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벅수와 장승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이가 이 벅수와 장승을 혼동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벅수’는 주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었다.
특히 1600년 무렵 중국에서 발생해 조선으로 마구 밀려오는
돌림병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전설 속의 치우(蚩尤), 용,
또는 장수나 제왕의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했고
가슴에는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승은 역참제도에 의해 생긴 말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그 역할은 '여기서부터 어디 어디다'라고 하는 표지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일하게 벅수와 장승 전문가인 황준구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여)장군이라는 벅수 문화를 ‘망령된 미신 문화’로 취급하며 깎아내렸고,
역참제도의 폐지로 우리 땅에서 사라지고 없는 장승을
다시 찾아내 벅수와 합치며 ‘장승’이 표준말이라고 왜곡했다.
그리고 1912년 언문철자법에 포함시켜 공표하고 교육시켰다.
”라며 벅수와 장승은 분명히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미국 사람으로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941년 일본 수묵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에서 일본미술사를 강의했던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는
“이정표(장승)와 수호신(벅수)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이 말을 뒷받침해준다.
마을마다 있었던 벅수 가운데 나무로 만든 것들은 자연히 썩어서 없어지게 되었고,
그나마 돌로 만든 것이 손에 꼽을 만큼 귀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오늘 보는 벅수는 원래 남장동에 있던 것을
1968년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남장사 입구로 옮겨 세웠던 것인데
벅수와 장승이 뒤엉켜 알려진 탓에
장승 곧 돌로 만들었다고 석장승으로 불린 듯하다.
전체 높이는 186cm인데 땅속에 묻힌 부분이 있어서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얼굴 형상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같이 큰 눈과 상대적으로 작은 귀,
그리고 얼굴의 가운데는 주먹처럼 큰 코가 있고,
입술에는 송곳니가 뻗어있어 매우 독특하면서도 무섭기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제는 보기 어려운 석장승 곧 벅수를 남장사 앞에서 만나
옛 선조들의 신앙과 미학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