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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명의 진액인 정(精)의 뿌리가 오장육부 중, 양쪽 신장(腎腸)이다. 이곳에서 기(氣)가 발동한다. 이를 신간동기(腎間動氣)라고 한다.
정(精)이란 남자의 정자,호르몬, 골수의 개념을 포괄하고, 여자의 경우도 똑같다. 오장육부, 두뇌, 세포하나, 뼈마디, 머리털 하나까지 모든것을 관장하는 것이 신장의 수(水)기, 정(精)이다.
정(精)이 충만해야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푹 자고, 몸이 팽팽 잘 돌아간다. 병에도 안 걸린다. 하지만 정(精)이 파괴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천지의 사마(邪魔)가 날뛰고 온갖 병이 들어서 결국에는 단명하게 된다.
정(精)을 모으고 축적하고 순화해야 한다. 그래야 의기(意氣)가 강해진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정기(精氣)가 무너지면 지각문(知覺門)이 닫힌다. 한민족의 수행법에서 말하는 수행은 성(性)과 명(命) 자체를 닦는 것이 아니라 우리몸의 정(精)을 관리하는 문제다. 정(精)을 근본으로 해서 닦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음란문화는 인간의 정(精)을 파괴하고 분열시킨다.
수행의 근본은 정(精)을 굳히고 맑히는 가의 문제로 떨어진다. 정(精)을 순화해야만 공부가 된다. 천지일월이 나를 만들어주고, 나에게 생명을 내주는 그 모든 열매가 정(精)이다. 정기를 잘 간직해야 여기서 힘도 나오고, 생명력도, 지혜도 나온다.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 정(精)이다.
수행을 통해서 본래의 성(性)과 명(命)이 하나였던 그 경계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 생명력이 우주와 더불어 하나인 영원의 경계, 그 자리는 무한의 광명 그 자체요, 성(性)과 명(命)이 하나인 상태다.
그럼 성(性)과 명(命)은 무엇이 다른가?
밝은 모습 자체는 성(性)이고, 그 모습이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것, 그것을 하나의 생명력으로 표현할 때 명(命)이라고 한다.
수행이 아니면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수행은 내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유형의 정(精)과 무형의 마음(心)을 닦아 생명의 본래 자리로 들어서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결국 모든 것이 마음 닦는 공부로 떨어진다.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정(精)이 변화된다. 정(精)이 굳어지고 맑아지고 승화된다. 그러면 그만큼 높은 성(性)과 명(命)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의 궁극은 생명의 본성인 성(性)과 명(命)을 회복하는 것이다. 생명(生命)의 원래 말이 성(性)과 명(命)이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내 생명의 밝은 모습(性),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생명력(命)을 회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나의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 이것이 우리들 삶의 목적이다.
인간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본래 모습, 성(性)과 명은 하늘땅과 같다. 어머니 뱃속에서 천지와 더불어 호흡할 때는 성(性)과 명(命)이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 인간적인 호흡을 시작하게 되고, 본래 우주와 하나인 성(性)과 명(命)이 분리된다.
눈을 뜨고도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적인 어둠에 휩싸여 그 이면의 세계를 전혀 못 보게 된다.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만큼 밝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내 마음의 근원인 성(性)이 후천적인 성(性)으로 바뀌면서 어둠의 세계로 떨어진다. 또한 하늘같은 무한의 생명력인 내 명(命)이 불과 몇 십 년 살다가 병들어 죽는 유한의 명(命) 자리로 떨어진다.
온갖 인생의 시련과 역경, 고난의 파도를 만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다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함으로써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성(性)과 명(命)을 회복한다. 천지와 같은 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내 생명의 기반인 성명정(性命精) 세 요소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인 작용 요소로 보면 심기신( 心氣身)이다. 마음心과 기氣와 몸身을 닦는 것이다. 내 몸(身)을 닦는 것은 구체적으로 정(精)을 닦는 것이고, 마음(心)을 닦는다는 것은 원래의 생명력(性)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의 기(氣)를 닦는다는 것은 하늘땅의 무한의 생명력(命)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본래 우주가 태어난 조화세계를 신神이다, 도道다, 하나님이다, 부처다 등 여러 가지로 얘기한다. 그것을 우리 순수한 한글세계에서는 ‘알’이라고 한다.
태초에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알’에서 마음이 나왔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아프다.”“내 마음이 기쁘다.” 할 때 ‘맘’이란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자리 ‘알’에서 왔다. 그러므로 마음은 온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닦는다는 것인가? 닦는다는 것은 이미 더러워진 걸 깨끗하게 씻어낸다는 뜻 아닌가. 우리의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우리의 생명을 끌고 나가는 주인이 마음이다. 그런데 그 주인의 깨어있는 경계가 시시각각 다르다. 잘 때와 일할 때가 다르고, 무엇에 집중할 때와 흐리멍덩하게 딴 생각할 때가 다르다. 밥 먹으면서 재미있는 뉴스를 듣는다든가 좋은 영화를 본다든가 할 땐, 뭘 먹고 있는지조차도 잊어버린다. 보는 쪽으로만 정신이 가 있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몸 속에서 사물을 느끼고 터득하고, 뭘 배우고 아는 인식 작용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간의 감각 작용은 너무도 변화무쌍하다. 서양 명언에 이런 말이 있다. “(Now and here.지금 그리고 여기) 마음을 닦으려면, 이 땅에서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바탕으로” 생명, 진리, 깨달음, 고통, 자유, 구원, 그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명제는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곧 인생은 지금 여기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말이다.
불가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마나식 그리고 알라야식을 얘기한다.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오식五識이다. 안식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고, 이식은 귀로 들어 아는 것, 비식은 코로 냄새 맡아서 아는 것,
설식은 혓바닥으로 맛을 봐서 아는 것, 신식은 온몸으로 느껴서 아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이 첫 번째 안식眼識이다.
눈으로 강력한 게 들어오면,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수행을 할 때 집중 못 하고 자꾸 딴 생각으로 빠져버린다.
신유神癒를 하고 신유를 받아보면 그걸 안다. 가장 큰 문제가 음란한 생각, 음기를 품는 것이다. 일상에서 “무엇을 보되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무얼 본 게 마음에 걸려있으면, 마치 오장에 음식이 걸려있는 것과 같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온몸으로 느끼는 안이비설신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사물이 우리 의식에 들어오는데, 그것이 정상적으로 순화되어 내 생명을 기쁘게 하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고, 나를 깨어있게 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게 전부 마장魔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오식 다음에 의식이 있고, 일곱 번째 마나식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연결해주는 중간 고리가 마나식이다. 그리고 제8식이 인간의식의 바탕, 생명 의식의 창고 역할을 하는 알라야식이다. 그걸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장이란 저장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우주에서 태어나 살아온 삶의 전 과정이 의식의 바다인 장식, 무의식에 전부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수행을 하다보면 어릴 때 생각이 그대로 다 난다. 비록 어려서 말은 못해도,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문득 자연과 하나가 됐었다면, 그 때의 장면이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 닦는다는 것은, 첫째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몸의 기운이 수승화강의 과정을 거쳐 정화된다. 생리학적으로 우리 몸의 기능은 삼초三焦로 나누어진다.
폐, 심장, 머리가 상초上焦이고, 비위 중심의 소화기관이 중초中焦, 방광, 신장 등 배설, 생식하는 기관이 하초下焦다. 즉 상초에는 신神이 작용하고, 하초에는 신이 생성되는 힘의 근원, 내 몸이 생명활동을 하는 에너지의 근원인 정精이 자리잡고 있다. 그게 내 몸 속의 천지다. 정精은 곧 땅이요, 신神은 곧 하늘이다.
정신! 인간은 몸 속에 하늘과 땅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우리 몸의 천지 기운이 밝아지면, 사람을 바르게 보고, 사물의 내면과 본성을 보기 시작한다.
둘째, 수행을 하면 모든 생명의 본성인 신성(divinity)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마음은 체와 용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체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 등, 주변의 사물과 관계를 맺고 마음이 작용하기 전 단계, 근원 마음이다. 그것을 성, 본성이라고 한다.
“야~, 그래도 걔는 바탕은 착해. 본래 마음은 그런 애가 아니야. 본성은 착해.”이런 말에서처럼, 본성이란 ‘본래 성품’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의 본래 성품은 같은 경계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늘이나, 땅이나,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돌멩이나, 흙덩어리나, 흐르는 물이나, 타오르는 불이나, 저 태양과 달, 은하계 별들이나, 그 본성은 모두 똑같다는 말이다.
본성은 열려있는 우주생명 의식이다. 대우주와 완전히 하나가 돼 있는 환한 불덩어리, 그러면서도 아주 시원하고 의식이 평온해지는 대광명의 경계다. 거기 보면 우주 만유가 다 살아 있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 일심 경계, 그런 절대 평등의 경계, 절대 순수 의식에 돌아가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선후천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이러한 본성에 머무르려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업을 정화해 나가야 한다. 누군가를 억울하게 했거나 죄를 지었으면, 청수 떠놓고 빌면서 모든 걸 풀어야 한다.
마음 닦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죄업을 풀고, 자기의 후천적인 성품 -그걸 기질이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환경적인 요인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문제되는 것을 정화해서, 천지율려의 조화 속에 일체를 이루는 본래의 자기 생명의 모습, 즉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불가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그 다음, 하나의 개체로서 구체적인 의식활동을 하는 것,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걸 정(情, emotion)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동하기 전의 본래의 근원 모습인 본성과, 구체적으로 사물에 동화되어 작용할 때의 감정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불가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감정활동에는 오식五識과 의식, 그 다음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제7식 마나식, 그리고 내 생명 의식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바탕인 장식藏識, 알라야식이 있다. 나무로 얘기하면, 잔가지들이 오식(안이비설신)이고, 잔가지들 아래로 뻗은 줄기가 의식, 의식의 줄기와 뿌리를 연결하는 가운데 큰 줄기가 마나식, 그 다음 뿌리가 알라야식이다.
뿌리에서 모든 게 뻗어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말이나 행동, 습관들은 그 사람이 과거에 행해 온 모든 것이 바탕이 되어, 저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으려면 자기의 과거 인생사, 더 나아가 전생부터의 어둠까지 모두 씻어내고, 잘못한 것, 죄 지은 것을 정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기초 작업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수행을 통해 내 몸 자체를 정화해서 의식의 경계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수행하려고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안식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또 몇 미터 이상만 떨어져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냄새도 일정한 거리 이상이 되면 맡지 못한다. 이것이 보통 세속 중생들의 몸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수승화강이 되면서, 내 몸의 음양 기운이 개벽되어 율려도수를 회복하기 시작하면, 혼탁한 음양이 순수음양으로 정화된다.
그렇게 되면, 눈을 감아도영적인 신도 경계가 환히 보인다. 또 깊은 밤 태을주를 읽는데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뚝 소리가 난다. 귓밥이 스스로 파헤쳐져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또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히말라야, 알프스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춤추면서 자기들끼리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히말라야, 알프스 산이 여기서 얼마나 먼가. 그뿐이 아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내 의식의 경계가 천지의 대생명과 하나가 되어, 내 생명이 온 천지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체득하게 되는 경계가 있다. 정신이 확 깨져서 수도를 잘 하면, 어느 순간 내 몸이 없어진다. 내 몸뚱아리가 온 우주 생명 자체라는 열려있는 의식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첫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된다.
수도修道의 궁극의 목적은 세속적인 말로 도통道通이다. 불교의 도법은, 오로지 견성見性을 하려고, 부모형제도 세상도 다 등진다. 도통을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그러면 도통 공부하는 그 정신 바탕이 어떻게 돼야 하느냐? 그 바탕은, 욕심을 버리고 나와 자연이 합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수련이란 자기가 자기 심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명칭이야 참선이라 하든, 수도, 수련이라고 하든, 뭐라고 명명하든지 간에 다 일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직 일심으로써만 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 고유의 수행법인 태을주 수행을 해보면 알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왜 그런지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난다. 잡념을 버려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잡념을 버리기는커녕 엄마 젖 먹을 때 생각까지 다 나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다 잊어버렸던 게 정신이 아주 말쑥해져서 더 많이 생각나는 것이다. 열 배 스무 배 더 난다. 그러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게 없어진다.
그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물 한 동이 떠다가 하루고 이틀이고 놔두면 물 찌꺼기는 가라앉고 아주 맑은 물만 남는 거와 같다. 그것과 같이, 수도할 때는 세속적인 혼탁한 생각이 다 가라앉아야 한다.
화식火食, 불로 익힌 밥을 먹고 세상 사물을 접하면서 여러 십 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정신이 혼탁해지는데, 물 찌꺼기 가라앉듯이 잡념이 없어져야 한다.
지속적으로 수도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망형망재’가 된다. 나의 형상도 잊어버리고 나의 존재도 잊어버린다. 망형망재가 되면 ‘물아物我가 구망俱忘’이다. 사물도, 나라는 것도 함께 다 잊어버린다. 아무 것도 없다. 자연하고 내가 합치되어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훤하게 다 보인다.
광명이 어느 정도까지 되느냐 하면, 1년 중 가장 밝을 때가 가을인데, 말쑥한 가을하늘처럼 환하다. 다시 얘기하면, 저 십 리 밖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앉아서 솔잎 갉아먹는 것까지 환하게 보인다. 그렇게까지 광명이 열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자꾸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다른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까지 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수도를 하다 보면, 기혈 순환하는 데 따라서 신체의 온도가 40도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 때 손으로 살을 대면 껍데기가 벗겨져 버린다. “그러면 생리학상으로 큰일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지만, 괜찮다. 그렇게 해서 다른 영적인 세계에 가면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고, 그런 경계를 넘어서면 공부가 금방 된다. 과거에 한 일주일을 한도로 수련을 시키는데, 어지간하면 사흘이면 다 개안開眼이 됐다. 열 개開 자 눈 안眼 자, 개안은 신명세계를 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선조들은 그걸 ‘개안’이라고 한다. 개안이 되면 신명을 본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유체이탈을 하여 영으로 대전에서 부산 누구의 가정도 찾아갈 수 있다. 개안開眼이라 하는 것이 도통하는 첫 관문이다. 그런데 개안시키는 게 원 목적은 아니다. 잘못 개안시켜 놓으면 게중에는 틀림없이 허튼 사람이 나온다.
개안이 되면 신을 본다. 신을 보니 참 요지경 속이다. 학을 타고 천상 구경도 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마음 약한 사람들은 잡신한테 걸려든다. 사람이 어디 좋은 사람만 있는가? 젊은애들은 연애도 걸고 싶고, 그걸 표현 못해서 그렇지, 그러면 그런 신명이 달려붙어 버린다.
또 나만 잘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역신逆神이 붙는다. “네가 잘하면 천자가 된다. 네가 교주도 하고, 네 방식대로 하면 구제중생도 할 수 있다. 판 하나 차려라.” 하고 홀리기도 하고, 별스런 일이 다 생긴다. 개안시켜 놓으면 관리하기도 어렵고, 그러다 잘못되면 사람을 버린다.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점은 있다. 신명을 보기 때문에 ‘야, 정신세계라는 게 이렇구나. 이건 참 절대적이다.’ 해서, 삐꾸러지지만 않으면 새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데, 신명세계神界에 다녀와서 옛날 고고학 한문을 줄줄 내리꿰는 사람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자기 성명도 못 쓰는 사람이 주역, 시전, 서전을 다 읽는다. 그게 사람마다 천태만상으로 나타나지만, 예를 들면 인간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풍모도 잘 생기고 인자하고 위대해 보이는 분을 접촉하게 되는 수도 있고, 또는 자기 조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잡념이 없고 바른 기운을 갖고 사는 사람은,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때에는 그 기운이 보여지기도 한다. 미래상황을 볼 수 있고, 영적으로 천상에 올라가 영계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또 어느 경지까지 가면 자기의 전생도 볼 수 있다.
그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러 가지를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에 너무 집착하면 못 쓴다. 그러다 잘못 되면 삐뚤어진다. 또 거짓말로 보여지는 것도 있다. 그런 데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
수도는 천지신명과 더불어 하는 것이다. 무형인 정신은 그렇게 되는데, 체질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오느냐?
첫째로 사람 인체 구조라 하는 것은 수화水火로 되어져 있다. 사람은 물기운과 불기운, 두 가지 기운을 가지고 산다. 사람의 콩팥이 양쪽으로 하나씩 붙어 있는데 콩팥 하나는 물을 맡고 있고, 하나는 불을 맡고 있다. 그런데 본래 물은 밑으로 내려가려 하고 불기운은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다. 수화水火의 성질이 그렇다. 그렇건만 시간적으로 앉아서 수도를 하다 보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된다. 수화 기운이 뒤집어져서 물기운은 올라오고 불기운은 내려가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수승화강이 더 잘된다. 제대로 하자면 물기운은 올라오고, 불기운은 아주 착 가라앉아서 다 꺼져야만 된다. 그래야 체질변화가 완전히 된 것이다. 며칠 수련해서는 그렇게까지 될 수 없다. 그건 시간이 필요하다. 수승화강이 어떻게 됐느냐 하면, 수기水氣가 척추를 통해 올라온다. 그러면서 이 얼굴에서 만의회집지상萬蟻會集之像이 일어난다. 만의회집지상이란 일만 만 자, 개미 의 자개미 의 자는 벌레 충蟲 옆에 의라는 의義 자를 쓴 자다 모일 회 모일 집 갈 지 형상 상, 일만 마리의 개미가 모여드는 형상을 말한다.
만의회집지상이 되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느냐? 개미가 얼굴에 기어다니면 섬섬대서 못 배긴다. 그런데 이건 피부 밖에서 그러는 게 아니고 피부 속에서, 살 속에서 개미 한 만 마리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섬섬섬섬섬섬 한다. 가려워서 도저히 못 배긴다.
그게 바로 수기水氣가 순환循環하느라고 그런 것이다. 만의회집지상은 아주 미세한 세포에까지 수기가 올라오면서 기혈이 작용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몸의 수분은 기氣가 끌고 다닌다. 기氣가 생동해서 수분을 끌고 와수기(水氣)가 상승하는데, 그게 얼마 지나면 완전히 수승화강이 돼서 체질 개선이 된다. 그 경지에 가면 그런 현상이 다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주 피부도 말쑥해지고, 눈도 유리알보다 더 반질반질하니 광채가 난다. 수도하는 사람은 눈을 보면 안다. 또 한편으로는 인당印堂이 얼음을 갖다 얹은 것 모양 시원하다. 또 백회 부분을 정문頂門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서 아주 맑은 기운이 뻗쳐오른다. 정문은 또 삼리三離라고도 하고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그 이 자가 이방離方 이 자인데, 남쪽을 뜻한다.
턱 아래쪽이 북쪽이고, 위쪽이 남쪽이다. 기운은 정문頂門을 통해 내려온다. 그래서 정문頂門을 쥐구멍이라고도 하는데, 수련을 하면 이 쥐구멍으로 기운 오르고 내리는 걸 느낀다. 심령으로 통을 하고 육체적으로 수승화강이 돼서 체질이 완전히 변화되면, 청명한 맑은 기운이 하늘까지 꽨다. 체질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변화한다.
수도되는 과정을 좀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질·량·시·리·변質量時理變, 다섯 단계를 거쳐야 한다. 질은 바탕 질質 자, 양 자는 헤아릴 량量 자다. 또 때 시時 자, 이치 리理 자, 변할 변變 자, 이렇게 다섯 단계가 있다.
질質이라는 것은 바탕이다, 예를 들어 물주전자라고 하면, 물주전자가 실물 그대로 뵈는 게 질質이다. 또 량量이라고 하면 물주전자가 어느 때에 어떻게 변해지느냐, 이화理化가 되느냐, 그런 다섯 단계를 파악하게 되면 그게 도통이다.
그렇게 되면 미래도 알 수 있다. 묶어서 자연섭리하고 내 정신이 합치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섭리를 통투할 수 있다. 그걸 문자화해서 얘기하자면 “상투천계上透天界하고”, 위로는 하늘 경계를 뚫어볼 수 있고, 또 “하철지부下徹地府”, 땅 밑바닥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경지를 간다.
오늘도 수도하고 내일도 하고, 한달 후에도 하고 반 년 후에도 하고 쭉 하다보면, 보호신이 온다. 그 시기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 보호신이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비몽사몽간에 꿈 같으면서도 꿈이 아닌 상태에서, 참 지상에서는 생전 볼 수 없는, 갑옷 입고 투구 쓴 신장神將이 자기 사는 집 주위를 맴돌기도 하고 방안에 들어오기도 한다. 보호신은 한 번 붙으면 죽을 때까지 붙어 있다. 그러다 그 사람 죽으면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불학이능문장不學而能文章하고, 배우지 않고도 문장이 되고, 부점이지길흉不占而知吉凶하고, 점치지 않아도 좋고 그른 것을 안다. 도통은 신통神通이다.
인간이 신통을 하게 되면, 인간과 신명이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식이 부족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큰 공덕을 쌓으면, 그 공덕에 걸맞는 대신명이 응기하여 신통이 열리기 때문에, 사람이 그 대신명의 지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경우에 따라 대문호도 될 수 있는 것이다(神人合一).
그런데 수도 공부를 하려고 보면, 쉽게 얘기해서 무슨 마魔라고나 할까, 그런 게 자꾸 낀다. 공부하다가 병신 되는 사람이 숱하게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올바른 공부를 하려면,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사수師首가 있어야 한다.
수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 심법이 발라야 된다. 공부하려고 앉은 사람이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내가 공부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 하는 그런 나쁜 생각을 가지려면 숫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
간혹 공부하는 사람들 중엔 공부도 못 하고, 입 삐뚤어지고 눈 삐뚤어지는 구안와사 같은 병도 걸리고, 병신 되는 사람이 있다. 또 수도라는 걸 잘못하면 귀신한테 홀려서.”살살 꾀어내면 그냥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사도邪道, 곁길로 빠지는 사람도 그렇게 많다. 한 백 명 공부하면 반 이상은 곁길로 빠져 버린다. 그게 왜 그러느냐?
세간에 사람 뚜겁을 쓰고 나온 사람 쳐놓고 원억을 맺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원한 맺힌 신명들이 원한을 풀지못해서, 무슨 코만 있으면 달려붙어 삐꾸럭길로 끌고 가는 것이다.
하나 예를 들어 과거에 일주일을 한도로 해서 수련공부를 하는데 한 닷새쯤 돼서 박선경이라는 사람이 공부하다 말고 “왁!”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진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왜 그랬냐?” 하고 물으니 이런 얘기를 한다.
그의 큰아버지 얘기다. 강원도 산골짝에 갈 것 같으면 나무뙈기로 얽은 삽짝문(사립문)이 있어서 밤에는 그냥 지쳐두고 낮에는 열어 놓는다. 그게 문 닫고 여는 것이다. 거기는 도적도 없다. 하루는 그 큰아버지가 볼일을 본다고 어디를 갔다. 그 일정이 거리로도 그렇고 한 사흘 걸려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됐다. 그런데 그날은 얼마 가다가 아는 사람도 만나고 해서 술 몇 잔 먹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 가고,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밤중에 집으로 들어왔다. 그가 제 집에 돌아와 보니까 토방에 자기 마누라 신발하고 알 만한 동네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있다.
그걸보고 그 사람이 눈이 뒤집어져 버렸다. 그래서 욱 하는 생각에 헛간으로 달려가 도끼를 들고 연놈을 찍어 죽인다고 뛰어 들어갔다. 하니까 벌써 그 마누라는 뒷문으로 도망가고 동네 사람만 그 도끼에 찍혀 죽어 버렸다. 이유야 어떻든지 그의 큰아버지는 사람을 죽였으니 철창엘 갔다.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 그때 박선경이 도통을 하려고 하니까 그 죽은 신명이 도끼를 가지고 찍으러 달려붙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가 유부녀 보다가 도끼 맞아죽었으니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다. 제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죽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
신명세상도 그렇고 인간 세상도 저 잘못한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한다. 그런 것이 척(隻)이다. 여러 백 대 내려오면서 그런 크고 작은 척신들이 달려붙어서 보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하나 예를 들어서, 인간세상에서는 다시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미인이, 옥 같은 것으로 만든 좋은 상에다가 술상을 차려놓고, 빵긋빵긋 웃으면서 한 잔 대접한다고 했다고, 세상에 그런 좋은 걸 봤다는 것이다.
주전자 같은 것도 호화찬란하고 그렇게 잘 생겼다고 한다. 왜 그런 게 보이냐 하면, 그가 본래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 자세가 그렇게 되어져 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그가 신명에게 코를 내준 것이다. 사람이나 속지 신명은 속지않는다.
신명神明은 인간의 정신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신명이 보니까 고놈 정신이 꼭 그렇게 되어져 있더란 말이다. 하니까 “야, 요거 끌고서, 내가 성공 좀 해봐야겠다.” 하고 그런 여자 신명이 달려붙어서 자기가 뜻하는 행위를 하려고 한 것이다.
신명神明은 육신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행위를 못 하고,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동조해야만 행위를 할 수 있다.
잡신 같은 것에 붙잡힌 선무당들을 보면, 귀신이 먹으라고 하면 먹고, 가라면 가고, 자라면 자고, 그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 그렇잖으면 아파서 못 배긴다.
그러다 앓아 눕기도 하고, 그렇게 잡신한테 생포당해 가지고, 무슨 산신에 붙잡혔네, 동자신에게 붙잡혀서 점을 하네 하는데, 그런 게 세상에도 수두룩하다.
또 명도明圖에 붙잡혔다는 사람도 있다. 마마 걸려 죽은 여자 아이 귀신을 명도라고 한다. 이 명도에 붙잡힌 무당은 으레 꽃송이 같은 걸로 신단을 차려 놓는데, 점을 하려면 거기서 획 하고 휘파람 부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그게 명도가 들락날락하는 소리다. 그래 점을 치면 명도가 금세 현장에 가서 조사해 가지고 와서 점괘를 알려준다.
그런 걸 보면 ‘참 신명이 저런 것이다.’ 하는 것을 누구도 다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명도라고 이름 붙인 여아신이 그저 대여섯 살 내지 열 살 전후해서 죽은 신인데, 그애들이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인간세상에 산 역사가 얼마 안 되는데. 그래서 점괘가 혹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정정定靜의 대의大義
夫定靜之法이 懷至廣至大之願하며 發至誠至信之心하야 念念不忘則 定靜을 可得이니,
定者는 一定於此而諸他道理가 無加於吾之所做며, 許多法術이 不出於渠之惑世而已요. 靜者는 歸於一定而不復動於他하여 富貴繁華가 不能誘心하며 金玉寶貝도 無可奪志니, 一志立定하야 吾心이 不動이면 則孟子之不動心과 老子之歸根靜이 皆是也니라.
정할 정(定)이라는 것은 한 번 마음을 定에 들게 하면 모든 다른 도와 이치理가 내가 하는 일에 더해지지 않고, 허다한 法과 術도 그 사람이 미혹에 빠진 가운데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요,
고요할 정(靜)이라는 것은 한번 定해진 곳으로 돌아가 마음이 다시는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아니하니, 부귀와 영화도 마음을 능히 유혹하지 못하고 금은보배도 뜻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니, 한뜻을 세워 정(定)에 들어 나의 마음이 동하지 아니한다면 곧, 맹자의 '움직이지 않는 마음'인 부동심(不動心)과 노자의 '뿌리로 돌아가 고요함'인 귀근정(歸根靜)이 모두 이것이라.
上無色界하고 下無慾海하야 一念萬年에 耳目이 俱淸하고 心身이 俱忘하며, 神氣俱爽하고 內外俱空하여 泯於深定寂靜하야 湛然至一하야 先全我太一之天而後에 神氣冷冷然而淸하고 神光炯炯然而明하야 無地不燭하고 無理不通이라.
위로는 색(色)의 세계가 없고 아래로는 욕망의 바다가 없어져 한생각 장구한 세월에, 귀와 눈이 밝아지고(淸), 몸과 마음을 모두 잊어버리고 神과 氣가 모두 상쾌하여 안과 밖이 모두 텅비되며, 깊고 적막한 정정定靜에 빠져들어, 정정으로 가득히 충만한 하나가 되어, 먼저 나의 태일지천(太一之天)이 완전케 된 이후에 神氣가 차갑고 또 차가워져 깨끗이 맑아지고(淸), 神光이 빛나고 또 빛나 환하게 밝아 지고(明), 비추지 않는 땅이 없고, 통하지 않는 이치가 없으니.
然이나 若有喧動이면 則神氣蒙蒙然而昏하고 神光暗暗然而晦하리니 何益於思想之所存哉아. 唯綿綿密密하여 念而不忘則一心이 不動하고 百脈이 歸源하여 自然火降水昇하고 氣定神淸하여 泰宇發光에 虛室生白하야 上通天界하고 下徹地府하여 空空洞洞에 光明이 無邊하나니 勤而無間하면 鬼神境界도 洞視撤開라.
그러나 만일 떠들고 동요되면 神과 氣가 어리석어져 어두워지고 신광神光 이 컴컴하게 어두워져 그믐날 밤같이 깜깜해지나니 사상思想 을 보존하는데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오직 끊임없이 치밀하게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면 일심(一心)이 흔들리지 않고 모든 맥(脈)이 서늘하게 되어,
자연히 불은 아래로 가라앉고 물은 위로 솟아올라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이루어짐에 기가 안정되고 신이 맑아지니, 태우발광(泰宇發光)에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위로는 천계(天界)를 통하고 아래로는 지부(地府)를 꿰뚫어 텅비고 텅비어 光明이 끝이 없게 되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끊임이 없으면 귀신경계(鬼神境界)도 환히 보이고 열리게 됨이라.
然이나 行有五忌 第一曰 "불신不信"이요 次曰 "설독泄瀆"이요' 次曰 "집착執着"이요,
次曰 "환희歡喜"이요, 次曰 "욕속欲速"이니 皆爲大病이라. 必落邪道하리니 敬之愼之하라.
心爲天地萬靈之主 身爲陰陽造化之宅 自己造化之道 莫思善 莫思惡 忘形忘在 物我俱忘 上透天界 下徹地府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증산도! 왜 여기에
잘 읽었습니다 공감 되는 내용이 있네요
네, 반갑습니다. 좋은 내용은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되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