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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래스카의 마운트 후드를 등반중인 윅 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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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000m 대 등반할 때 몽유병자 걸음걸이 되풀이
1972년 윅와이어는 몇 명의 친구들과 매킨리(6,194m) 남벽을 등반했다. 그들은 텐트를 휴대하지 않고 설동을 파고 비박했으며, 이틀간 폭풍우가 몰아칠 때 크레바스 속에 피신하며 혹한을 극복하고 등정에 성공했다. 나중에 그의 매킨리 등반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고교시절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좌우대칭을 이룬 산, K2(8,611m)를 사진으로 보고 깊이 매혹되어 등정할 꿈을 간직했던 윅와이어는 미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위태커에게 K2 등반을 제안했고, 그로 인해 1975년 미국 K2 북서릉 원정대가 결성됐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국경 분쟁 때문에 K2 등반허가를 받기가 무척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짐 위태커는 친구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등반허가를 받아냈다.
미국 K2 북서릉 원정대원들 중에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등정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직 등반대장인 위태커뿐이었다. 윅와이어는 마운트 레이니어의 등정 경험과 마운트 매킨리의 등정 경험이 있었다. 위태커 대장은 그의 젊은 아내 다이앤 로버츠를 등반대의 사진사로, 그리고 마운트 레이니어 등정자이며 그의 쌍둥이 동생인 루 위태커를 대원으로 선발했다. 윅와이어의 친구 암벽과 빙벽 등반의 귀재 둔함, 그리고 스탠리, 갈렌 로우웰, 산악영화 제작자 스티브 마츠도 참가했다.
그들은 대원들 간의 불화와 악천후, 대원들의 고산병, 포터들의 말썽 속에서도 K2 북서릉 6,700m 지점에 위치한 첫 번째 뾰족한 산봉우리까지 진출했다. 그 위쪽으로는 루트를 찾아내기 힘겨워 그들은 등반을 중단하고 퇴각했다. 그들은 결국 대원들 간의 불화와 악천후가 겹쳐 K2 등정에 실패했다. K2에서 미국 등반 팀의 뼈아픈 네 번째 실패였다.
윅와이어는 귀국 후 매킨리 남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단독으로 등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마리 루가 단독 등반은 위험하다고 반대했고, 그의 5명의 자녀들을 생각해서 등반도중 퇴각했다.
위태커 대장과 윅와이어 대원을 포함한 몇몇 대원들이 K2 재도전을 시도했으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분쟁이 계속되어 등반허가를 받는 데 난항에 부딪쳤다. 위태커 대장은 친구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K2의 등반허가를 다시 받아냈다. 케네디 상원 의원의 하버드대학 동창인 부토가 당시 파키스탄의 총리여서 등반허가 문제가 수월하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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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킨리의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한 크리스(좌)와 짐 윅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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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등반 허가를 받기 3주 전 등반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윅와이어의 산 친구 레이프 패터슨이 그의 아들과 친구와 함께 그의 집 부근 산에서 훈련 등반 중에 눈사태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들은 레이프 대원 대신 윅와이어와 마운트 후드의 요컴 능선을 함께 등반한 적이 있는 두산 재거스키를 초빙했다. 그러나 윅와이어와 두산, 스티브, 그리고 알 기블러가 페어웨더산맥에서 훈련등반 도중 피크 8440 정상에서 하산하다가 알 기블러와 두산이 함께 추락사하는 비극이 반복되었다.
미국 K2 등반대는 1976년 폴란드 대가 8,400m 지점까지 진출하고 푹풍설을 만나 퇴각한, K2 북동릉을 루트로 정했다. 대원들 중에는 다울라기리(8,167m)와 난다데비(7,817m) 등정자 루 라리차트와 존 로스켈리, 그리고 에베레스트(8,884m) 남서릉 등정자인 크리스 찬들러가 참가했다. 그들은 북동릉 상의 6,797m 지점에 위치한 거대한 세락(빙탑) 밑에 제3캠프를 구축했다.
그들은 제3캠프 위에서 아름다운 이중 무지개가 원을 이루고 있는, 보기 드문 신비한 광경을 목격하고 길조(吉兆)로 생각했다. 그들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경계선상에 있는, 최대의 난구간인 경사 55~60도인 칼날능선을 돌파해야 했다. 수많은 커니스(cornices, 눈 처마들)들이 늘어서 있어서 능선상으로는 통과가 불가능했다. 로스켈리와 리지웨이가 이틀 동안 칼날능선 벽 상부에 고정 로프를 설치하며 루트를 개척했다. 빌 섬머와 윅와이어도 그들을 도와 칼날능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1976년 폴란드 대는 이 구간을 돌파하는 데 10일이 걸렸지만 미국 대는 3일 만에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칼날 능선 끝 부분인 해발 6,950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하고, 에베레스트보다 더 가파르고 눈사태의 위험이 더 큰 K2 북동릉의 상부 설사면을 올랐다. 그들은 스노돔(snow dome) 밑에 위치한 베르크슈룬트의 붕괴 위험이 도사린 약한 브리지로 아슬아슬하게 건너 스노돔 꼭대기 7,711m 지점에 제5캠프를 설치했고, 등반대장 짐 위태커, 그의 부인 다이애나, 테리, 체리 대원들은 제5캠프까지 짐을 운반했다.
존 로스켈리와 릭 리지웨이는 K2 북동릉을 무산소로 직등하려고, 7,985m 지점에 제6캠프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들은 심설지대의 눈사태 위험 때문에 등반을 포기했다. 라이차트와 윅와이어, 그리고 테리 대원은 K2 정상 피라미드 밑으로 눈사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동벽의 심설을 트래버스했다. 라이차트가 짐을 벗어놓고 심설 속으로 러셀한 후 짐을 옮기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들은 정상 피라미드 밑에 돌출한 베르크슈룬트를 좁은 브리지로 건너고, 그곳에서 60여 m의 가파르고 단단한 설벽을 올랐다.
그들은 작은 크레바스가 나타나자 그 속, 아브루치 능선 상의 중앙 7,864m 지점에 2인용 작은 텐트로 제6캠프를 구축했다. 이탈리아 대나 일본대의 아브루치 능선 상의 최종 캠프지 고도보다 200여 m 낮은 장소였다. 크레바스 뒷벽이 눈사태의 방패막이 될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캠프지로 결정한 장소였다. 300여 m 위쪽에 정상 피라미드가 솟아 있고, 그 위로 여러 개의 빙탑들이 황혼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산 아래쪽으로 브로드피크와 가셔브룸4봉의 산 그림자들이 고드윈오스틴빙하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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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 윅와이어와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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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대원은 가장 무거운 짐을 그곳까지 운반한 후 탈진 상태가 되었다. 라이차트와 윅와어어 두 사람은 영하 30℃의 혹한에 시달리며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내고, 9월 6일 새벽 4시 반에 자일을 묶고 휘몰아치는 강풍 속에 K2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테리 대원은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하고 제5캠프로 하산해 그의 아내 체리와 합류한 다음, 등정자들의 안전한 하산을 도와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강풍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설사면의 표면 위에 수많은 주름들을 만들어 놓아 등반이 힘들었다. 윅와이어는 죽음의 지대라고 불리는 8,000m 지역을 등반할 때 몽유병자 같은 걸음걸이를 되풀이했다. 두 사람은 산소통을 한 개씩만 휴대했기 때문에 산소를 아끼기 위해 윅와이어는 8,077m 지점부터 산소를 사용했고, 라이차트는 더 위쪽의 고도에서 산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윅와이어가 보틀넥(Bottleneck)이라 불리는 가파르고 좁은 걸리를 선등하며 뒤돌아보았을 때, 라이차트의 산소 장비가 고장을 일으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틀넥을 오른 후, 좌측의 거대한 빙벽 밑의 좁은 통로를 트래버스해야 했다. K2 남벽의 3,000여 m 높이의 무시무시한 가파른 절벽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라이차트가 선등해 이 트래버스를 통과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심설지대가 나타나자 윅와이어가 선등을 교대했다. 그들은 눈 속에서 헤엄치는 자세로 달팽이 기어가듯 설벽을 올랐다. 정상 능선에서 라이차트는 산소장비의 고장으로 무산소 등반을 강행했다. 정상 능선 끝 부분에서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걸어서 오후 5시 15분 K2 정상을 밟았다. K2의 정상 넓이는 대형의 정찬 식탁의 크기에 지나지 않아 실망감이 컸다. 그들은 이탈리아 대와 일본대에 이어 K2를 3등으로 등정했다. 1938년(아브루치 능선 7,925m 지점 진출)과 1953년(아브루치 능선 7,800m 지점 진출) 두 차례의 찰스 휴스턴 대장 대와, 1939년 프리츠 비스너 대장 대의 K2 등정 좌절(아브루치 능선 8,367m 진출)을 겪은 후, 드디어 미국인들의 세계 제2의 고봉 K2 등정이라는 오랜 숙원이 성취되었다.
K2 등반 후유증으로 폐 절제수술 받고도 마운트 베이커 등반
소년 시절의 꿈을 이루어낸 윅와이어는 K2 등반의 미국 선구자들, 찰스 휴스턴, 밥 베이츠, 프리츠 비스너, 피트 쇠닝 등을 생각했다. 윅와이어는 K2 정상에서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사랑하는 아내와 5명의 자녀들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했다. K2 훈련 등반 도중 사망한 친구 두산과 알 기블러 그리고 레이프를 생각했다. 정상의 눈밭과 아래쪽 능선들이 저녁놀에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90분만 지나면 암흑이 찾아 올 것이다.
라이차트는 등정 후 사진 촬영을 마치고 혹한 때문에 서둘러 하산했고, 윅와이어는 정상에서 파노라마를 촬영하려고 시도했는데, 카메라의 렌즈가 얼음에 덮여 무용지물이 되어 실패했다. 그는 오후 6시 10분 정상을 출발해 늦게 하산하는 바람에 8,458m 지점에 닿았을 때 땅거미가 곧 찾아왔다. 윅와이어는 어둠 속에서 하산하다가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그 지점에서 비박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눈 속에 좁은 평지를 깎아내고 얇은 나일론 비박색을 설치하고 그 속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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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K2(좌측). 2 K2 동벽과 북동릉(우측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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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박색 밖에서는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스토브를 피웠으나 곧 가스가 떨어졌다. 산소통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산소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운파카, 침낭도 없었다. 고산병, 뇌수종이나 폐수종에 걸릴 확률이 높은 처지에 있었다. 심한 갈증을 느꼈다. 혹한 속에서는 혈액순환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서 손가락과 발가락에 동상이 걸릴 위험성이 높았다. 뇌나 허파에서 과잉의 혈액순환이 계속되면 급사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저체온증의 공포에 시달렸다. 7년 전 마운트 레이니어 등반에서 저체온증에 시달리다가 동료 에드 보울튼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에서 생환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영하 35℃ 이하의 혹한 속에서 사시나무 떨듯 하는 팔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혹한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설사면에서 조금씩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신발 뒤축을 눈 속에 박아 추락을 저지했으나 잠시 후 다시 몸이 흘러 내렸다. 그는 구두 뒤축을 이용해 추락을 멈춘 다음 비박색을 열고 찬바람이 일으키는 눈보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몇 피트 밖이 낭떠러지였다.
비박색 밖으로 나오니 혹한으로 온몸이 고통스럽게 떨리고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그는 비박색을 뒤쪽으로 9m 끌어당겨 재설치했으나 여전히 비박색은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아이스 해머와 아이스 액스를 꺼내 비박색 귀퉁이 눈속에 박아 고정시켰다. 그에게 하이포서미아(hypothermia) 초기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혈액순환을 위해 몸을 자꾸만 움직였다. 마운트 레이니어와 마운트 매킨리의 크레바스 속 혹한에서 비박을 하고 생환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몸을 움직여라, 움직여라, 자꾸만 움직여라. 발가락을 움직여. 손가락도 움직여. 팔을 들어 올려. 다리도 들어 올려.”
그는 새벽까지 죽지 말고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아내 마리 루와 자녀 애니, 캐디, 수지, 밥, 데비드의 곁으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너는 발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있잖아. 발가락에 아무런 감각이 없구나. 손가락도 마찬가지야. 그것들을 움직이거나 안 움직이거나 결과는 마찬가지겠구나.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너는 매킨리의 남벽에서 살아 돌아온 적이 있었지. 이곳의 고도가 좀 더 높긴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밤은 결국 끝날 거야. 손가락과 발가락을 계속 움직여. 너는 등정에 성공했어. 이제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하산하는 길만 남았어.”
드디어 새벽이 찾아와 K2의 정상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라보였다. 그는 정상으로 다시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래로 하산해야 했다. 그는 기나긴 밤의 고통에서 벗어나, 크램폰을 착용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추락지점이 아주 가까운 눈 처마와 가까이에서 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