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332) 생각 속에서 뺑뺑이
정견→ 직관적 앎→ 깨어남
생각과 분별에만 의지하면 추측이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가 다시 새 생각을 만들어 마치 다람쥐 쳇바퀴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셔터스톡
불교에서 법은 여러 뜻으로 쓰이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생명]을 말합니다. 생명은 절대 진리인 법신(하나님)그 자체이며 그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나는 진리요 길, 생명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는 [중생이 이미 이걸 다 갖추고 있구나! ]라며 감탄하신 것이지요.
사람들은 일단 생각 분별로 모든 걸 인식하려는 지독한 전도몽상에 빠져있기에 생각이 생명에서 나온 걸 돌아 보지 못한 채 생명은 물질의 화학적 결합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오해하거나 심지어는 신에 의해 기획된 것이란 논리도 만들어내지만 신 역시도 생명이니까 분신인 생명을 재생산 할 수 있는게 아닙니까?
이런 모든 망상들은 다 지금 자기 생각을 만드는 [제1원인]이 뭔지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제 생각 속에서 끝없이 추측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추측이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가 다시 새 생각을 만들어 생각 속에서 도저히 헤어나오질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끝없이 생각 속에서 뺑뺑이만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와 모든 이론과 가설을 버리고 지금 여기 뭐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으며 모든 생각과 현상들의 제 1원인이 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예수도 [나=진리=생명]이라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또 생각 속에서 그 말을 다르게 [예수란 개체]로 해석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의 언행에 대한 개인적 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죄인인 인간의 성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우선시하는 종교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생각을 너무 믿고 의지하기에 일어난 실수이자 개체심(에고)이 빚어낸 불행입니다.
그래서 법을 보려면 모든 생각을 따르지 말고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는지, 또한 그 생각의 질료(재료)는 무엇인지 직관 통찰(이를 [정견]이라 함)해야 합니다. 즉 생각의 내용에 자꾸 속는게 아니라 생각이란 현상 자체를 똑바로 정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온개공]이란 가르침도 시작된 것이지요.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특별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생각에 스스로 세뇌되어 [좋구나]하며 빠지지 않고 모든 생각들을 끝까지 객관적으로 재점검해보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견의 시선이 자기 안에서 직관적 [앎]으로 승화될 때 깨어남이 일어납니다.
깨어남이란 바로 진리인 생명에 대한 앎이자 존재의 제 1원인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모든 건 다 내 의식안에서 [앎(안다, 모른다는 것조차도 다 아는 앎까지를 포함)]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 의식(앎)은 생명 법신자리의 눈입니다. 그러면 그 몸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지금 여기 일체 모든 현상을 다 있게 하는 이 [생명]자체입니다.
하지만 또 생각으로 [생명이구나!] 해가지곤 절대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생명 자리를 보기 위해선(이를 견성이라 함) 그걸 가로막는 과거의 생각과 느낌을 붙잡고 그걸 자기 동일시하는 에고의 업습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깨어남은 생각, 느낌이 아니고 그냥 우주조차도 있게 하는 [생명과 즉통하는 것]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