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의 산책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the Beast
날씨 참 좋다.
햇살이 청명하게 내리쬐고 산들바람이 버들가지를 간지르는 4월의 기분 좋을 법한 날이다. 이런 날에는 가급적이면 이성인 친구 한 명을 불러다가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것이 딱 적합하겠지만 지금 내 처지는 그닥 그러기 힘들 듯하다. 솔로들로부터 <샹커플>이니 <저글링 2마리>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 종족인 커플 한 쌍이 내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온다. 커플들의 걸음은 서로의 보조를 맞추느라 어느 정도는 걸음마 같은 느낌이 되곤 한다. 특히 저 커플처럼 남자가 여자 입에 팝콘을 한 개씩 넣어 주며 '자기 아~' 같은 짓거리를 하면서 걸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옛추억을 되살려 그 눈꼴시린 광경에 이해심을 발휘한 다음, 나는 그 커플들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들은 피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의 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그들은 모른다.
나는 피식 하고 웃고 그냥 가던 길을 갔다.
나는 인생이라는 전장에서 막 복귀해 전역신고를 마친 신입 유령이다.
* * *
내가 왜 죽었는지는 응급실에서 날 맞이하고 심폐소생술까지 실시한 의사가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친절히 설명해 주길래 나는 우리 가족들 옆에 서서 그 설명을 찬찬히 듣고서 이해했다. 나는 전체 인구의 5% 남짓한 사람들이 맞이한다는, <수면 도중 원인불명의 심장마비로 돌연사>라는 놀라운 행운을 얻게 된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건 행운이다. 암, 에이즈, 기타 각종 질환, 교통사고를 비롯한 안전사고, 범죄에 의한 사망 같은 불운하고 상당히 고통스러운 죽음의 방식들을 모조리 피해갔다는 의미이니까. 한 80세 정도에 이런 죽음을 맞이했더라면 나는 정말 기뻐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닌가.
문제는, 왜 스물다섯밖에 안 된 젊은 놈이 이렇게 죽어야 하냐는 것이었는데, 의사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심장이 멎었다>가 이유였는데, 담배도 사흘에 한 갑밖에 안 피우고 술도 한 달에 두세 번밖에 안 마시며 약물 같은 건 손도 안 대는 나 같은 대한의 건실한 예비역 총각이 그런 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따져묻고 싶었지만 내 말은 의사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 가족들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며 알아서 다 따져물어 주었기에 나는 의사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광경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허긴, 그냥 심장이 파업해 버렸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어차피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은 자율 신경계라 사람이 어떻게 손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참 내 말을 안 듣는 분들이셨다. 생전에 나는 가끔, '이 좁은 땅덩어리에 무슨 놈의 묘지랍니까. 난 화장이 좋아요. 우리 집 불교 믿잖아요. 그냥 경치 좋은 호숫가에나 뿌려졌으면.' 같은 소리를 하곤 했다(물론 그럴 때마다 재수없는 소리 한다고 욕을 들입다 얻어먹기는 했다. 아무래도 생전에 입이 방정이라 결국 이리 급살을 맞는 꼴이 났다는 어머니의 통곡에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리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하고 나니, 가족들은 끝끝내 나를 땅에 묻어 흙으로 만들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내 몸 내가 처분하고 싶은 대로 좀 해 주지 끝까지 자기들 맘대로네 아 놔 진짜' 라고 외쳤지만 어차피 그런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유해가 장의사에게 넘겨지는 꼴 같은 것은 보기가 싫어서, 나는 그냥 내 방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그러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죽은 자리에 퍼질러앉아 허송세월하는. 무속인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그런 걸 지박령이니 뭐니 부르면서 씻김을 해야 한다고 난리들을 친다지만, 뭐 이제사 그게 다 개수작임을 아니까 자기들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침대에 앉아서 하루를 보냈다. 어머니와 형이 내 방에서 내 물건들을 만지며 울었다. 아직 나라는 사람을 정리해 버리고 싶지는 않으신지, 가족들은 내가 엉망으로 어질러 놓은 물건들을 그대로 두었다.
엑소시스트니, 뭐니, 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눈 뒤집고 방바닥에 누워 게거품을 물고 있는 내 유해를 보고 제일 처음 한 일은 내 몸 안으로 도로 들어가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해 본 것이었다. 내가 죽은 시간이 새벽 3시쯤이었던 것 같고 가족들이 죽은 나를 발견한 게 아침 7시 경이니 나는 4시간 동안 내 몸을 갖고 별 짓을 다 시도했다. 하지만 나의 그 시도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하긴 죽은 놈이 그리 쉽게 다시 살아나면 누가 죽으려 들겠는가. 나는 내 몸은커녕 펜 하나 쥘 수 없었다. 텔레비전을 켤 수도,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다. 책장 한 장 넘기지 못하는 내 손이 물건들을 뚫고 지나갈 때 나는 우울해졌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 장례식에 일단 참관하기로 했다. 내 영정사진을 보는 기분이 생각 외로 더러울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내 장례식에 오는 놈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별 곳에서 다 왔다. 대학 동문회, 전공 학과, 고등학교 동창회, 동아리, 온라인 동호회, 심지어 헤어진 옛 여자친구까지 왔다. 간간이 우는 녀석들도 있었고 그저 무표정한 놈들도 있었지만, 전혀 안 어울리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하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다들 시커먼 양복들을 입고 모인 것이 조폭 같다 싶어서 나는 피식거렸다.
한국의 장례 문화는 늘 먹자판이요, 술판이며, 고스톱 판이다. 하지만 정작 망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먹지도 못하는 귀신한테 지금 장난하나, 싶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가 늘 차례를 지내며 준비하는 제삿상이란 것도 결국은 산 사람들에게 먹이기 위한 음식상일 따름이었다. 애당초 산 자들 틈에 죽은 자는 낄 데가 없었다. 옛 위인들에 대한 기념비며 위인전도 결국은 산 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었고, 망자는 그저 명의만 빌려 주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장례식도, 결국은 나라는 죽은 자를 아는 이들끼리 한 번 더 모이기 위한 빌미일 따름이었다. 내 고교 동창 한 녀석은 고등학생 때부터 노름에 능했는데, 녀석이 빈소에서 벌인 고스톱 판에서마저 흑싸리 패 한 장을 손 안에 숨기고서 하는 걸 보고 나는 기가 막혔다.
발인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귀찮았다. 내 몸이 박스에 포장되어 파묻힌 채 썩어들어갈 그런 데를 내가 왜 따라가나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 무덤이 어디 있는지, 어떤 모양인지 보기가 싫어서였다. 사실 내 무덤이 어딘지 내가 알아서 뭐 하겠는가. 진짜 나는 여기 있는데 말이다. 무덤은 나를 기억하는 남들의 것이다. 이름이 그렇듯이. 내가 보는 앞에서 나를 파묻고 주변에 시커먼 혹은 시허연 옷 입고 둘러서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란 건 뒷산 파고 채무자 묻어버리는 조폭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아 싫기도 하고 말이다.
어찌 됐건, 나라는 인생의 모든 법적 권리의무는 소멸되었고,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통장과 보험과 주식채권(어머니가 내 돈 가지고 가끔 하셨다)과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학적 등록사항은 말소되고 공중폭파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의외로 내 앞으로 되어 있는 돈이 꽤 많았다. 남은 식구들 넉넉히 살겠구나 싶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저승사자 같은 건 안 오나?
며칠을 죽치고 있다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아마 저승이니 내세니 하는 것도 말짱 구라였던 모양이다. 하긴, 죽은 사람에게 저승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 사람이 죽고 나서 받을 허무함이 두려워서 만들어낸 것이 저승일 테니까. 결국 저승보다 더 무서운 것은 허무함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무덤덤했다.
나는 짝사랑을 2년째 하고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복학생이(었으)며 나름대로 복학 후에는 공부 좀 열심히 해 보겠답시고 방과 후에도 전공서적을 들입다 파헤치던 성실모범고학생이(었)다. 그것은 내게는 몇 가지 간절히 원하는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멋지게 취업해서 그녀에게 고백을 해야지 하는 식의, 좀 유치한 것들이었지만 동기부여 하나는 확실하게 시켜 주는 그런 꿈들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들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책장 한 장 못 넘겨서 책을 못 읽는 나 같은 유령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자면, 나는 지금 평생 간직한 꿈들을 박탈당한 처지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이런 설명을 해 봤자 산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할 테니 음식을 예로 들어 보자. 접촉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건 공기조차 몸에 닿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맛을 못 보는 건 당연하다. 냄새도 맛도 촉감도 없이 오직 보이고 들리기만 하는 텔레비전 속, 모니터 속 같은 세상이 지금 나의 리얼 월드였다. 역시 사실 세상은 다 매트릭스였나.
그런 밍밍함, 그런 무덤덤함, 무엇보다도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람들은 나를 추억하고 술자리에서 내 얘기를 하고(그래, 무슨 소리들 하나 싶어서 동문회니 동아리니 술자리 하는 데마다 다 따라다녔다) 가끔 취하거나 혹은 맨정신으로 울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볼 때가 제일 쓸쓸했다. 그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에게 '나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좀 니들 앞가림이나 해라 이 화상들아' 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소요학파의 주업무를 대행하고 있던 죽은 지 열흘째, 나는 비로소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껏 좀 정신이 없어서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당연한 의문. '세상에 유령이 나 혼자인가? 왜 다른 죽은 놈들은 없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나는 그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 * *
"안녕하세요?"
그녀는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평생 동안 길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 왔을 때 보이던 반응대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려다 멈칫했다. 열흘 만에 처음이었으니까. 맞다. 나 유령인데.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 있으니까 아가씨는 싱긋 웃었다. 약간 작은 키에, 붙임성이 있어 보이는 똘망똘망한 타입의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캐주얼 차림의 여자였다.
"아... 놀라시는 거 보니 말 통하는 상대가 처음이신가 보네요? 왜요, 제가 죽은 사람을 알아보니까 신기하세요?"
I see dead people. 식스센스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그럼 아가씨도 죽은 사람인가요?"
"네."
그녀는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서른도 되기 전에 죽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만치 시원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 웃음이 나를 기분좋게 했다. 문득 나는 죽은 뒤로 피식거리는 비웃음 외에 다른 표정을 지을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을 때 동반되는, 입 주변의 피부와 근육이 당기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생경하다. 내겐 근육도 피부도 없으니까.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조금 엉뚱한 말을 꺼냈다.
"가죽잠바 멋있네요?"
"예?"
그녀는 내가 걸치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가죽잠바요. 입고 계신 거."
"아..."
희한하게도, 나는 가죽잠바를 입고 있었다. 어떤 물건도 건드릴 수 없었는데, 나는 내내 이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설명을 했다.
"아무 물건도 쓸 수 없지만, 사실 사람에게 옷이란 건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입고 있는 옷이 자신을 말해 준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생전에 즐겨 입던 옷을 입은 채인 모습으로 살게 돼요. 맘에 안 들면 바꿀 수도 있구요. 가죽잠바를 많이 좋아하셨나 봐요?"
옷. 나를 둘러싸는 껍질이자 나를 드러내는 깃털이지.
"여름 빼고 늘 입고 다녔지요."
"그럼 그럴 만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여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가씨는 외관상 지금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그닥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나를 알아본 걸까. 나는 그걸 질문했다.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대답했다.
"간단해요. 거울 본 적 있어요?"
"생전에는요."
"그럼 아직 충격 안 받았겠군요. 거울에 안 비치는 자기 모습 보고서. 다들 그거 보고 무지하게 놀라는데."
아, 그렇겠구나, 참. 미처 생각을 못 했네. 여자는 말을 이었다.
"빛이 그냥 통과해 버려서 그렇죠. 따라서 우린 그림자가 없어요."
그것도 미처 생각 못 했다. 평소에 살면서 자기 그림자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가. 그림자와 거울을 박탈당했다는 상실감이 약간 더 추가되었다. 평소엔 별 관심도 없던 사물들이었지만. 여자에게도 그림자가 없었다. 이 화창한 봄날에. 여자는 휘파람을 가볍게 한 번 불었다. 유쾌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럼 실습 한 번 해 보죠. 지나가는 사람들을 둘러봐요."
"예?"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주변 사람들을?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주변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 적잖은 수가 그림자를 달고 있지 않았다. 오, 이런 제기랄. 왜 유령이 안 보이는 걸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면서 내가 이해했다는 사실을 안 모양이었다.
"그래요. 세상은 죽은 사람들로 가득해요. 영어 표현에 Join the Majority라는 말이 있죠. 그 말이 얼마나 어두운 농담인지. 늘 죽은 사람이 더 많지요. 그러니까, 혼자 외로워하는 것보다는 죽은 이들에게 동참하는 게 나을 거에요."
"동참이요?"
아가씨는 검지를 까닥여 보였다.
"죽은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놀아요. 산 사람하곤 당최 대회라는 게 안 되니까. 술도 없고 담배도 없지만,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얘기만 하고 놀아요. 아주 플라토닉하죠. 어차피 닿을 몸이 없으니 신체접촉도 불가능하니까요."
말꼬리의 끝에서 그녀는 키득거렸다.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문득 나는 내 소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여러 가지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제 이름은..."
갑자기 그녀가 두 손바닥을 내저었다.
"살아생전의 이름 같은 거 서로 말하는 거, 이 바닥 사람들 별로 안 좋아해요."
"예? 왜요?"
"이름은 산 사람들이 우릴 이용해먹을 때나 쓰는 거거든요. 김 부장 제삿날, 이 선생 살았을 적엔... 뭐 이런 식으로요. 산 사람들이 우리 이름 부르는 거 계속 듣다 보면 기분 무지 나빠지거든요. 그러니까 좀 유치해도 닉네임이나 하나 만들어서 쓰세요. 아이디처럼."
헛웃음이 나왔다. 인터넷도 못 하는데 웬 아이디.
"당신도 닉네임이 있어요?"
"친구들이 붙여 줬어요. 꼬랑지라고. 머리가 이래서요."
그녀는 웃으며 밤색으로 염색한 포니테일을 보여 주었다. 염색 빠질 일도, 머리묶음 풀릴 일도 없는 영구적인 헤어 스타일. 꼬랑지 양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초짜 귀신 같아 보여서 좀 도와 주려고 참견을 했어요. 보통 우리는 나이트클럽이나 콘서트 같은 데 많이 가요. 그러니까 죽은 이들 사귀고 싶으면 그런 데 가 보세요. 괜히 아무도 안 가는 음침한 뒷골목이나 공동묘지 같은 데 가서 혼자 놀지 말고요."
"나이트에 콘서트, 축구장이라... 왜죠? 유령이랑은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후후, 곧 알게 되겠지만 설명해 줄게요. 우린 산 사람하고는 대화가 안 통하죠. 하지만 죽은 사람들끼리만 얘기하는 건 재미없어요. 그러다 보면 산 사람들이랑 막 같이 놀고 싶어지고 그래요. 어쩌겠어요?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에 가는 거죠. 파티장이나 술집 같은 곳은 먹고 마실 수가 없으니 안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남는 건 음악을 함께 듣거나 축구경기를 함께 응원하거나 할 수 있는 곳들뿐이죠. 2002년에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축구장에 귀신들이 우글거린다는 소리를 들으니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올까. 나는 하하하 하고 웃어 버렸다. 그 때, 문득 해묵은 의문이 떠올랐다.
"아, 그럼 저승 같은 데는 안 가나요?"
그녀는 약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그걸 되게 궁금해하는데, 아마 그런 거 없나 봐요. 그렇지만 분명히 우리도 사라지기는 하는 거 같아요. 몇십 년쯤 지나면 언제부턴가 안 보인다고들 하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늙지는 않는다는 거죠. 나 몇 살 같아요?"
에, 무슨 소리지? 그제서야 나는 이 여자가 겉보기랑 나이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어 죽어서 오래 지났다면...
"글쎄요?"
"스물여덟에 죽은 게 삼십 년도 더 전이에요.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쉰아홉인가? 암튼 그래요. 뭐 나이라는 게 별 의미 없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일찍 죽으면 겉모습이라도 젊어서 좋긴 해요. 그게 정말 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와우. 아줌마와 할머니의 경계선이네. 말투고 태도고 그렇게 안 보이는데. 닉네임이 꼬랑지인 아줌마 유령은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을 맺었다.
"여튼, 즐거운 생활 되길 바랄게요. 우리의 산책은 꽤 길거든요. 나도 삼십 년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다 보니 지겨워져서, 이제는 아무 데나 참견하고 다니는 재미로 지내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시간 보내세요. 좋은 하루."
"아... 안녕히 가세요."
꼬랑지 여사는 그렇게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유령은 인파 속으로 몸을 감추기가 참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어깨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 나도 슬슬 방랑이나 해 볼까.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 * *
정처 없이 그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은 것이 있었다. 책, 인터넷, 텔레비전, 어떤 것도 내겐 별 의미가 없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지 볼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유혹이다. 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 무임승차, 무단침입, 불법도청, 뭐든지 가능하다. 사실 매체들이 전달하는 내용들은 늘 오기와 연출과 위조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직접 보면 되는 것을. 시간도 많고, 돈도 필요 없는데 내가 사하라 사막이건 태즈매니아 섬이건 못 가볼 곳이 어디겠는가. 유람이나 하자.
걱정했는데, 버스나 지하철, 자동차 같은 것은 탈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들은 '물건'보다 '장소'의 의미가 크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긴 모든 접촉이 불가능하다면 난 땅 위에 서 있지도 못할 테니까. 무게도 없는 유령이 땅 위에 서 있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무게가 없다고 하늘을 날 수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사하라나 태즈매니아는 좀 있다가 가 보기로 하고, 우선 버스를 타고 좋아하던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위치는 알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곳으로.
짝사랑이 상사병이 되어 죽어버리고 나서 좋아하던 여자에게 집착하는 총각귀신의 흉내를 내려는 건 아니었다. 난 그저 그 아이의 집 안이 어떤지가 굉장히 궁금했을 뿐이다. 화장실이나 침실을 엿보면서 변태적인 관음증을 충족시킬 생각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집이라는 공간은 늘 낯설고 신비한, 접근 불가능한 성역 같은 곳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도 두근거릴 심장이 없어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고 발개질 볼이 없어서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다는 것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유령은 집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벽이나 기둥 같은 것들도 무시하면서 돌아다닐 수야 있었지만 나는 그런 비인간적인 짓이 하기 싫었다.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심리의 발로라고 자가심리진단을 내리며 나는 해 저문 아파트 단지 내를 헤메다가 복도를 주욱 돌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곧이어 후회했다. 버튼을 못 누르잖아. 나는 투덜거리며 계단을 이용했다. 어차피 힘도 안 들고 다리도 안 아프니까 상관은 없었다. 왜 못 날아다니는 거야, 하고 좀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서서, 호흡 기관도 없어 순전히 상징적인 의미뿐인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그녀의 생일파티를 보게 되었다. 아, 이런. 오늘이었구나.
생일 케익을 앞에 둔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나 때문이리라. 나는 졸업한 그녀의 대학 동기였다. 이런저런 일도 같이 하면서 많이 친해졌었고, 그러다 보니 한심스런 남자라는 생물의 일원답게 그만 그 녀석이 이성으로 보이게 되었고, 하지만 친구 관계까지 잃을까 두려워 소심하게 그 맘을 접은 채 살아왔다. 좋은 친구,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좋은 친구를 생일 열흘 전에 잃은 여자의 얼굴이란 건 참 보기 안쓰러웠다. 급사한 게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아마 그녀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일부러 꽤 거창한 잔치를 꾸민 모양이었다. 스물다섯의 대학생은 사실 생일파티 같은 거 잘 안 하게 되며, 집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촛불 앞에서 힘 없는 미소를 짓는 그녀의 촛불 빛으로 노랗게 물든 얼굴을, 옆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촛불을 불어 껐고, 폭죽이 터졌고, 거실의 불이 도로 켜졌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우우 하는 환호성도 질렀다. 나도 거기에 동참했다. 나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책상이니 침대니 인형이니 하는 가구들을 죽 둘러보고, 아 얘는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하는 다분히 무감동한 생각을 하면서 쓸쓸하게 그 곳을 나왔다. 뭔가 비밀스런 것을 엿보러 왔다가 슬픈 광경을 보고 돌아가는 기분은 그닥 좋지 않았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영영 술도 한 잔 못 하겠구나. 그 좋은 것을.
유령들이 이래서 축구 경기장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 *
집에 며칠 더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 울었고, 아버지는 내내 무표정하시다가 밤중에 혼자 위스키 꺼내 놓고 눈시울만 좀 붉히셨다. 형은 온종일 게임만 하다가, 가끔 모니터 앞에 고개 푹 수그리고 울었다. '초상집 분위기'라는 말이 실감이 갔다. 더 이상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이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죄책감이 들어, 나는 집을 나섰다. 좀 돌아다니다가, 보고 싶어지면 다시 올게요. 그 때까지 몸 성히 잘들 있어요. 나는 들리지 않을 부탁을 중얼거렸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호기심이 발동해 다리 위를 달리던 지하철에서 뛰어내려 보았다. 물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혹시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려나 싶어서 해 본 시도였지만, 나는 젖지도 않은 채 강바닥까지 내려갔다. 물살에 몸이 쓸리지도 않았고, 하지도 않는 호흡이 막히지도 않았다. 갑옷 때문에 강바닥에 가라앉으면 숨을 참은 채 강물 속을 걸어 반대편 기슭으로 걸어나온다는 남미의 아르마딜로마냥 나는 어슬렁거리며 강물 속을 걸었다. 한강 속에는 온갖 것이 다 있었다. 버려진 물건들도 많았고 산 물고기와 죽은 짐승들도 많았다. 나처럼 강물 속을 걷는 유령 같은 건 없었다. 이런 칙칙한 곳에 올 이가 몇이나 되겠나 싶어서 피식 웃었다.
나는 한강을 한참 걸어서 반대편으로 나와 다시 전철을 탔다. 왠지 강물 속에 미련이나 아쉬움, 쓸쓸함 같은 것들을 던져두고 나온 것처럼, 가슴이 홀가분해졌다. 그래, 어차피 산 사람들이 사는 거야 자기들 몫이고 참견 하나 못 하는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네들이 죽으면 그 때 가서 '여, 오랜만이다.' 해 주면 될 일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 같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즐기면서 사는 인생, 자, 시작이다' 라는 광고음악 구절이 생각났다. 내 경우엔 살아 있지 않으니 '인생'은 아니지만. '산책'으로 바꾸자. 여행도 아닌 산책. 준비물이고 경비고 뭐고 아무 것도 필요없고 위험이나 불안 요소도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산책 말이다.
"즐기면서 하는 산책, 자, 시작이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유령 하나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나는 그냥 싱긋 웃어 주고는 산책의 구체적 계획을 짰다. 우선은 사하라 사막이다. 전부터 사막이 꼭 가 보고 싶었거든. 가죽잠바를 입고 사막을 거닌다라. 산 사람은 못 해 볼 짓이다. 그렇잖은가?
가죽잠바를 걸친 유령 하나가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산책은 이제 시작이다.
- the Beast
|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냉소적인 듯 보였는데, 아무튼 주제부터 시작해서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씁쓸하면서도 당기는 맛이 있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