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22 - 26절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이 되면 유월절 만찬을 즐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별히 음식을 먹으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축사를 했는데 떡을 먹을 때 하는 일반적인 축사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땅에서 떡이 생겨나게 하신 세상의 왕,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찬미 받으소서.” 또는 “이것은 애굽 땅에서 우리 조상들이 먹은 고난의 떡이다. 주린 자는 누구나 와서 먹을 것이요, 가난한 자마다 와서 유월절 식사를 먹을지라.” 이런 형식화된 축사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내용의 축사를 하셨는지 아니면 다른 축사를 하셨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관례대로 축사하신 후에 떡을 떼어 함께 먹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만찬을 하면서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왜 네 잔의 포도주를 마셨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두 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출애굽기 6장 6,7절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주실 것에 대해서 서로 다른 표현을 네 번 사용해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6장 6, 7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빼내다, 건지다, 속량하다, 빼내다.” 이 네 가지 표현을 기념하기 위해서 네 잔의 포도주를 마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보면 크게 언급이 되지 않고 있는 네 여성의 업적이 있기 때문에 그 여성들,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서 네 잔의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여자는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였고, 두 번째는 이삭의 아내였던 리브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야곱의 아내였던 라헬이며, 네 번째도 야곱의 아내였던 레아입니다. 레아는 특히 유다를 낳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각각의 여인들을 기념하며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떡을 뗄 때와 비슷하게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축사를 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포도의 열매를 만드신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이런 정도의 형식적 축사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유월절 만찬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신 이 사건 때문에 성만찬이 된 것이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한 예식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말씀의 예전과 식탁의 예전으로 구분이 되어져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인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보여 주시고 있는 이 만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22장 19절에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식탁의 예전을 통해 순종하려고 힘을 썼던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사제들이 축복하는 순간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징성을 갖기 때문에 그런 믿음의 자세로 성만찬에 참여를 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성도 간의 교제를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취한 사람이 성도 간에 교제를 등한시 한다는 것은 헛된 성만찬에 참여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런 헛된 일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한 피와 한 몸을 물려받았다는 형제의식, 가족의식, 지체의식을 가지고 친밀성을 유지하면서 더불어 사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이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 당하시기 전에는 서로 누가 높은가를 놓고 아옹다옹했던 사람들이 그런 불미스러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연합하여 복음 전파에 온 힘을 다 쏟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마다 하나 되지 못해서 많은 분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현대의 예배에는 말씀의 예전만 강조되고 식탁의 예전이 배제된 이유가 한 몫을 크게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처럼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하면 교회는 마귀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이 모습을 충성스럽게 지켜 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만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알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자연스럽게 식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마 교회에 가면 저런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서로 사랑하면서 살겠구나.’ 이런 상상이나 기대를 갖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 되어야 하고 서로 연합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중요한 시점에도 만찬을 통해 제자들을 교육하시고 그들 안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을 깨우기 위해 힘을 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끼리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건강한 지체를 형성하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보여 주신 마지막 실천적 교육이었다는 점에는 우리는 매우 높은 가치를 두고 실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런 귀한 예식을 멀리한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도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 이런 모습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기 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에 이런 귀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초대 교회처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기도해 줄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