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발 아래 소백산줄기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내 삶에 남아있는 마지막 꿈이었다.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사람으로서 선배들의 자취를 더듬어 소회를 반추해보려는 소박한 꿈이었다.
지난 8월 14일, 정재룡 친구의 배려로 그 마지막 꿈을 이루었다.
마음 따뜻한 재룡이에게 이승에서 가장 고마운 인사를 보낸다.
사진을 찍어서 크기를 조정한 다음 이메일로 보내준 김창현 친구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지난 6월 14일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사회학 총서 「총, 균, 쇠」를 축약하여 연재하기 시작한 이래 하름 데 블레이의 지리학 총서 「지금 왜 지리학인가」 독후감 연재를 마친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달 반 동안 나는 무척 행복했다. 하루 평균 7~8시간 정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은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책 한 권의 독후감이 원고지로 600장쯤 되었으니 두 권의 독후감을 합치면 원고지 1200장 분량, 두 달 반 동안 장편소설 한 편을 쓴 셈이다. 1990년대 초 월간지에 내 장편소설을 연재할 때도 이처럼 과작(過作)을 한 적은 없었다. 독후감을 쓰다가 보충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들추면 읽을거리가 넘쳐 독후감이고 뭐고 진종일 인터넷 정보에 빠져 지낸 날도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나라의 정보를 찾을 때도 그 나라와 관련된 각종 정보가 너무 재미있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때로는 지도상에 나오는 이웃 나라까지 궁금해져 아예 읽기와 쓰기를 젖혀두고 며칠씩 인터넷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짚고 넘어가는 게 예의일 듯하다. 아내는 지만증(遲慢症)이 심해서 5분 이상 책을 읽지 못한다. 책만 펼쳐 들면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눈이 침침해지고 골이 빠개질 듯 아파온단다. 그래서 내가 몇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자판을 두드리는 걸 보면 상굿도 신기해한다. 1970년대 초 「독서신문」에 게재된 내 수필을 읽고 펜팔 끝에 결혼에 이르렀으면서도 말이다. 허리 안 아파? 눈 안 피곤해? 자기 방에서 종일 TV를 보거나 잠을 자던 아내가 이따금 내 방을 들여다보고 말을 걸 때면 의자를 돌려 다정하게 대꾸를 해준다. 때가 되면 아내는 안주를 만들어놓고 나를 식탁으로 불러낸다. 식탁에 마주 앉아 아내는 식사를 하고 나는 ‘순하리’를 마시면서 우리 부부는 잠시 백수의 고달픔을 잊고 대화를 나눈다. TV를 보다가 궁금한 걸 기억해놨다가 내게 질문을 하는 것도 이때다. 며칠 전에는 Enya가 누군지 물어 인터넷에서 그녀가 부른 <Only Time>과
<May it be> 등을 찾아 들으며 Enya의 신비한 음색에 함께 빠져들기도 했다.
전문서적인 「총, 균, 쇠」와 「지금 왜 지리학인가」를 읽으면서 무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사회‧지리적 식견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방면의 전문가라면 굳이 다른 사람의 저술을 읽을 까닭이 없다. 두 책은 세계 여러 나라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한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재레드 박사나 하름 박사는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오랜 기간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탐사하고 자료를 모아 그 결과를 방대한 저술로 남긴 석학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어떤 교재보다 내용이 충실한 교재로 공부를 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우리는 함께 사회학과 지리학의 훌륭하고 알찬 강좌 하나씩을 들은 셈이다. 우리 나이에도 배울 기회가 있으면 기꺼이 참여하는 친구들을 가끔 본다. 정해진 시간에 어딜 찾아가서 강의를 들은 것보다는 편하게 집에 앉아서 공부를 한 셈이라 올해 같은 염천에 이 또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모자람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부족한 걸 알면 채우는 즐거움이 뒤따른다. 5나 6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은 10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 더 이상 아무런 지식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7이나 8쯤 알고 있는 사람에게 아는 체를 하다가 스스로 웃음거리 되기 십상이다. 어느 모임엘 가든 혼자서 다 아는 양 엉터리 식견을 떠벌이는 친구가 꼭 한두 사람 있게 마련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재무제표에서 △ 표시를 +로 잘못 이해하고 있으면서 아는 체를 했다가 크게 망신을 당한 뒤, 경제공부를 다시 하여 각종 경제지표에 해박해지게 되었다는 얘기는 유쾌한 에피소드다. 한명숙처럼 역사상 최초의 뇌물총리로 수감되는 마당에서까지 ‘양심의 세계에서는 나는 무죄’ 어쩌고 하며 파렴치한 변명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배움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不恥下問’인 것이다. 각중에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던 세계교육자대회에서 어느 초등학교 여교사 Shelly가 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나는 아직도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한다. 더러 사업을 접고 여행이나 독서를 하면서 자신에게도 보상을 좀 해주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친구의 노고를 인정하고 건강을 염려해서 하는 소리지 부러움과 존경의 강도에는 변함이 없다. 젊을 때 전문지식이나 기술을 익혀놓지 못한 나 같은 반거치는 나이가 들면 꼼짝없이 종신백수가 되는 게 세상 이치니 다른 뜻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염라대왕에게 잔명(殘命)을 반납할 수도 없는 일, 할 일이라고는 독서밖에 없다. 독서는 없는 수입에 그나마 비용이 가장 만만하여 나 같은 사람에게 딱이다. 다행히 너댓살 때부터 책 읽는 게 가장 재미있어 책이라면 원 없이 읽었으니 평생 마이너리티였어도 내 인생에 그럭저럭 만족한다. 책 읽느라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공연히 이런저런 자리에 어울렸다가 불쾌한 구설에 휘말릴 일도 없으니 不易好也!
내 자화상
내 컴퓨터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몇 권의 책이 메모리되어 있다. 출간된 지 오래된 탓에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어 틈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알아보는 책도 있고, 가격 때문에 망설이는 책도 있다. 이제 사다놓은 책이 거의 다 떨어졌으니 슬슬 새 책을 찾아봐야 한다. 읽을 책이 간당간당 하면 아편쟁이처럼 금단현상에 시달린다. 잠도 잘 안 오고 입맛도 까끌까끌해진다. 심지어 술맛까지 반감한다. 안치환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는 사람보다 책이 아름답다. 여행이 독서보다 더 좋은 줄은 알지만 비용이 덜미를 잡아 스스로 Bucket List를 다 지운 지 오래다. 능력 밖의 일은 미련 없이 다 잊고 이따금 서점이나 다녀오면서 안분지족하면 마음이 넉넉해져 부러움마저 지워진다. 나처럼 무능한 사람은 이렇게 세월 따라 終命하는 게 순리가 아닌가 싶다. 그 동안 격려해준 여러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왜 지금 지리학인가」 독후감 끝
첫댓글 덕분에 좋은 글 잘 읽고 있네.
내가 보답할 것이라고는 술 밖에 없네.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서초동에서 좀 보세.
신문기자하고 저녁약속이 될 것 같은데...되면 같이 해도 될 것 같고...
그 약속이 안 되면 우리끼리 해도 되고...
'배우고 또 익히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녹내장도 아닌데 한 시간 책 들다보기도 어려운 나 같은 사람에게 오랜 시간을 두고 수고해준 두 권의 독후감은 즐거움을 주었다!
수고한 그대는 즐거워서 썼다니... 쓰면서 즐거웠다니 그 또한 겸손하게 들린다!
감사함을 전하는 오늘이 8월의 마지막 날!
어쩌면 그대가 좋아하는 '순하리'를 같이 할 친구들이랑, 오늘 오후에는 노닥거리고 정나누는 자리 마련되기를 기대해보네.
잘 따라오면서 ... 내가 좋아하는 지리도 익히며 즐거웠다네...!
감사합니다!!!
새벽에 댓글을 쓰고 호수공원 가서 자전거 트랙 10바퀴를 돌고 와서 아침을 먹고 이제 들어오니 위 댓글은 없고 원섭이친구 댓글 뿐이다.
'아! 핸드폰으로 올린게 링크가 되지 않았나보다' 하고 핸드폰을 펴니 전에 쓰던 글이있다고 알린다.
그걸 다시 올리고 이 컴을 나갔다 다시 왔다.
이심전심이다.
몇 달 전에 cafe 지기인 내게 "글쓰는 동기들 모여서 식사 한 번 하자."했던 그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러면 읽기만 한 친구는 어쩌나?
cafe 지기의 고민도 있다.
어쩌나?
1만원씩 들고 저녁에 만납시다.
종로로 할랬더니,
기왕 . - 서초동으로 定해줬으니 그리로 합시다.
앞서가는 친구들 덕에 즐거웠던 우리 이야기 해보세.
저녁 7시에 인하순대국에서 보세
송파 갔다가 파주 갔다가 오면, 저녁 7시가 빠듯할 거야
오늘 저녁에는 중국통인 신문기자 한 친구도 올걸세.
함께 자리를 하세
창현이는 지난번 독서클럽 400회 모임에서 통성명 한 적이 있어 낯설지 않은 친구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