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기
로마 7,18-25; 루카 12,54-59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2023.10.27.;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후와 기상을 알아내기 위한 자연의 징표는 잘 읽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기 위한 시대의 징표는 왜 읽을 줄 모르느냐고 군중에게 질타하셨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면 올바른 일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라기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질타 당하고 나무람을 받는 군중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반 시민들이라기보다는 교회의 평신도들입니다.
평신도들은 사회에서 선과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뜻 잘 나서지 못합니다. 우선 확신이 쉽사리 들지 않기 때문이고, 확신이 들어도 그들은 뭉쳐 있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이라기 보다는 흩어진 모래알 같은 군집 속의 개인들이라서 용기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선뜻 나서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복음적인 식별 아래 평신도들 곁에서 동행하며 사회적 문제에 공동으로 응답하도록 북돋아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하는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고 또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성령께서 부여하시는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 교회의 쇄신이며 시장 민주주의에게도 빛을 비추어주는 가톨릭 민주주의입니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우상숭배 풍조에 흔들려가면서도 용감하게 사도들의 선교 없이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이룬 로마 교우들에게 사도 바오로도 함께 하고자 로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질타하면서도 그는 진정성 있게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평신도들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이러한 진정성이 돋보이는 대목은 바로 오늘 독서 내용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부끄러움을 간직한 채 고백하였습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마는 자기 자신의 유약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듯 비참한 영혼 상태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사도 바오로의 본심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이렇게 솔직하자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 고백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그의 편지는 사적 편지임에도 공적인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지만 혼자 하기 어려우면 함께 해서라도 공동으로 식별해야 하고, 그렇게 식별하고 판단된 바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에 많은 평신도들이 전통적 신심과 개인의 기복적 성향에로 도피하게 됩니다. 마땅히 직면해야 할 현실, 즉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것만을 피하려는 소극적 경향에로 도피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기는 커녕 주일미사를 참례하는 일만 걸르지 않아도 일반적으로 ‘훌륭한 평신도’로 칭송받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대다수 평신도들이 이런 현실도피적 경향에로 숨어들다보니, 신자 공동체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성직자들에게 과중한 무게가 쏠리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 경우에 성직자는 선택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현실도피적 평신도들을 일깨워서 스스로 올바른 일을 판단하고 각자 공동체 의식 속에서 주체적인 행동을 하게 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사제 직무의 권위를 앞세워서 평신도들의 판단을 대신 맡아서 하는 권위주의적 행동을 하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은 후자의 경우에로 내몰립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가 주도하는 모든 활동과 사업은 ‘영적’ 외양을 띠지만 평신도들을 수동적 객체로 삼아 추진하는 ‘세속성’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93항).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태도가 바로 영적 세속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평신도들의 현실도피적 성향과, 성직자들의 권위주의 그리고 영적 세속성이 결합된 결과가 오늘날 세례자의 90%가 냉담하는 참담한 사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유럽과 미국 등 쇠락한 선진국의 교회들이 걸어간 길을 한국교회도 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고나 할까요? 교우 여러분! 올바른 일을 서로가 함께 식별하고 판단하여 새 하늘 새 땅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매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백년 박해를 이겨낸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기,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