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라! (2008년 4월, 도쿄) "우리 청년부여!"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의 이 외침에 응한 사람은 직제자였다. 이케다 SGI 회장은 이렇게 술회했다. "도다 선생님이 '우리 청년부'라고 하면 나를 지칭한 말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다이사쿠를 보아라!' '다이사쿠를 뒤따르라!'하고 외치셨습니다." 누가 승리의 돌파구를 여는가? 그것은 홀로 일어서는 청년이다. 4월 2일,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의 4주기 법요가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열렸다. 제3대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맞는 '4.2'였다. 오후 1시에 법요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하기 직전, 갑자기 하늘의 상황이 달라졌다. "천둥이 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봄에 때 아닌 폭풍우가 몰아쳤다." (세이쿄신문) 법요는 근행창제를 마치고 분향으로 이어졌다. 폭풍우 속에서 대표간부가 추억담을 이야기했다. "오늘 이케다 선생님에게 '당신은 스승이 주신 배지를 왜 달고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엄한 주의를 받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입으로 스승을 흠모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제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4.2'는 사제가 맹세하는 날이다. 이케다 회장은 그 학회정신을 청년의 마음에 심어주려고 했다. 이케다 회장은 만감을 담아 인사말을 했다. "1951년 5월,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셨을 때에 폭풍과 같은 비판과 매도 그리고 악구가 소용돌이쳤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어선 도다 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200년 후를 생각하며 투쟁한다. 지금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년 후에는 반드시 내 행동이 전 인류 중에서 가장 정의로운 투쟁임이 증명될 것이네.' 그런데 200년 후가 아니라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불과 3년밖에 안 된 지금, 선생님의 투쟁이 얼마나 정의로웠는지 전국 방방곡곡에 증명되었습니다." -"나는, 남은 도다 문하생의 대표로서 도다 선생님 묘 앞에 서서 당당하게 '광선유포를 완성했습니다. 유유하게 광선유포를 완수했습니다.'하고 빙그레 웃으며 보고 할 수 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이케다 선생님) 하지 못한다면 뒤를 잇는 문하생들이 그러한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해서 전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사를 마칩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폭풍우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태양이 마당에 있는 벚나무 꽃잎을 비추고 있었다. 은사의 법요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지부의 결성대회가 각지에서 연달아 열렸다. 결성대회 장소로 출발하기 앞서, 회장은 주위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장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굉장한 마가 덮칩니다. 잠시도 방심할 수 없지요." 남자부 분대장이던 저는 행사장 바깥정리를 담당했습니다. 계속 모여드는 회원들 대부분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고생을 좀 했지요. (이케다)선생님은 행사장에 도착해서 먼저 우리 진행요원을 격려하셨습니다. 선생님 격려에 1년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이 다카사키에 일반강의를 하러 오셨는데, 그 회합이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곳에서 회합을 하는 청년부원들에게 "'평생 퇴전하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나와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갑시다.'라고 여러분에게 전해주세요."하는 전언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케다)선생님은 "이 시도 여러분에게 전해주십시오."라며 자작시를 공개하셨습니다. "희망에 불타 노도에 맞서며 설령 가난한 몸일지라도 남이 비웃든 모욕하든 가만히 인내하며 두고 보라 ……" 그 시는 다음 날 좌담회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젊을 때 제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서 생명에 새기십시오.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지지 말고, 힘껏 살아야 합니다. 광포의 지도자로 성장하십시오." 고등학생이던 저는 집이 가난해서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시를 들은 제 마음에는 확신이 넘쳤습니다. 그 덕분에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시는 평생 제 원점이 되었습니다. 나가오카는 폭설지대로 유명했다. 겨울에 해당하는 반년 동안, 나가오카는 눈에 갇혀버린다. 일꾼노릇을 하는 남자들도 사라져버린다. 일이 없어져서 부득이하게 '돈벌이'를 위해 타지로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학회활동도 그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다. 도쿄에서 열린 회합에서 (이케다)선생님을 뵈었을 때, "무엇이든 질문해도 좋습니다."하셔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폭설 하면 니가타, 재해 하면 니가타입니다. 니가타는 왜 큰 재해를 입을까요?" 선생님은 제 말에 자상하게 격려하셨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유배지인 니가타에서 광선유포의 불길을 지피셨습니다. 지금도 그 방정식은 똑같습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보람이 있습니다. 창백한 얼굴을 하지 말고, 그렇게 각오하고 열심히 하십시오." 이케다 회장은 반년이나 눈에 갇혀 지낸 나가오카 벗의 행복을 바라며 지도했다. "공덕을 받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그러나 누구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만드는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어본존에게 순수하게 기원하고, 제목을 부르는 길뿐입니다. 따라서 비판하고 의심하기 전에 그리고 푸념하기 전에 자신이 고민하는 바, 생각하는 바에 마음을 집중해서 어본존에게 기원하며 신심수행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결성대회에서 저는 부대장 결의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표하는 모습을 본 선생님이 단상에 있는 간부에게 여러 차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청년들을 보십시오. 청년이 중요합니다. 학회는 모든 것을 청년에게 맡겨야 합니다." 나중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청년을 소중히 하셨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이 처음 나가오카에 오신 1957년 10월의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청년을 위해서"라며 '구로다부시'(일본 전통 고전무용)를 용장하게 추셨습니다. "자네도 추게나." 하셔서 제가 춤을 추자 모두 웃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웃으면서 "춤을 잘 못 춰도 괜찮아요. 청년은 광선유포에 목숨을 거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청년에게 기대하시는 선생님의 진심이 제 생명에 박혔습니다. 제가 이케다 선생님을 처음 뵌 때는 입회 직후 무코지마지부 간부회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가난한 청년이라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나 청년이라면 '두고 봐라' 하는 인생을 보내십시오." 농사짓는 가난한 청년이었던 만큼 몸이 떨리는 듯한 감격을 느꼈습니다. 이후 이케다 선생님에게 계속 지도를 받았고, 결성대회에서는 선생님을 맞이한 기쁨을 부대장 포부로 발표했습니다. 대회를 마치자 이케다 회장은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1000명의 동지를 격려하기 위해 곧장 인접한 제2 행사장으로 갔다. 회장은 그 회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남성은 신심을 통해 얻은 풍부한 생명력으로 열심히 일해서 장사나 일에 승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인이 사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사줄 수 있고, 자녀가 가고 싶어하는 학교는 어디라도 보낼 수 있도록 인간혁명하기 바랍니다. 또 확실하게 실력을 길러 누구에게 조금도 간섭받지 않는 남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성은 신심으로 청정한 생명을 연마해서 기품 있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갖추십시오." 당시 대도시 나고야에서 가까운 '기후'는 조직적으로 지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사와다 지부장 집은, 회장의 방문소식을 전해 들은 간부들로 가득 찼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청년부는 집 밖에서 회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회장은 그런 청년부를 아낌없이 격려했다. 여자부 구장이던 저는 사와다 씨 댁에서 지도회를 마친 선생님에게 나가노현 마쓰모토시로 시집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가."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에 가든지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십시오."하고 격려하셨습니다. 마흔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난에 직면한 그때, "어디에 가든지 사명이 있다."는 선생님 말씀이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남편이 광포를 위해 투쟁한 이곳 마쓰모토에 뼈를 묻자.' 선생님 덕분에 지금의 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치라고 하면 바로 2년 전인 9월, 이세만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곳이다. 그때 구호활동을 진두지휘한 사람도 이케다 총무(당시)였다. 총무는 아이치 동지에게 말했다. "대악(大惡)은 대선(大善)이 올 서상이기에 '주부'는 반드시 크게 발전합니다." 그 말대로 '주부'는 크게 발전했다. 저는 아이치지부 지부부인부장으로 지부결성대회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많은 분이 "잘했다."고 칭찬하셨지요. 회합이 끝나고 이케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대기실로 갔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순간이었지요. 선생님은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합에서 말을 잘했다고 해서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청년을 육성하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선생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저는 깊이 반성하고, 더욱 선생님을 구도해 청년을 육성하는 데 진력하자고 새롭게 결의했습니다. 닥터부의 선구자 헨미 게이 씨의 철야 추선기원과 그 이튿날인 17일에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불의의 사고였다. 헨미 씨는 향년 34세로 젊은 나이였다. 철야 기원에 참석한 당시 청년부 간부가 증언했다. "그 무렵, 회원들이 계속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한 청년부 간부가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군.'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케다 선생님은 열화와 같이 꾸짖으셨습니다. '마에 져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마(病魔)나 사마(死魔)에 지는 신심을 하는 청년부입니까?' 그리고 선생님이 직접 '지금부터 근행회를 합시다.'라고 제안하셔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근행회를 했습니다. '사랑스러운 제자가 사마에 흔들려서야 되겠는가.'하는 선생님의 기백이 느껴졌습니다." 헨미 씨는 제가 살던 집 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저렇게 젊고 훌륭한 의사가 왜 죽었을까?"하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에 대해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심이 필요합니다. 또 교학이 중요합니다. 불법에서는 '전중경수(轉重輕受)'를 설합니다. 그리고 '정업(定業)과 부정업(不定業)'이라는 사고방식도 있습니다. 정해진 수명조차 정법을 근본으로 한 신심으로 전환해 연장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전환하지 못하는 숙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은 가족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인 결과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삼세의 생명을 믿는 신심이 중요합니다." 저는 청년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하신 이케다 선생님의 심정을 헤아렸습니다. 청년을 보배처럼 소중히 여긴 분은 이케다 선생님뿐이었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대학부 제3회 변론대회에 참석했다. 도쿄 간다에 있는 공립강당에서 오후 6시에 시작했다. 변사는 열명. 진지한 변론을 펼쳤다. 당시의 청년부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변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소상하게 물으셨습니다. '그 멤버를 장래 어떻게 성장시키면 좋을까?' '그 멤버는 정치가가 어울릴까, 아니면 문필가가 좋을까?' 등, 청년을 육성하고 청년 인재를 발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선생님의 집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변론대회를 통해 청년을 철저하게 육성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창가학회의 장래가 달려 있다. 일본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리고 세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격려하면 좋을까. 선생님은 오로지 그것만 고민하고 차례차례 손을 쓰셨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 이케다 회장은 대학부 그룹장들과 간담회도 했다. "마키구치 선생님도, 도다 선생님도 '아직 광선유포되지 않은 동안은 신명을 버리고'라는 정신으로 투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성인 문하생이 지녀야 할 학회정신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좋습니다. 열심히, 오로지 최선을 다하세요. 절대로 퇴전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지닌 가치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음 학회를 짊어지고 갈 사람들이니 정말로 위대해지십시오. 동양이나 세계로도 진출하기 바랍니다. 나는(이케다 선생님) 여러분이 빨리 일어서도록, 나아갈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들 뿐입니다. 그 후에는 여러분이 마음껏 꽃을 피우면 됩니다. 어떤 꽃이 되어도 좋습니다. 마지막이 되어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향상을 기원하겠습니다." 부대장 면접 때, "앞으로 나와(이케다 선생님)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앞장 서서 투쟁합시다."하고 크게 포용해주셨습니다. 선생님에게 부대기를 받을 때에도 "열심히 하십시오."하고 힘차게 격려하셨습니다. 저희 집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입회했는데, 전후에 학회조직을 따르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광선유포는 학회만 할 수 있다."는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 지도를 상기하며 학회로 돌아왔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런 저희 집과 기류를 지켜보셨습니다. 선생님은 결성대회에서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청년부는 사제직결하는 조직입니다. 광선유포의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자각으로 어떠한 처지가 돼도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해서 투쟁하십시오." 그때까지 지방에 사니까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안이했던 저는 모든 투쟁에 앞장서겠다고 깊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현에서 1등을, 또 전국에 뒤지지 않는 결과를 냈습니다. 신임간부가 인사했다. 하마사키 이와오 지부장이 인사할 때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세 마디 이야기하다 흥분하고 만 지부장은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읽기가 서툰 아버지를 위해 여자부이던 제가 아버지 원고를 큼직큼직한 글씨로 종이에 써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일주일 전부터 그 원고를 외울 정도로 읽으셨는데, 긴장한 나머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2 ~ 3분 정도 그 자리에서 선 채로 꼼짝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저는 걱정이 돼서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걱정하던 참석자 분들의 제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내 간신히 "지부는 지금, 7200세대…. 올해 안으로는 1만 1000세대로 만들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하고 발표를 끝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격려하셨습니다. "지부장은 순진 무구한 사람입니다. 또 공평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업신여기면 내가(이케다 선생님) 용서치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모두 지켜주십시오." 이때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가 우리 집이 신심하는 데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시마네 광포를 위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은 질문회를 열어주셨습니다. 간담회 때 여자부 조장이던 저는 "'어본존에게 나무한다.'는 어떠한 의미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나무한다.'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본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숙업의 폭풍우 같은 가난의 괴로움으로 고민하던 저는 그 말을 듣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격려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세계에 광선유포할 수 있게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힘찬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 인생을 어본존에게 맡기자, 선생님에게 맡기자고 다짐했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성불사를 함.' (어서 708쪽)입니다. 말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사람을 계속 격려하면 반드시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저희도 선생님이 해주신 그 말을 가슴에 품고 투쟁했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은 저희 집(하마사키 씨 집) 세 자매에게도 인사하셨습니다. "이번에 아버지에게는 지부장을, 어머니에게는 지부부인부장을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가족에게 수고를 끼치겠지만 잘 부탁합니다."하고 선생님은 머리를 깊이 숙이셨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내 여동생입니다. 내 가족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여러분도 복운을 많이 쌓아 행복해지세요." 당시 열네살이던 저는 신심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진심으로 감격했습니다.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시다니.' 선생님의 위대함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식들까지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는 선생님을 본 부모님은, 지부의 자식들인 청년부를, 진심으로 소중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하숙집처럼 청년부가 모였습니다.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이 통하는 곳에는 청년이 육성된다."고 하셨습니다. 여자부 부대장이 된 저는 이튿날인 25일, 후쿠시마역으로 이케다 선생님을 배웅하러 갔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청년부원과 간담해주셨습니다. 그때 가족 전체가 신심을 몹시 반대하던 저는 "가족 중에 저만 신심을 해서 부대장으로 누구에게 의논도 못하고 정말 괴롭습니다."라고 그만 푸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효도하십시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누워 있다고 보고 드리자 "아버지 병이 나으면 모시고 함께 도쿄로 오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물 많던 저는 기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눈물을 훔치면서 '청년훈'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부모조차 사랑하지 않는 청년이 많은데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 무자비한 자신을 극복하고 부처의 자비로운 경지(境地)를 터득하는 인간혁명의 싸움이다." 저는 선생님 격려에 보답하고자 신심을 극구 반대하는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입회했습니다. 그 옛날 무자비한 자신을 뛰어넘는 인간혁명의 투쟁을 선생님에게 배운 일이, 제 평생 재산이 되었습니다. 제3대 회장에 취임한 지 1주년을 맞는 5월 3일이 다가왔다. 당시 세이쿄신문은 학회가 전진하는 모습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지난 1년 동안 정말로 동분서주하며 진두지휘했다. 그러한 선생님이 가시는 회합은 불가사의하게 축복받은 날씨였다. 기온이 높을 때는 날이 흐려져 시원해졌고, 추울 때는 따뜻해졌다." 1주년이 되는 5월을 맞아, 이케다 회장은 측근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학회가 이처럼 전진했다는 사실은 도다 선생님의 뒤를 이은 제자가 올바르다는 증명이자, 창가학회가 반드시 광선유포를 한다는 서상이다." 이케다 회장은 대백련화 5월호 권두언에 '은사의 4주기를 마치고'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은사가 서거한 지 3년. 나에게는 그 3년이 실로 30년이나 50년처럼 느껴졌다. 도다 선생님 서거 후는 어차피 내가 학회의 중추가 되어 지휘해야 할 숙명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결국 나는 단 1분이라도 은사의 이념과 정신을 어기지 않고 엄연히 전진하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취임 1주년을 맞이한 이케다 회장의 심정은 '단 1분이라도 은사의 이념과 정신을 어기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엄연한 결심이었다. 지부기와 부대기를 담당하던 저는 새롭게 탄생한 오키나와와 미국, 브라질 등의 지부기와 부대기를 직접 보고, 선생님이 회장이 된 후 1년간 이룬 굉장한 약진에 경탄했습니다. 선생님은 신임 지부장이나 부대장에게 깃발을 건넬 때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며 "열심히 싸우십시오!" "씩씩하게 분발하십시오!"라고 힘차게 격려하셨습니다. 그 목소리와 당당한 모습에 몸이 떨릴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나는 도다 선생님이 의탁하신 창가학회를 온 생명을 걸고 지키겠다. 여러 분도 지켜주기를 바란다.' 하는 정신과 사제가 나누는 맹세가 담긴 깃발 수여였습니다. 본부총회에서 청년부 대표가 포부를 발표했다. "'청년이여 홀로 서라! 두 사람은 반드시 일어서리라. 세 사람은 또 이어지리라. 그리하여 나라에 10만 국사가 있으면 고뇌하는 민중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이 국사훈을 생각할 때, 홀로 선 분이 바로 이케다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뒤를 잇는 사람은 우리 청년부입니다. 마침내 국사훈을 실천할 단계에 들어선 때를 자각하고, 올해 청년부 10만 결집을 반드시 달성하겠습니다." 이케다 회장의 구상을 이어받은 대표의 포부였다. 홋카이도 남자부의 중심간부이던 저는 연초부터 '국사 10만'을 목표로 해 정신없이 활동했습니다. 사나운 눈보라 속에서 열린 부대총회에서는 정해 놓은 목표를 완수하자고 분투하여 전국 상위권의 결과를 냈습니다. "투쟁은 구체적인 목표를 걸고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를 쟁취하는 요체입니다." 라고 선생님이 지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선생님이 이런 전언도 주셨습니다. "지금 바로 철저하게 투쟁해서 도다 선생님과 맹세한 '국사훈'을 단호히 실현합시다. 그 투쟁을 펼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본부총회에서 마침내 '국사 10만 결집'의 명확한 목표가 세워졌습니다. 그때부터 '국사 10만'을 결집하기 위한 분위기가 더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총회에서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도다 선생님도 영산에서 '장하다. 내가 육성한 제자여.'라고 빙그레 웃고 계시리라 저는 굳게 확신합니다. … 나는 창가학회가 '일본의 기둥'이자 '세계의 태양'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은 총회에서, 취임할 때 인용한 성훈을 다시 언급하셨습니다. "결국은 천(天)도 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하여라. 신명(身命)을 바칠 뿐이로다." (어서 232쪽) 회장 취임 후, 광포는 더욱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평화 문화 교육 등 폭넓은 분야로 계속 넓혀졌습니다. 선생님 결의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우리 청년부도 점점 더 가파른 광포의 산을 등반하자고 각오했습니다. 총회가 끝난 후 이케다 회장은 운영을 담당한 청년부 간부와 간담했다. 그 자리에서 회장은 말했다. "자, 제2막이 열렸습니다. 청년이 크게 활약하는 마디로 만들기 위해, 오늘을 출발점으로 해서 올해를 '청년의 해'로 정합시다." '청년의 해', 회장이 일대 선언을 했다. 회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아쉽지만 지부 회합은 못 가더라도 청년부 회합은 먼저 가겠습니다. 각 방면의 남자부총회나 여자부총회도 전부 참석하겠습니다. 올 한해 동안 청년부를 강도 높게 훈련합시다." 회장 취임 1주년의 본부총회를 향해 우리 청년부는 필사적으로 홍교와 확대를 하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한달 동안 7000 ~ 8000명이나 되는 홍교를 달성했습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확대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청년의 투쟁을 지켜보셨습니다. 총회가 끝난 뒤, 선생님은 "올해를 '청년의 해'로 한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그해에만 통용되는 '청년의 해'가 아닙니다. 앞으로 학회는 언제나 '청년의 해'로 나아가자는 의미였습니다. 드디어 이 총회를 기해 청년부 중추가 학회 중추를 담당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공들여 육성한 청년이 학회의 중추를 짊어 질 때가 왔다는 흥분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그해 7월, 남녀 청년부는 결성 10주년을 맞이했다. 청년부는 각 방면마다 남녀별 총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 총회는 사실상 11월에 있을 '국사 10만' 결집을 향한 개막이었다. "나는 일어섰습니다! 거기에 호흡을 맞춰 일어선 사람이 진짜 이케다 문하이며 광선유포의 투사입니다!" 드디어 제자가 일어서는 때를 맞이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이렇게 썼다. "내 일생은 도다 선생님의 유언이라고 할 구상을 외치고, 투쟁하고, 달성하는 일이다." (1980년, 시즈오카) "깃발 든 젊은이 그 어디메뇨." 나의 문하여, 사제의 깃발과 함께. (1961년 3월 27일, 도쿄 다이토체육관) 우리 이케다 문하여! 호흡을 맞춰라! (2008년 4월, 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