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섭의 한국영화 쟁점 3 : 한국의 영화 정책과 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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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7 / 강한섭(영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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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에 걸친 서울예대 영화과 강한섭 교수의 한국영화 쟁점, 그 마지막 글을 게재한다. 한국의 영화 산업과 미학에 이어 마지막 쟁점은 한국의 영화 정책과 시스템을 논한다.
“흥행 성공작이 고작 30만-50만 명 관객 정도 하는 시대가 곧 올 텐데.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요즘 내가 감독, 제작자, 투자자 만나면 늘상 하는 소리다. 평소에 ‘저사람 괜찮다. 양식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본다. 그러면 나도 공연한 소리 했나 싶어 눈길을 외면한다.
한국영화 한 편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관객 잠재력은 1천만 명이다. 강우석과 강제규가 만들고 증명했다. 그들이 외계인은 아니기 때문에 1천만 초대박 영화가 몇 년에 한 번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평균적인 한국영화의 흥행 성공 기준은 현재 150~200만 명 관객 밴드에서 80~100만으로 2차 하강한 다음, 결국 30~50만 밴드로 추락할 것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최악의 경우 영화 붐이 시작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의 10~20만 명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그때가 되면 비디오 시장은 불법 복제와 다운로드로 초토화되어 있을 것이다.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한 해를 보내는 엽기 괴담도 아니다. 요즘 영화계에 횡행하는 돌팔이 영화 경제학의 자의적인 통계를 믿는 이에게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경제학의 냉정한 통계가 그런 수치를 보여 준다.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가 편당 42억 원을 넘어섰다. 평균 제작비라는 개념은 학술적으로 신뢰할 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산업의 흐름을 일정하게 보여 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평균적인 한국영화가 수익을 보려면 비디오/DVD, 지상파 방송, 케이블 방송, 해외, 인터넷 VOD, PPL, 그리고 영화 소설 등등 부수 시장의 판권이 모두 판매되더라도 극장 관객이 적어도 120만 명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쇼 비즈니스 세계는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밀림이다. 관객은 규모면에서 특A급 영화를 선택하지 평균적인 영화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를 흥분시키는 한국영화들은 평균 제작비 이상의 돈을 쓰고 이들의 손익 분기점도 관객 200만, 250만 식으로 높아진다.
과연 이러한 관객 동원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 이런 질문을 하지도 않는다. 복잡한 산업 구조와 통계 수치를 말하는 것보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동포들은 FIFA 랭킹은 떨어지지만 중요한 게임에서는 일본팀을 이기는 한국 축구의 괴력 때문인지 일본을 얕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일인당 소득이 한국의 3.5배이며 전체 생산량은 10배나 크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일본보다 약간 많으며 한국영화 스타의 출연료는 일본 스타의 2배가 넘는다. 붐이 시작되기 전인 1998년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15억 원 정도였다. 이것이 6년 만에 거의 세 배가 된 것이다.
또 일본에서는 보통 극장 수입 10억 엔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영화를 흥행 성공작으로 분류한다. 일본의 평균 입장료가 1,250엔이므로 성공작은 8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야 한다. <쉬리>가 2000년 일본에서 관객 140만, 흥행수입 18.5억엔(185억 원)을 기록하고 그해 일본 흥행 순위 20위를 차지하자 열도가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 인구 1억3천만 명에 비하면 겨우 3분의 1 정도의 인구를 가진 한국의 영화 산업은 보통 150만 명은 동원해야 겨우 손익 분기점을 넘어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수익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이른바 한국영화 붐은 정부가 이 산업에 또다시 돈비를 뿌리지 않는다면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다. 한국영화 극장 흥행의 트렌드는 단기적으로는 몇 번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하강 추세를 이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 제작 편수, 평균 제작비 등등의 수치는 결국 손익 분기점 30~50만 명 수준으로 수렴되고 재구성될 것이다.
99~04 시스템
한국영화 붐 또는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화 황금광 시대는 1999년 2월 영화 <쉬리>의 대박 흥행으로부터 시작한 다음 몇 번의 부침은 있었지만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붐을 만들고 유지시켜온 힘과 관계의 총체를 ‘99-04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극장 관객을 연 5천만 명에서 1억2천만 명으로 끌어올린 괴력의 시스템, 하지만 영화 산업의 전체 시장 규모는 오히려 축소시킨 허명의 시스템!
99-04시스템은 1999년 봄, 기존의 영화진흥기구인 '영화진흥공사'가 무능한 관료주의의 표본으로 낙인찍혀 폐지되고 민간행정기구의 법적 위상을 가진 ‘영화진흥위원회’가 새롭게 구성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1,700억 원 진흥기금 조성과 제작 편수를 40편에서 150편으로 늘려 한국을 아시아 영화 산업의 미니 메이저 국가로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영화산업진흥5개년계획’이 발표된다. 박정희 소장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빼다 박은 새로운 영화 산업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대학 교육이 필요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지각만 있다면 이 정책이 현실을 무시한 환상이며 사이비 논리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 편수는 수많은 요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중첩적으로 작용하면서 역사적으로 결정된다. 국가가 40편에서 150편으로 늘리고 싶다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500억 원 제작 자본이 연 2회전하면서 만들었던 영화 산업에 갑자기 1,700억 원이 쏟아지자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영화 거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거품은 반드시 붕괴 된다’는 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경제학의 기본 원리이자 공리다.
거품 붕괴의 여러 조짐들이 지금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철마다 300만-400만 하는 대박 영화가 나왔는데 금년 중반기부터는 흥행 성공작이 고작 150만~200만 정도의 관객을 모으고 있다. 최민식 올드보이가 출전했는데 50만이 될까 말까고 권상우 스타도 겨우 100만에 턱걸이한다. 영화 관람객 수는 지난 9월부터석달째 연속으로 감소하고 있다. 10월은 9월에 비해 16% 줄고 지난해 9월에 비하면 14% 감소했다. 11월의 전년 대비 관객 수 감소율은 무려 19%로 극장업은 서비스 산업 중 하락률 1위라는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멀티플렉스 신축 붐으로 스크린 수는 지난해에 비해 10% 이상 증가하고 있는데 말이다. 영화관은 장사가 안 된다며 가마솥까지 들고 나와 시위를 벌인 식당업보다 더한 불경기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흥행업은 부침이 심하다. 이러다가 대박 영화 한방이 나와 시장 흐름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하강 트렌드는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붐이 시작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붐은 우리말로 하면 벼락 경기를 뜻한다. 붐이란 원래 잠깐 왔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계 능력
그러나 이상하다 못해 기괴한 사실은 우리들 대부분이 지금 한국영화가 이렇게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알더라도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이 쪼그라들고 왜곡되는 모습이 간단한 수치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잘못된 영화 정책과 함께 여기에는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유구한 그래서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단단하게 입력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특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 바로 1세기 전 외국인들에게 ‘은자(隱者)의 나라’로 비춰진 조선의 국가 이미지였다. 우리는 그러한 표현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로 국제 문제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가장 이상적인 유교적 도덕과 윤리를 논하며 평화를 추구했던 순박한 민족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 즉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한국과 한국인의 전통이요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아닐까.
전략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Strategy는 원래 희랍어 Strateg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장군의 기예’를 의미한다. 즉 전쟁에 나선 장수가 자신이 가진 병력과 무기를 동원, 적용하여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략적 사고의 출발은 현재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현실 해석력이 부실하면 ‘지금-여기-나’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기회와 위기를 알 수 없게 된다. 즉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된다. 문제의 해결책은 보통 그 문제 속에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정확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문제의 해결책이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효과적인 전략을 세울 수 없으며 전략을 집행할 선도적인 조직체를 만들고 운영할 수 없게 된다.
‘진흥5개년계획’을 보면 영화를 포함한 전체 영상 문화의 큰 그림을 그린 다음 한국이 비교 우위에 있는 영역을 선택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어떠한 전술을 동원해야 하는지를 구상하는 디자인 능력, 즉 설계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추상적 목표를 정하고 그저 "돌격! 앞으로 전진"을 외치는 무모한 만용이 넘쳐흐른다. 전략 부재의 한국과는 달리 영화 산업 강대국들은 저마다 영화 산업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꿈꾸며 바다를 건넌 개척민들이 이룩한 땅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기본적으로 ‘관객이 원하는 것을 준다’는 자유주의 문화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 믿음은 다수 대중 관객이 선택하는 영화가 소수 문화 엘리트가 옹호하는 영화보다 궁극적으로 우수한 영화일 것이라는 자유주의 정치학의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영화는 미국 인구 분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서부의 보수적인 백인 중산층이 선호하는 이야기 장르와 스타일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이후 다시 세계의 가장 많은 인구층이 즐기는 영화의 공통 분모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르적으로는 정의를 추구하는 액션 스펙터클 영화와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드라마 영화를 전략적으로 채택하고 이를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생산 시스템으로 수직 통합 구조를 지닌 거대 스튜디오 시스템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신의 예언이 아니라 개인의 사고와 판단을 통해서만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근대의 이데올로기를 발명한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 중에서도 예술을 창조하는 작가들을 초인간(超人間)으로 대접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작가에게 자유를 주어라!’는 엘리트주의 문화 이데올로기를 채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고 그 엘리트 작가들이 만든 영화를 ‘예술영화’로 개념화하여 세계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칸, 베니스, 그리고 베를린영화제는 세계 영화 시장에서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하는 서유럽의 민족영화인 예술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벤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영화 강대국들의 20세기 영화 전략은 이렇게 목적 지향적이고 주도면밀했다. 그러나 한국은 시도 때도 없이 미국식 모델과 서유럽식 모델 사이를 방황했다.
석유, 반도체, 그리고 영화
서기 1,000년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국가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칼리프가 통치하는 범이슬람 제국이었고 그 중심의 하나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그였다. 이슬람 제국의 금으로 만든 화폐 디나르는 세계 화폐로 통용됐으며 바그다드의 시장 바자(bazaar)에서 거래되는 주요 무역 상품은 실크와 도자기,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잡혀온 노예들이었다. 1천 년의 세월이 흘러 서기 2,000년 세계의 최강대국은 자유, 평등, 그리고 행복 추구 권리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미국이며 그 중심은 뉴욕이다. 미국은 달러를 무기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주요 교역품은 석유, 반도체, 무기, 그리고 영화다.
지난 11월 1일 초강대국 미국의 주한 대사 크리스토퍼 힐이 말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은 FTA(자유무역협정)와 스크린쿼터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 그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린 ‘FTA 로드맵’을 주제로 한 특강에서 “미국은 한국의 영화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도 상영일 중 40%를 한국영화로 유지하게 하는 것을 불필요한 조치로 생각하고 있다”며 “한국은 FTA와 스크린쿼터 둘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노무현 정부와 한국 국민을 압박했다.
한국 신문들은 단신으로 미국 대사의 주장을 전했지만 이는 의미심장하다. 스크린쿼터의 유지와 축소에 대한 오랫동안의 논쟁이 마지막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간단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스크린쿼터를 포기하라고 윽박지르며 최후 통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왜 한국의 스크린쿼터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일까? 왜 스크린쿼터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을까?
축소론은 스크린쿼터가 국제 무역과 자유 시장의 일반적인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세계 질서의 큰형님인 미국이 말썽꾸러기 동생 한국에 대해 시정을 권고하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다. 아니 사람들은 결코 이렇게 말하는 법이 없다. 축소론자들은 국가의 보다 큰 이익을 위해 영화인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우국충정의 논리로 자신의 순진함을 위장한다. 그러나 자유 시장과 공정한 경쟁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훌륭한 개념이지만 완전한 정보가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공유되는 상황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 시장은 상대적 개념이고 강자에 의해 편의적으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미국은 자유 시장 논리가 현재 미국의 국익에 부합되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다. 영화 산업 부분은 압도적 비교 우위에 있기 때문에 자유 경쟁하자는 것이다.
2차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들의 경제 발전 정책은 크게 ‘수입 대체(import substitution)'와 ‘수출 주도(export orientation)'로 구분된다. 한국의 영화 산업 정책은 김영삼 문민 정부가 ‘<쥬라기 공원> 한 편이 현대자동차 150만 대 수출과 맞먹는다’는 애드벌룬을 쏘아 올리기 전까지는 수입 대체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미국이 스크린쿼터를 공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영화가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지만 지금처럼 자꾸 경쟁력 있는 영화를 만들어 해외 수출에 나선다면 할리우드의 세계 독과점 체제에 자칫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미국의 요구는 한마디로 반도체는 한국에 줄 수 있지만 석유, 무기, 그리고 21세기를 주도할 지식 산업의 핵심인 영화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자립적인 영화 산업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 영화인들은 국제 영화 시장에 나서지 말고 90년대 중반까지처럼 국내용 영화 정도를 만들어 초식 동물처럼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극장-2시간-드라마 시스템
한국영화는 지금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위기는 앞에서 말한 ‘99-04 시스템’의 몰락이다. 이 위기 국면은 생각보다 훨씬 치명적인 규모와 속도로 펼쳐질 것이지만 해결책 또한 이미 제시되어 있다. 카드와 이동통신사들의 멤버십 서비스에 의한 극장 가격 할인과 덤핑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가격 체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못하다. 멀티플렉스 경영진들은 가격이 자본주의 시장을 작동시키는 유일한 운영 체계(operating system)로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다. 업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정부가 공정 거래의 칼을 들고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경영 위기에 몰린 군소 극장들이 카드-통신사 할인뿐만 아니라 자체 요금 할인에 들어가고 있다. 관람료 체계의 전면적 붕괴 위험까지 있다. 카드-이동통신사 할인은 한국 영화 산업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험한 시한 폭탄이다.
두 번째 위기는 영화를 만들고 관객이 영화를 감상하는 기술과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면서 나타났다. 그 변화의 양상은 영화 기술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관객들은 어두운 극장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넷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영화의 배급과 상영은 실시간의 동시성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영화 세상이 1년 365일 24시간 거대한 망으로 항상 접속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변화를 ‘극장-2시간-드라마 시스템’의 해체라고 부르고 싶다. 강대국의 영화 산업들은 지금 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다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영화 전략을 구상하고 동원하여 자국의 영화 산업을 재창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국의 국내 영화상인 아카데미영화상이 이탈리아어로 연기하는 로베르토 베니니에게 남우주연상을 주고 브라질영화 <중앙역> 배우를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리는가 하면 홍콩 사람 성룡을 시상자로 초대한다. 바로 ‘탈(脫)할리우드 전략’을 통해 역설적으로 할리우드의 지배 영역을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절묘한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디지털과 인터넷의 도전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메이저사들이 연합하여 무비링크라는 벤처 회사를 설립, 실시간에 DVD 화질과 음질로 영화를 비트로 전송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출발시키고 있다. MP3 파일을 유료화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음반 산업의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거대 영화 배급사이자 극장체인인 UGC는 극장 경영에 월 단위의 회원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월 98프랑(약 1만5천 원)만 내면 프랑스 전국 26개 극장에서 한 달 동안 무제한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정액권 제도를 시작하여 대성공을 거뒀다. 프랑스 영화계가 기사 회생한 것은 월 회원제가 기폭제가 되었다.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한 일종의 덤핑 행위라는 군소 극장들의 항의로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만 이 제도는 영화 산업이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회원 제도는 텔레비전 스위치만 켜면 언제나 수십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에서 영화의 개별 티켓은 무의미하고 멤버십 제도를 도입하여 영화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접속(access)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극장-2시간-드라마 시스템'이 약화되고 그 자리를 ‘실세계-자유시간-탈(脫)장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가 한국 영화 산업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글로벌 충무로
그러나 보다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한국영화의 현재 포텐셜은 돈과 가격 덤핑으로 만들어진 모래성이기 때문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평균 제작비 규모도 추락할 것이고 제작비 100억 원 이상의 영화는 꿈도 꿀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미국이 원하는 한국영화의 초식 동물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현단계 한국 영화 산업의 키워드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다. 수출이다. 그런데 수출은 쉽게 늘어나지 않는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해외 시장에서 실패했으며 배용준을 비롯한 4대 사마의 인기는 대단하지만 그들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일본 내 반응은 별로다. 그래서 한국영화 수출액 중 거의 70%를 점하는 일본시장은 곧 위축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키워드는 수출이지만 개별 영화가 아니라 글로벌 충무로를 수출하는 것이다.
얼마 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명필름의 심재명 씨를 만나 물었다. “앞으로 10년 후 한국 영화 산업의 화두는 뭐가 될 것 같아요?” 명기획자가 대답했다. “나는 지금 흥분 상태예요. 영화 한 편으로 지금 1천 원을 번다면 10년 후에는 1천만 원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재명 씨의 말은 한국영화가 10년 후에는 협소한 한반도의 남쪽과 지금 모색하고 있는 동아시아 시장을 훌쩍 뛰어넘어 유럽과 북미 대륙이라는 세계 영화 시장으로 진출하여 명실상부한 영상 산업 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바로 1천만 원, 1천만 달러, 아니 1억 달러를 벌려면 그냥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충무로를 수출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충무로 영화 산업이 이미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업들의 거시 경영 전략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매출 규모가 일본 소니보다 많을 뿐 아니라 순이익은 일본의 소니, 마쓰시다, 히타치, 샤프, NEC 5개사를 합친 것보다 크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강점은 반도체, 텔레컴, 디지털 기기의 융합이지만 약점은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LG와 CJ 같은 한국 기업들은 조만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의 인수 합병 전쟁에 뛰어들 것이다. 바로 그 순간과 지점이 충무로가 글로벌화 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 10년 한국영화는 참 행복했다. 청년들은 문학 청년의 외투를 집어던지고 영화 청년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도시 카페의 벽을 장식하던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진들은 철거되고 그 자리를 세련되고 도발적인 한국영화의 포스터들이 차지했다. 저급한 문화로 천대받던 한국영화는 갑자기 존경받는 문화가 되었으며 충무로의 일급 기획 제작자와 감독들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영웅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제2금융권은 물론이고 시중 은행들도 한국영화에 투자하게 되었으며 영화 산업은 벤처 산업의 가장 오래되고 매력적인 모델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스크린쿼터 축소와 철폐를 고집하는 미국의 입장은 한국영화가 얼마나 중요한 산업이 되었는가를 우회적으로 보여 준다.
할리우드영화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충무로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유럽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 위해 ‘예술영화’도 팍팍 밀어주고, 일본이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하면서 애니메이션 강국을 꿈꾸는 것은 대한민국과 충무로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역동적인 에너지 때문이다. 지난 10년 그런 역동적 에너지를 만들어 낸 키워드는 ‘영화 산업 강대국’, ‘예술영화’, 그리고 ‘독립영화’였다. 그런 생각(들)과 개념(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논리학이 ‘99-04시스템’을 결정한 화두이자 이데올로기, 그리고 상징 조작이었다. 예술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심각해하는 영화인과 관객들은 수준 높은 문화의 창조자와 감식가가 됐으며 독립영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진지한 도덕적 가치의 정의로운 옹호자가 될 수 있었다. 영화 산업 강대국으로는 국가와 은행 금고를 열어 충무로에 제도권 자금이 흘러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99-04시스템’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써먹을 새로운 화두를 찾아야 한다. 새로운 화두로 사람과 돈과 기술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봄은 3월에 오는 것이 아니다. 몸서리치도록 추운 2월 초순의 어느 날 깨어 있는 사람 하나가 ‘입춘대길’ 글씨를 대문에 붙일 때 봄은 시작하는 것이다.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절기로는 봄의 시작이며 바람은 북풍에서 동풍으로 바뀌고 얼음 속에서 물고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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