 신의 식지가 영험이 없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자송은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송(子宋)의 이러한 행동에 정영공은 크게 노했다. 상아 젓가락을 집어던지며 호통쳤다.
- 저놈이 어찌 저리도 무례한가? 우리 정(鄭)나라에 저놈 목을 칠 칼이 없는 줄 아는가!
놀란 것은 귀생(歸生)을 비롯한 중신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 자송(子宋)은 주공과 가깝다고 생각하여 장난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찌 감히 그가 주공께 무례한 마음을 품을 리 있겠습니까?주공께서는 넓으신 아량으로 웃어 넘기십시오.
중신들의 만류에 정영공(鄭靈公)은 더 이상 어쩌지 않았으나 끝내 자송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는 않았다.
궁은 나온 귀생(歸生)은 그 길로 자송의 집으로 달려갔다.
- 주공께서 노여움이 크시네. 내일 일찍이 궁으로 들어가 사죄하게.
자송(子宋) 또한 궁에서 당한 창피를 삭이지 못하고 정영공을 원망하고 있었다.
- 남을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되어 있소.
주공은 자신이 먼저 나를 모욕 주고도 자성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나를 책망한단 말이오?
- 그러하더라도 군주와 신하 사이가 아닌가? 자네가 사죄하게.
이튿날 자송(子宋)은 못 이기는 체 귀생을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신하들 반열에 끼어 아침 문안을 올리긴 하였으나 끝내 사죄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태도 또한 황송해하는 기색이 없었다.불안한 것은 귀생(歸生)이었다.
그는 자송을 대신해서 말했다.- 자송(子宋)은 어제의 일을 사죄하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너무나 황공한 나머지 감히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공께선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정영공(鄭靈公)이 거친 목소리로 응대했다.- 과인이 자송에게 문책당할까 두려울 지경이다.
자송(子宋)이 어찌 과인을 두워워하랴. 이 나라엔 자송만 있고 임금은 없다.
그러고는 소매를 떨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궁을 나오면서 자송이 귀생에게 다가가 말했다.
- 할말이 있으니 오늘 밤 내 집으로 와주시오.공자 귀생(歸生)은 자송이 말한 대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자송의 집으로 갔다. 자송(子宋)은 귀생을 밀실로 안내했다.
- 무슨 일인가?귀생의 물음에 자송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 주공은 나를 몹시 미워하고 있소.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오.
나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선수를 치려 하오.형님께서 나를 도와주어야 하겠소.
귀생(歸生)은 깜짝 놀라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그런 소리 말게.
집에서 기르는 개도 늙으면 죽이기를 꺼려 하는데 하물며 일국의 군주를 죽이겠다니,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는가.나는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자네도 행여 그런 생각을 하지 말게.
귀생(歸生)은 피곤하다 핑계하고 이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송(子宋)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그는 귀생이 정영공의 동생인 공자 거질(去疾)과 자주 왕래하는 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며칠 후, 자송(子宋)은 궁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떠벌려대었다.
- 귀생과 거질이 밤낮으로 만나는데, 그들이 무엇을 의논하는지 알 수 없구려.
장차 사직에 이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까 두렵소.이 말을 들은 귀생은 질겁했다.
황급히 자송의 소매를 끌어당겨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 너는 생사람을 잡으려 하는가? 대체 나와 무슨 원수가 졌나?
- 어차피 형님은 내게 협력하지 않을 사람이오.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 하루라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는 수밖에요.귀생(歸生)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송의 공갈 협박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대관절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 그걸 몰라서 묻소? 지금 임금이 무도하다는 것은 자라탕 일만 보아도 알 수 있소.
형님이 나를 도와 주공을 없앤다면 나는 공자 거질(去疾)을 임금으로 앉히고,
형님을 재상으로 삼겠소.귀생(歸生)은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 나는 모른 척할 테니, 주공 죽이는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이때부터 자송(子宋)은 은밀히 자객을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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