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與猶堂(여유당)
- 다산 정약용의 역사인식과 자기성찰 -
얼마전에 서재의 책들을 정리하다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짧은 복사한 글이 나왔다. 그래서 유심히 그분의 글을 읽다가, [여유]라는 말을 되새기게 되었다. 아무리 간단한 말이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출처가 있고, 근원이 있다. 나는 이 근원부터 파헤쳐보고 싶은 언어학자나 역사학자 또는 고고학자의 기운이 강하다. 실제로 고고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너무나 '여유'라는 말을, '자유'라는 말과 함께 남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유라는 말에는 깊고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표면적으로 말해서, [여유]라는 말에 대해서 느끼는 심사는 편하게 들릴지 모른다.
어찌보면 상당수 생각이 짧고 성미가 급한 한국인들에게는 [여유]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느긋하거나 게으른 사람들, 시간이 남거나 공간이 남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지런하고 바쁜 일생을 보내는 한국인들에게 여유는 어찌보면 [사치]이기도 하다.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나중에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최근에 [인문학열풍]이 많이 불었다. [실학]을 재조명하는 운동도 많이 벌어졌다.
역사책에만 등장하던 실학자들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만나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인 것은 분명한데, 나는 이 [인문학열풍]이 그리 달갑지 않다. 한국학과 관련한 인문학분야가 비단 실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학도 있고, 회화도 있고, 음악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인문학의 열풍이 자꾸만 학술적으로 흐르고 있다. 과연 정약용 선생은 그리 생각했을까 의문을 가해 본다.
사람들이 아는 대표적인 실학자는 [정약용] 선생이다. 그래서 그분의 저작들을 열심히 파고 들어간다.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목민심서]를 읽기도 하고, 사회나 경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경세유표나 흠흠심서]를 읽기도 한다. 아니면 [정약용과 그 형제들]을 둘러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던 '강진초당'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물론 다녀왔다. 결국 수박 겉핥기식이다.
또 호가 다산이다보니 초의선사나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교우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초의선사와의 인연으로 호가 茶山(다산)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모두 다산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산을 이해하려면 그분의 당호인 [여유당]이나 그분의 전작인 [여유당전서]를 알아야 한다. 실은 [목민심서]나 다른 저작들도 모두 [여유당전서]에 들어 있는 목록일 뿐이다. 그러니 다산의 천재성과 노력은 대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현세에 그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박사학위를 10개 이상을 드려도 부족할 것 같다. 이런 다산선생님이 좋아 나도 그분처럼 살고 싶지만 심히도 역부족이다. 한때 난 다빈치전을 준비했지만 다산에게서 다빈치를 보았다.
폐일언하고, 나는 이 '여유'는 말이 급 궁금해 졌다. 모르면 사전을 보아야 하는 것이 나의 무식의 소치이다. 그래서 양주동박사의 국어사전을 들여다 보았다.
1 .
물질적.공간적.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2 .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
사람들은 1번의 의미에 역점을 둔 여유를 생각한다. 이는 '1차원적 여유'라고 부른다. 시간이 나면 산으로 들로 여행을 가는 것이 여유라고 느낀다. 시간이 나면 커피를 마시고 한가로이 책이나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을 여유라고 느낀다. 그런데 다산 선생은 2번의 의미에 역점을 두었고, 이를 확대까지 한 것 같다. 나는 이를 '고차원적 여유'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당호나 아호를 [여유당]이라고 지었을까?
경기도 남양주에 가보면 실학박물관도 있고, 다산 정약용 거리가 있다. 거기에는 다산이 생전에 지었던 [여유당] 자리가 있고, 이를 후세가 새로 지어 놓았다. 다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인물이다.
나는 여기서 [여유당]과 관련된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전에 읽은 기독교인들의 금서인 노자의 [도덕경]을 살펴본적이 있는데, 그 도덕경 책에 '여유'라는 말이 언듯 나온다. 그 말에서 유래를 했지만, 정약용 선생은 이 [여유]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분은 오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분의 유배시절은 책을 짓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절호의 시간들이었다. 한국문학사에서 [유배문학]의 위치는 실로 지대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그 정점에 있는 분이다.
그 당시에는 당파싸움이 여전히 심했다.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이 그 대표적이다. 또한 천주교박해가 심했다. 매년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를 당하고, 처형을 당했다. 정약용도 천주교인들과의 교류를 하였고, 세례도 받는다. 그 와중에 당파싸움에 휘말리면서 석학이 유배지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의 형님인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도 같은 꼴이 되었다.
다시 정약용의 아호나 당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다. 얼마전에 다녀왔던 단양에는 도담삼봉이라는 곳이 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의 호 삼봉(三峯)은 태어난 충북 단양의 비경 도담삼봉에서 호가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문헌에서는 ‘삼각산 삼봉, 즉 오늘날의 북한산을 가리켜 삼봉으로 지었다’는 해석도 있다.
정도전과 달리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수구 세력들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애썼던 선비도 있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이다.
그는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여유당’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물론, 하단에 그분의 말을 달아놓겠다.
몰락한 남인 출신으로 정조가 아꼈던 재사(才士) 정약용은 정조가 갑자기 승하(昇遐)하자 노론 수구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스스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내걸어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숙청의 피바람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론의 칼바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유당은 조선 당파싸움을 드러내는 아호였다.
정약용의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차를 즐겨 마신 자신의 취향을 애처롭게 드러낸 것이다. 유배된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만덕산의 또 다른 이름이 다산(茶山)이었다. 다산이란 호에는 큰 뜻을 펼치지 못한 정약용의 간난신고(艱難辛苦)와 애환이 깃들어 있다.
대한민국은 석학들에 대한 예우가 매우 적은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하루아침에 바보로 만들거나, 어찌보면 '병신'으로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되었다. 개인이 평생 쌓은 노력과 정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를 인정해주고, 세워주는 것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 된다. 그런데 사촌이 땅을 사거나, 남이 잘 되는 것을 꼴보기 싫은 국민성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서 나중에 밝힐 일이지만 다산은 굴원선생의 [어부사]에 나온 말로 우리 민족을 [거세개탁]이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했던 것 같다.
*거세개탁'이란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말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있기 힘듦’을 의미할 때 쓰이는 말이다.
물론 도덕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윤리성이나 법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비판이나 정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한 저울의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작금의 현실은 온당치 않다. 그래서 나는 일찍 권력이라는 것에 회의적인 사람이다. 정치활동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이다.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조심조심 처신해도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참으로 고단하고 쉽지 않은 인생사다.
보수와 진보진영의 정치인들은 서로 죽이지 못하여 안달이 난 패거리와 비슷하다. 지도자들은 모두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가문 출신이고, 좋은 업적을 많이 쌓았지만 언제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가 박살날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정치혐오나 정치포비아 증세가 심하다. 정치나 종교가 서로 닮았다. 유아독존적인 정치나 종교 지도자들을 많이 본다. 이들은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이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거의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막말을 하고 험담을 하고 상호 비방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몸을 낮추면 다른 사람과 협치를 하고 통합을 할 수 있는데, 서로 낮추지 않으니 이런 추태망상이 되는 것이다. 정치나 종교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고 서로 낮추어 노력하면 안될 일도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인 다산의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그 지혜를 [여유당]에서 찾았다.
[여유당전서]에 나온 글을 잠시 여기에 옮겨본다.
"나는 내 병을 스스로 잘 안다.
용기만 있지 智略(지략)이 없고
善(선)만 좋아하지 가릴 줄을 모르며
마음 가는 대로 행할 줄만 알았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의 性品(성품) 탓이니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할 것인가, 노자에는 '머뭇머뭇하노라 [與(여)] 겨울 물을 건너듯, 조심조심하노라[猶(유)], 사방을 두려워하듯' 대목이 있다. 아아, 이 두 구절은 내 병에 약이 되지 않겠는가.대개 겨울 시내를 건너려는 자는 추위가 뼈를 에이므로 그야말로 부득이하지 않으면 건너지 않는다.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자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탓에 그야말로 부득이한 일일지라도 하지 않는다."
만약에 나도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북카페나 사랑방을 [여유당]이라고 짓고 싶다. 그저 희망사항인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