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취재는 부산 동래구에 위치한 우장춘 박사 기념관이었다.
지방선거일로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추자 해설사님께서 직접 나서 설명을 해 주셨다.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서는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하셨다고만 알고있었지, 다른 것은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다.
2층으로 구성된 기념관 건물에서는 나같이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도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우장춘 박사님께서는 1898년 태어나셨는데,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셨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항상 불편하고 괴로운 생활을 이어나가시고, 일본 아이들에게 '조센징'이라며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박사님께서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민들레' 이야기를 들으며 버텨나가셨다.
우장춘 박사님께서는 좋은 습관을 지니고 계셨는데 그 중 하나가 '메모하는 습관'이었다.
이러한 메모하는 습관으로 약 19편의 논문을 작성하셨다.
박사님의 첫 논문은 나팔꽃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문을 발표하기도 전에 연구소에 불이 나 논문이 타버리고 말았다.
이에 좌절하실 만도 하지만 민들레를 생각하시며 다시 일어서셨다.
우장춘 박사님께서는 늘 한국을 잊지 않으시고 '우'씨 성을 달고 사셨다.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 글을 보고 우장춘 박사님께서 정말 한국을 위하고 있고, 한국에 진심이셨다는 것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우장춘 박사님꼐서는 생활비로 받으신 돈을 자신을 위해 쓰시지 않고 현미경 등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셨다.
전쟁 중 먹거리 연구 및 제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셔 젊은 청년 연구원들은 군대를 가지 않았다.
우장춘 박사님의 별명으로는 '꽃씨 할아버지', '고무신 할아버지', '불독 할아버지'가 있다.
각각 씨앗을 연구해서, 늘 고무신을 신으셔서, 불독을 닮으셔서 이러한 별명이 붙으셨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독 할아버지'가 마음에 든다. 평소 강아지를 좋아할 뿐더러, 용맹하신 모습이 마치 불독을 닮으셨다니 더욱 위엄있게 느껴진다.
우장춘 박사님의 어머님께서는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그렇지만 박사님께선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시고 한국에서 상을 치르셨다.
전국에서 모인 조의금을 자신을 위해 쓰시지도 않으시고 식수가 부족해 고민해오신 원예 시험장 내에 우물을 파고 '자유천'이라 명명하셨다.
취재 전 우리는 그곳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행사 때마다 우물을 개방한다고 하니 꼭 행사에 맞춰 가봐야겠다.
우장춘 박사님하면 바로 떠오르는 '씨 없는 수박'의 원리는 보통 수박(2배체)의 종자나 어린 식물체에 콜히친 약품 처리하여 4배체 수박을 생산해낸다. 4배체 수박의 암꽃에 2배체 수박의 꽃가루를 수분시키면 3배체 수박이 되는데, 이 3배체 수박은 감수분열 때 염색체가 이상을 일으켜 씨가 생기지 않고, 혹 씨가 생기더라도 싹이 트지 않는, 제 기능을 못하는 씨가 된다.
사실 이때까지 이 '씨 없는 수박'을 우장춘 박사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줄 알았는데 최초로 만드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 놀랐다.
우장춘 박사님께서는 입원을 하셨을 때에도 재배하시던 벼를 링거대 옆에 걸어놓고 항상 관리하시는 등의 각별한 애정을 표하셨으며, 돌아가시기 하루 전 한국에서 두 번째로 '문화포장'을 받으셨다. 이 문화포장을 받으시고 우장춘 박사님 꼐서는 '조국이 나를 인정하였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솔직히 말해, 이때까지 우장춘 박사님께선 '씨 없는 수박' 이외에 딱히 하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번 취재를 통해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에 오신 이후로 평생을 한국인들의 먹거리를 위해 힘써주신 우장춘 박사님의 노고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더운 날씨의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설명해주신 정추자 해설사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