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김만중에게 배우기
진경환(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수필가)
‘김만중(, 1637~1692)’이라고 하면, 우선 호가 서포西浦이고, 효성이 지극해 남해 적소謫所에서 어머니를 위해 하룻밤 만에 『구운몽九雲夢』을 지어 인생의 무상함을 달랬으며,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통해 처-첩 간의 갈등을 해결함으로써 상층 양반 가정의 바람직한 질서가 확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 등이 떠오른다.
한편 우리말을 사랑한 그가, 참다운 노래는 우리말로 부를 때 비로소 가능하지, 한문으로 노래하면 한갓 앵무새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는 사실은 좀 덜 알려진 편인데, 한문으로 된 문학이 정통으로 간주하던 시대에 우리말 노래의 존재와 의의를 강조한 점은 특기해 마땅하다. 소위 ‘민족어 문학론’의 대표적인 주장으로 거듭 새겨들을 만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나온 것이 말이다. 말에 가락이 있는 것이 가歌, 시詩, 문文, 부賦이다. 천하 사방의 말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정말 말 잘하는 사람(시문에 능한 사람)이 각각 자기 나라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그것들은 모두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 있는 것이니, 비단 중국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서 표현하므로,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하는 아이들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흥얼거리며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거칠고 속되다 해도, 진짜냐 가짜냐 하는 관점에서 논한다면, 그것들은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이 지은 이른바 시부詩賦라는 것과 함께 논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송강 정철( 1537~1594)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그리고 「속미인곡」에 대한 논평으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구마라즙( 344~413)이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을 찬양한 노래인데, 그 문장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중국말로 번역한다면 그 뜻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문장의 오묘한 맛은 진실로 살려낼 수가 없다’라고 했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라고 한 데서 보듯이, 이 주장은 한자로 된 문학을 정통과 전범으로 삼고 있던 당시 사회 전반에 보내는 일갈이었다.
아울러 김만중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해체론자이기도 했다. 그는 텍스트 내부의 논리에 입각해 그 텍스트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예를 그의 수상집隨想集인 『서포만필』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주자의 『중용장구』 서문에 “인심人心은 도심道心으로부터 명령을 들으면”이라고 했는데, 이 말 한마디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앞에서 “마음의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하나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인심과 도심이 어찌 두 마음이겠는가? 이를 임금에 비유하면, 도심은 마치 임금이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거나 강론하는 때와 같고, 인심은 잔치하는 동안이거나 한가롭게 놀며 즐기는 때와 같으니, 실제로는 한 사람의 몸이다. 만약 인심이 도심으로부터 명령을 듣는다면, 이것은 잔치를 하는 임금이 조정 보는 임금에게 명령을 듣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바야흐로 그가 명령을 들을 때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김만중은 유교 경전의 하나인 『중용』의 논리상 모순을 드러내놓고 지적하지 않으면서, ‘해독하기 어렵다’고 하여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잘 이해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은근히 내세우면서 유교의 핵심 논리 중 하나에 심대한 허점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인심이 도심의 명을 받는다고 전제해 놓고서, 곧 허령과 지각이 하나라고 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당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판의 방식이 일종의 해체론에 입각한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지적하고자 하는 텍스트 내부의 논리 전개 과정에 입각해 그 모순을 드러내는 이러한 방식은 이단異端이라는 혐의를 받아 공연히 사단事端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는 큰 이점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유자이면서도 동시에 불교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열린 지식인이기도 했다. 논리적으로 중요한 맥락에 이르면 곧잘 불교 이야기로 그것을 넘어서곤 했는데, 다음의 예가 대표적이다.
불서佛書가 비록 번다하지만, 그 요점은 ‘진공묘유眞空妙有’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규봉圭峰 종밀宗密은 “진공眞空이라는 것은 차 있는 것이 비어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고, 묘유妙有란 것은 비어 있는 것이 차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주염계周溓溪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과 매우 비슷하다.
한마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나 유교에서 말하는 ‘무극-태극’은 논리상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달리 말해 양자 사이에는 상동성이 매우 많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를 밀고 나가다 보면, 유교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유일한 근거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곤란해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김만중은, 사회 전체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유교’가 단지 ‘사회적 구성물’의 하나임을 드러내었다. 결국 지배적인 주류의 사상이나 이념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이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이것은 절대주의 시대에 틈을 내어 여타의 의견이나 관점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 시대에 상대주의를 견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소 지나친 우려겠지만, 화폐가 모든 가치의 최종심급이 되어버린 근래 이 땅의 남루한 현실과 확증편향에 입각한 추악한 진영론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적으로 내모는 —이 야기하는 일종의 파시즘적 징후를 보이는 작금의 세태는 참으로 난감하고 우울하다. 이 무서운 전체주의적 획일성에 균열을 내는, 다양한 내용과 수준의 상대주의적 입장과 주장들이 좀 더 다채롭게, 그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 해야 하는 이유이다. 『서포만필』의 다음 전언이 앞으로의 그런 행로에 작으나마 힘을 보내주리라 믿는다.
불서佛書에 이르기를, 오백 나한羅漢이 각각 그들의 생각대로 부처의 말씀을 해석하여 부처님에게 묻기를, “누가 부처님의 뜻을 제대로 터득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두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나한들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부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않다. 비록 너희들이 논한 바가 내 뜻이 아니라 하더라도, 너희들이 세교世敎를 잘 감당하여 공이 있게 된다면 죄가 아니다.”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