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참석자 (3명)
정혁현 목사, 서은혜, 이신정
ㅁ 예배
- 본문말씀 : 창세기 28, 10~19 ' 종교적인 것, 신학적인 것'
- 시기도 : 비 내리는 어느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 서다 - 울라브 하우게 / 서은혜
- 헌금기도 : 서은혜
- 대표기도 : 이신정
ㅁ 설교 : '종교적인 것, 신학적인 것'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뒤 보복이 두려워 도망가던 중 천사가 오르내리는 사다리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야곱의 사다리’ 또는 ‘야곱의 계단’으로 지칭되는 이 이야기는 다양한 의미를 낳는 상징으로 가득해서 이 장면을 그린 그림과 이를 소재로 한 소설과 시가 예술사를 수놓고 있을 정도다. <야곱의 사다리 Jacob’s Ladder>라는 제목의 영화는 -단편영화와 TV 시리즈까지 포함하면- 수십 편을 넘는다. 하지만 잘 알려진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1993년작 <야곱의 사다리>는 우리가 읽은 창세기 본문이 관심하는 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주인공의 이름이 ‘제이콥’이고 베트남전 당시 미군 병사들이 공포를 극복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투여된 향정신성 약물의 이름이 ‘래더’ 즉 사다리라는 것, 그리고 창세기 본문처럼 꿈 또는 환영이라는 소재를 모티브로 공유할 뿐이다.
보통 ‘야곱의 사다리’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읽은 본문은 ‘층계’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층계’ 또는 ‘계단’이라는 번역이 맥락상 맞을 듯하다. 히브리어로는 ‘sullam’이며, 동사인 어근 ‘salal’에서 파생됐다. 이 단어는 성서를 통틀어 단 한 번 등장한다. ‘salal’은 ‘흙이나 돌을 쌓아올리다’ 또는 ‘둑길, 큰길을 돋우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sullam’이라는 단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다리’ 같은 형상이 아니라 고대 중동문화의 신전에 놓인 계단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고대의 신전은 고대 중동에서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이나 라틴 아메리카 잉카 문명의 신전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자체로 계단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가 보여주듯 신전은 거대한 탑이었으며, 하늘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였다. 하늘에 있는 신은 인간이 지은 -하늘과 가까운 건축물인- 신전에 머문다. 그렇게 신전은 ‘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곳은 인간이 짓고 신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집이다. 이 장소에서 인간은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체험, 혹은 일상의 비밀이 풀리는 체험을 한다. 종교적인 체험인 것이다.
잘 알다시피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탈취한 뒤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 외삼촌 집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외삼촌이라고는 하지만 야곱에게는 일면식도 없는 남과 다를 바 없다. 외가가 있는 하란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떠나온 땅이다. 현재 야곱은 장자권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차지하려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된 상황이다. 야곱이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그의 처지가 어떤지 분명해진다. 그는 ‘어떤 곳’, 아마도 인적이 없는 들판에서 노숙하는 것으로 보인다. 20절에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는 내용 중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실 것”을 요청하는 걸 보면, 그는 여행준비는 커녕 거의 몸만 빠져나온 듯 보인다. 그가 베고 자기 위해 주워 온 ‘돌베개’가 모든 걸 말해 준다. <창세기>는 야곱이 지금 삶의 ‘바닥’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닥’은 떨어진 곳이다. 그곳으로 떨어지기 이전의 삶은 영원히 상실되어 지나가 버린 것 같은 장소, 따라서 이전의 관점에서는 회복은 물론 작은 희망조차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장소다. 바닥에서 사람들은 절망하며, 그 심연이 너무 깊고 무거워 대체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는 돌베개를 베고 자지만 그보다 훨씬 더 육중한 절망과 두려움이라는 돌덩이가 그를 누르고 있다.
그는 뒤척이다 잠들었을 것이다. “야아콥” 그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또는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으며,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권을 탈취했다. 그는 욕망의 인간이었으며, 욕망의 정의 그대로 ‘타자의 욕망의 인간’이었다. 그는 장자권으로 상징되는 타자의 욕망을 성취했지만 지금 그 욕망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다. 그는 극도의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몸은 지쳐버렸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내면에는 어떤 감정이 일렁이고 있을까. 회한일까, 억울함일까, 아니면 분노일까. 아마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격랑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나는 대체 왜 지금 여기 이토록 누추하게 쓰러져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얻었다 싶은 순간이 왜 급작스레 모든 것을 잃는 방향으로 틀어져 버렸을까. 억울함, 분노, 후회, 절망, 불안, 피로와 탈진. 야곱은 아마도 자신의 질기고도 강인한 욕망의 힘에 이끌려 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 하나하나에 휩쓸리면서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 것이다.
까무룩 잠든 사이 꿈을 꾼다. 꿈은 그의 현실과 상반된 풍경으로 전개된다.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15절까지)” 욕망의 인간 야곱이, 의식의 상태에서는 받아들일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고 느끼는 절망의 현실이, 무의식의 무대인 꿈에서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영화롭고 황홀한 상태를 경험하며,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광의 풍경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임을 깨닫게 한다. 그는 종교 체험을 한 것이다. 야곱이 자신의 꿈을 신성 체험으로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성스러움의 체험, 혹은 신비 체험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종교 체험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
야곱이 꾸는 그 꿈의 세계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성스러움’의 체험, 즉 종교 체험의 형식으로 열려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은 의식구조의 한 가지 요소일 뿐 의식의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에서 성스러움의 체험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지 의식의 발달단계에서 거쳐 가는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보편적으로 본다면,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에게 세계는 항상 언어를 초과하는 체험의 장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야곱은 지금 자신이 구축한 세계, 그의 욕망이 구상하는 세계를 초과하는 체험을 하고 있다. 그에게 ‘절망’으로 다가오는 세계가,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창세기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보여주시는 비전과 이를 인식하는 야곱 사이에 드러나는 대조를 강조하고 있다. 꿈에서 땅과 자손을, 그리고 특별히 야곱에게 귀향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려진 그 엄청난 축복이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모든 개인에게 내려진 특별한 축복은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을 낳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은 그의 삶과 그의 자손들에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이 신학적인 것의 내용이다. 성스러움은 한 인간의 욕망의 시선을 통과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시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야곱은 아직 이 시야로 돌입하지 못한다. 그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자신이 베고 잔 돌베개를 세워, 그 체험의 장소를 구별한다. 덕분에 베델은 특별한 장소가 된다. 이는 그 장소에서 축복의 꿈을 꾼 야곱이야말로 특별한 영웅이라는 자기 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서원에서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축복에 조건을 단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20-22). 이런 서원은 방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존재와 세계의 다른 차원을, 자신의 현재의 욕망 안으로 끌어와 폐쇄시킨다. 모든 걸 다 잃은 상황에서도 그는 고집스럽고 완강하다. 그는 성스러움의 체험을 타자의 욕망의 시선에서 재단한다. 속이는 자 야곱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 이런 태도를 종교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성스러움으로 열리는 새로운 차원을 자신의 현재의 욕망 안으로 끌어와 폐쇄시킨다. 그는 계속해서 욕망의 수레바퀴를 돌리기를 고집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야곱이다. 우리는 야곱으로서, 즉 욕망의 주체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줄 것과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욕망을 고집하면서, 이 욕망의 대상이 결국 허무임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이 허무의 체험을 강하게 느끼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신학적인 차원으로 전화할 것인가,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이 도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우리는 미련하고 완악하게 고집하는 자들일 뿐이다. 야곱이 그렇듯이, 그리고 유대인들이 야곱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야곱은 그러므로 우리의 거울이다.
첫댓글 제가 예배 후기를 맡게 된 때는 가끔이라도 설교 전체 내용을 다듬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설교 녹음 파일도 없고 설교문도 게시되지 않는 터라, 예배에 빠진 교우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후 기록 차원에서도 그렇고, 후기를 쓰는 저 역시 설교를 되새기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중요한 주제가 담긴 설교인 경우, 조금 시간이 들더라도 설교문을 정리해 올려보겠습니다. (이번 행간 세미나는 유난히 준비할 게 많아서 -읽어야 할 자료, 봐야 할 영화들이 많아서- 예배 후기가 또 늦었습니다.ㅠ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종교적인 체험, 신비 체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떠돌지만, 진정한 신학적 사유를 동반하는 신학적인 체험은 드문 듯합니다. 욕망 끝에 공백, 허무와 마주하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종교 체험에 더 몰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덕분에 놓친 설교말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성스러움의 체험을 타자의 욕망의 시선에서 재단한다. 속이는 자 야곱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 이런 태도를 종교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성스러움으로 열리는 새로운 차원을 자신의 현재의 욕망 안으로 끌어와 폐쇄시킨다. 그는 계속해서 욕망의 수레바퀴를 돌리기를 고집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야곱이다. 우리는 야곱으로서, 즉 욕망의 주체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줄 것과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욕망을 고집하면서, 이 욕망의 대상이 결국 허무임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이 허무의 체험을 강하게 느끼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신학적인 차원으로 전화할 것인가,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이 도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우리는 미련하고 완악하게 고집하는 자들일 뿐이다. 야곱이 그렇듯이, 그리고 유대인들이 야곱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야곱은 그러므로 우리의 거울이다."
올려주신 말씀 덕분에 오늘 다시 곱씹어 봅니다.
이 아픈 메시지를 좋다고 소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대상이 아니고
그의 은혜는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나의 욕망을 넘어선 세계라는 점.
하나님을 나의 욕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선 안으로 내가 이동하는 것.
그 시선이 주는 설명하기 힘든 자유스러움 덕분에 오늘은 조금 호흡할만 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