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1979)
[작품해설]
‘슬픔’의 시인 정호승은 인간을 옹호하고 민중을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태도와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따스한’ 작품 세계를 펼쳐 준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슬픔의 내용을 확장시키거나 깊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인으로 ‘슬픔’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시적 사색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전통적인 정서인 한이나 비애의 세계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그는 이 ‘슬픔’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 전쟁이나 분단, 독재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상처까지도 끌어안고 따뜻이 위무해 준다. 이처럼 그는 현실의 모순 아래서 고통 받고 있는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 삶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미래 지향적 자세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망설임이 없게 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려 있는 대표작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운명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나’로 대치된 시인은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서 있다.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세상 속으로 고단한 길을 떠난다.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에서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다시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통해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슬픈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때이다. 이처럼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읽어 내는 시인의 밝은 눈은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다 ‘슬픔’, ‘기다림’, ‘아름다움’이 저녁 들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즈넉함과 쓸쓸함이 정서는 이 시를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작가소개]
정호승(鄭浩承)
1950년 경상남도 하동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설굴암에 오르는 영희」 당선
197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슬픔이 기쁨에게」 당선으로 등단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위령제」 당선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 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모밀꽃』(1995),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이 짧은 시간 동안』(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