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보슈 송생원?“
한생원이 허연 탑삭부리에 묻힌 쪼글쪼글한 얼굴이 위아래 다섯 대 밖에 안 남은 누런 이빨과 함께 흐물흐물 자꾸만 웃어지는 웃음을 언제까지고 거두지 못하면서, 그러다 별안간 송생원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아주 긴하게
"우리 독립만세 한번 부르실까?“
"남 다아 부르구 난 댐에, 건 불러 무얼 허우?“
송생원은 한생원과 달라 길천이한테 팔아먹은 논도 없으려니와, 따라서 일인들이 쫓기어 가더라도 도로 찾을 논도 없었다.
"송생원, 접때 마을에서 만세를 부를 제, 나가 부르섰던가?"
"난 그날,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구 누었었는걸.“
"나두 그날 고만 못 불렀어.“
"아따 못 불렀으면 못 불렀지, 늙은 것들이 만세 좀 아니 불렀기루 귀양살이 보내겠수?“
"난 그래두 좀 섭섭해 그랬지요…… 그럼 송생원 우리 술 한잔 자실까?“
"술이나 한잔 사주신다면.“
"주막으루 나갑시다.“
두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마을에 단 한 집밖에 없는 주막으로 나갔다.
"에구머니, 독립두 되구 볼 거야. 영감님들이 술을 다 자시러 오시구.“
이십 년이나 여기서 주막을 하느라고, 인제는 중늙은이가 된 주모 판쇠네가, 손님을 환영이라기보다 다뿍 걱정스러한다.
"미리서 외상인 줄이나 알구, 술 좀 주게나.“
한생원이 그러면서 술청으로 들어가 앉은 것을, 송생원도 따라 들어가 앉으면서 주모더러
"외상 두둑히 드리게. 수가 나섰다네.“
"독립되는 운덤에 어느 고을 원님이나 한 자리에 해 가시는감?"
"원님을 걸 누가 성가시게, 흐흐……“
한생원은 그러다 다시
"거, 안주가 무어 좀 있나?"
"안주두 벤벤찮구 술두 막걸린 없구 소주뿐인 걸, 노인네들이 소주 잡숫구 어떡허시게.“
"아따 오줌은 우리가 아니 싸리.“
젊었을 적에는 동이술을 사양치 아니하던 영감들이었다. 그러나 둘이가 다 내일 모레가 칠십. 더구나 자주자주는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차에, 싱겁다고는 하지만 소주를 칠팔 잔씩이나 하였으니 과음일 수밖에 없었다.
송생원은 그대로 술청에 쓰러져 과연 소변을 저리기까지 하였다.
한생원은 송생원보다는 아직 기운이 조금은 좋은 덕에, 정신을 놓거나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우리 논을 좀 보러 가야지, 우리 논을. 서른다섯 해 만에, 우리 논을 보러 간단 말야, 흐흐흐.“
비틀거리면서 한생원은 술청으로부터 나온다.
주모 판쇠네가 성화가 나서
"방으루 들어가 누섰다, 술 깨신 댐에 가세요. 노인네들 술 드렸다구 날 또 욕허게 됐구면."
"논 보러 가, 논. 길천이게다 판 우리 논. 흐흐흐. 서른다섯 해 만에 도루 찾은, 우리 일곱 마지기 논, 흐흐흐.“
"글쎄 논은 이 댐에 보러 가시면 어디루 가요?“
"날, 희떤소리 한다구들 웃었지. 미친 놈이라구 웃었지, 들. 흐흐. 서른 다섯 해 만에 내 말이 들어맞일 줄을 누가 알았어? 흐흐흐.“
말은 혀꼬부라진 소리로, 몸은 위태로이 비틀거리면서, 한생원은 지팡이를 휘젔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다 동네 젊은 사람과 마주쳤다.
"아 한생원 웬일이세요?“
"논 보러 간다, 논. 흐흐흐. 너두 이녀석, 한덕문이 길천이한테 논 팔아먹던 대 났구나, 그런 소리 더러 했었지? 인제두 그런 소리가 나오까?“
"취하섰군요.“
"나, 외상술 먹었지. 논 찾았은깐 또 팔아서 술값 갚으면 고만이지. 그럼 한 서른다섯 해 만에 또 내것 되겠지, 흐흐흐. 그렇지만 인전 안팔지, 안팔아. 우리 용길이놈 물려줘여지, 우리 용길이놈.“
"참, 용길이 요새 있죠?"
"있지. 길천이한테 팔아먹었을까?“
"저, 읍내 사는 영남이가 산판(山坂) 하날 사서 벌목(伐木)을 하는데, 이 동네 사람들더러 와 남구 비어주구, 그 대신 우죽(枝葉)가져가라구 하니, 용길이두 며칠 보내서 땔나무나 좀 장만하시죠.“
"걸 누가…… 논을 도루 찾았는데.“
"논만 찾으면 땔나문 없어두 사시나요?“
"논두 없어두 서른다섯 해나 살지 않었느냐?“
"허허 참. 그러지 마시구 며칠 보내세요. 어서서 다 비어버려야 할 텐데, 도무지 사람을 못 구해 그러니, 절더러 부디 그럭허두룩 서둘러 달라구, 영남이가 여간만 부탁을 해싸여죠. 아, 바루 동네서 가찹겠다, 져나르기 수얼허구…… 요 위 가잿골 있는 길천농장 멧갓이래요.“
"무어?“
한생원은 별안간 정신이 번쩍 나면서 대어든다.
"가잿골 있는 길천농장 멧갓이라구?“
"네.“
"네라니? 그 멧갓이…… 가마안자, 아니, 그 멧갓이 뉘 멧갓이길래?"
"길천농장 멧갓 아녜요? 걸, 영남이가 일인들이 이번에 거들이 나는 바람에 농장 산림감독하던 강서방한테 샀대요.“
"하, 이런 도적놈들. 이런 천하 불한당놈들. 그래, 지끔두 벌목을 하구 있더냐?"
"오늘버틈 시작했다나 봐요."
"하, 이런 천하 날불한당놈들이."
한생원은 천방지축으로 가잿골을 향하여 비틀걸음을 친다.
솔은 잘 자라지 않고, 개간하여 밭을 만들자 하니 힘이 부치고 하여, 이름만 멧갓이지, 있으나마나한 멧갓 한 자리가 있었다. 한 삼천 평 될까말까, 그다지 크지도 못한 것이었었다.
이 멧갓을 한생원은 길천이에게다 논을 팔던 이듬핸지 그 이듬핸지, 돈은 아쉽고 한판에 또한 어수룩이 비싼 값으로 팔아넘겼었다.
길천은 그 멧갓에다 낙옆송을 심어, 삼십여 년이 지난 지끔 와서는 아주 헌다한 산림이 되었었다.
늙은이의 총기요, 논을 도로 찾게 되었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깜빡 멧갓 생각은 미처 아직 못하였던 모양이었다.
마침 전신주 감의 쪽쪽 곧은 낙엽송이 총총들이 섰다. 베기에 아까와 보이는 나무였다.
한 서넛이나가 한편에서부터 깡그리 베어 눕히고, 일변 우죽을 치고 한다.
"이놈, 이 불한당놈들. 이 멧갓 벌목한다는 놈이 어떤 놈이냐?"
비틀거리면서 고함을 치고 쫓아오는 한생원을,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일하던 손을 멈추고 뻐언히 바라다보고 섰다.
"이놈 너루구나?"
한생원은 영남이라는 읍내 사람 벌목 주인 앞으로 달려들면서, 한 대 갈길듯이 지팡이를 둘러멘다.
명색이 읍사람이라서, 촌 농투성이에게 무단히 해거를 당하면서 공수하거나 늙은이 대접을 하려고는 않는다.
"아니, 이 늙은이가 환장을 했나? 왜 그러는 거야 왜."
"이놈, 네가 왜, 이 멧갓을 손을 대느냐?"
"무슨 상관여?"
"어째 이놈아 상관이 없느냐?"
"뉘 멧갓이길래?"
"내 멧갓이다. 한덕문이 멧갓이다, 이놈아."
"허허, 내 별꼴 다보니. 괜시리 술잔 든질렀거들랑. 고히 삭히진 아녀구서, 나이깨 먹은 것이, 왜 남 일하는 데 와서 이 행악야 행악이. 늙은인 다리뼉다구 부러지지 말란 법 있나?"
"오냐, 이놈, 날 죽여라. 너구 나구 죽자."
"대체 내력을 말을 해요. 무엇 때문에 이 야룐지, 내력을 말을 해요."
"이 멧갓이 그새까진 길천이 것이라두, 조선이 독립됐은깐 인전 내것이란 말야, 이놈아."
"조선이 독립이 됐는데, 어째 길천이 멧갓이 한덕문이 것이 되는구?"
"길천인, 일인들은, 땅을 죄다 내놓구 간깐, 그전 임자가 도루 차지하는게 옳지, 무슨 말이냐?"
"오오, 이녁이 이 멧갓을 전에 길천이한테다 팔았다?"
"그래서."
"그랬으니깐, 일인들이 땅을 다 내놓구 가니깐, 이녁은 팔았던 땅을 공짜루 도루 차지하겠다?"
"그래서."
"그 개 뭣 같은 소리 인전 엔간치 해두구, 어서 없어져 버려요. 난 뻐젓이 길천농장 산림관리인 강태식이한테 시퍼런 돈 이천 환 주구서 계약서 받구 샀어요. 강태식인 길천이가 해준 위임장 가지구 팔구. 돈 내구 산 사람이 임자지, 저, 옛날 돈 받구 팔구 팔아먹은 사람이 임잘까?"
8‧15 직후, 낡은 법이 없어지고 새로운 영이 서기 전, 혼란한 틈을 타서, 잇속에 눈이 밝은 무리들이 일본인 농장이나 회사의 관리자와 부동이 되어가지고, 일인의 재산을 부당 처분하여 배를 불린 일이 허다하였다.
이 산파사건도 그런 것의 하나였다.
[5]
그 뒤 훨씬 지나서.
일인의 재산을 조선 사람에게 판다, 이런 소문이 들렸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한생원은 그 논 일곱 마지기를 돈을 내고 사지 않고서는 도로 차지할 수가 없을 판이었다. 물론 한생원에게는 그런 재력이 없거니와, 도대체 전의 임자가 있는데, 그것을 아무나에게 판다는 것이 한생원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한 처사였다.
한생원은 분이 나서 두 주먹을 쥐고 구장에게로 쫓아갔다.
"그래 일인들이 죄다 내놓구 가는 것을, 백성들더러 돈을 내구 사라구 마련을 했다면서?"
"아직 자세힌 모르겠어두, 아마 그렇게 되기가 쉬우리라구들 하드군요."
해방 후에 새로 난 구장의 대답이었다.
"그런 놈의 법이 어딨단 말인가? 그래, 누가 그렇게 마련을 했는구?"
"나라에서 그랬을 테죠."
"나라?"
"우리 조선나라요."
"나라가 다 무어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이번엔 일인이 내놓구 가는 내 땅을 저이가 팔아먹으려구 들어? 그게 나라야?"
"일인의 재산이 우리 조선나라 재산이 되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당연?"
"그렇죠."
"흥, 가만 둬두면 저절루, 백성의 것이 될걸, 나라 명색은 가만히 앉었다, 어디서 툭 튀어나와 가지구, 걸 뺏어서 팔아먹어? 그 따위 행사가 어딨다든가?"
"한생원은, 그 논이랑 멧갓이랑 길천이한테 돈을 받구 파섰으니깐 임자로 말하면 길천이지 한생원인가요?"
"암만 팔았어두, 길천이가 내놓구 쫓겨갔은깐, 도루 내것이 돼야 옳지, 무슨 말야. 걸, 무슨 탁에 나라가 뺏을 영으루 들어?"
"한생원한테 뺏는 게 아니라, 길천이한테 뺏는 거랍니다."
"흥, 둘러다대긴 잘들 허이. 공동묘지 가보게나. 핑계 없는 무덤 있던가? 지, 병신년에 원놈(郡守) 김가가 우리 논 열두 마지기 뺏을 제두 핑곈 다 있었드라네."
"좌우간, 아직 그렇게 지레 염렬 하실 게 아니라, 기대리구 있느라면 나라에서 다 억울치 않두룩 처단을 하겠죠."
"일 없네.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길 삼십육 년두 나라 없이 살아왔을려드냐. 아니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구 살지.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할 땅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야?"
그러고는 털고 일어서면서 혼잣말로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
(1946. 4. 18)
〈解放文學選集[해방문학선집], 1946 ; 잘난 사람들, 1948〉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